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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두 대통령을 만난 행복한 시간
노무현 대통령이 책을 쓰라고 했다.
글쓰기에 관한 책을 쓰라고 했다. ‘
우리나라 글쓰기 수준을 높일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공직자들이 그래야 합니다.
글쓰기에 관한 책을 쓰세요.
연설비서관실에서 일하면서 깨달은 글쓰기에 관한 노하우를 공유하는 책을 쓰세요.’
현직 대통령의 명령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나의 영웅이었다.
엄혹했던 유신 시절,
쉬쉬하며 소곤거리는 어른들의 입에서 나온 ‘김대중’이란 인물은 역사 속 위인 같은 존재였다.
그분을 3년 가까이 모시는 꿈같은 일이 현실이 됐다.
아직도 믿기지 않는 일을 그때는 철없이 했다.
내가 제정신이었다면 아마 단 한 줄도 그분께 보여드리지 못했을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글쓰기 지침
1. 자네 글이 아닌 내 글을 써주게. 나만의 표현방식이 있네. 그걸 존중해 주게.
2. 자신 없고 힘이 빠지는 말투는 싫네. ‘~같다’는 표현은 삼가게.
3. ‘부족한 제가’와 같은 형식적이고 과도한 겸양도 예의가 아니네.
4. 굳이 다 말하려고 할 필요 없네. 경우에 따라서는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도 연설문이 될 수 있네.
5. 비유는 너무 많아도 좋지 않네.
6. 쉽고 친근하게 쓰게.
7. 글의 목적이 무엇인지 잘 생각해 보고 쓰게. 설득인지, 설명인지, 반박인지, 감동인지.
8. 연설문에는 ‘~등’이란 표현은 쓰지 말게. 연설의 힘을 떨어뜨리네.
9. 때로는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것도 방법이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고 한 킹 목사의 연설처럼.
10. 짧고 간결하게 쓰게. 군더더기야말로 글쓰기의 최대 적이네.
11. 수식어는 최대한 줄이게. 진정성을 해칠 수 있네.
12. 기왕이면 스케일을 크게 그리게.
13. 일반론은 싫네. 누구나 하는 얘기 말고 내 얘기를 하고 싶네.
14. 치켜세울 일이 있으면 아낌없이 치켜세우게. 돈 드는 거 아니네.
15. 문장은 자를 수 있으면 최대한 잘라서 단문으로 써주게. 탁탁 치고 가야 힘이 있네.
16. 접속사를 꼭 넣어야 된다고 생각하지 말게. 없어도 사람들은 전체 흐름으로 이해하네.
17. 통계 수치는 글의 신뢰를 높일 수 있네.
18. 상징적이고 압축적인, 머리에 콕 박히는 말을 찾아보게.
19. 글은 자연스러운 게 좋네. 인위적으로 고치려고 하지 말게.
20. 중언부언하는 것은 절대 용납 못 하네.
21. 반복은 좋지만 중복은 안 되네.
22. 책임질 수 없는 말은 넣지 말게.
23. 중요한 것을 앞에 배치하게, 사람들은 뒤를 잘 안 보내, 단락 맨 앞에 명제를 던지고,
뒤에 설명하는 식으로 서술하는 것을 좋아하네.
24. 사례는 많이 들어도 상관없네.
25. 한 문장 안에서는 한 가지 사실만을 언급해 주게. 헷갈리네.
26. 나열을 하는 것도 방법이네. ‘북핵 문제, 이라크 파병, 대선자금 수사 ...’
나열만으로도 당시 상황의 어려움을 전달할 수 있지 않나?
27. 같은 메시지는 한 곳으로 응집력 있게 몰아주게. 이곳저곳에 출몰하지 않도록.
28. 평소에 사용하는 말을 쓰는 것이 좋네. 영토보다는 땅, 식사보다는 밥, 치하보다는 칭찬이 낫지 않을까?
29. 글은 논리가 기본이네. 멋있는 글을 쓰려다가 논리가 틀어지면 아무것도 안 되네.
30. 이전에 한 말들과 일관성을 유지해야 하네.
31. 여러 가지로 해설될 수 있는 표현은 쓰지 말게.
모호한 것은 때로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지금 이 시대가 가는 방향과 맞지 않네.
32. 단 한 줄로 표현할 수 있는 주제가 생각나지 않으면, 그 글은 써서는 안 되는 글이네.
노무현 대통령은 글쓰기를 음식에 비유해서 얘기한 적이 있다.
이날 대통령의 얘기를 들으면서 눈앞이 캄캄했다.
1. 요리사는 자신감이 있어야 해.
너무 욕심부려서도 안 되겠지만, 글 쓰는 사람도 마찬가지야.
2. 맛있는 음식을 만들려면 무엇보다 재료가 좋아야 하지.
싱싱하고 색다르고 풍성할수록 좋지. 글쓰기도 재료가 좋아야 해.
3. 먹지도 않은 음식이 상만 채우지 않도록. 군더더기는 다 빼도록 하게.
4. 글의 시작은 애피타이저. 글의 끝은 디저트에 해당하지. 이게 중요해.
5. 핵심 요리는 앞에 나와야 해. 두괄식으로 써야 한단 말이지.
다른 요리로 미리 배를 불려 놓으면 정작 메인 요리는 맛있게 못 먹는 법이거든.
6. 메인 요리는 일품요리가 되어야 해.
해장국이면 해장국, 삼계탕이면 삼계탕, 한정식같이 이것저것 나오는 게 아니라 하나의 메시지에 집중해서 써야 하지.
7. 양념이 많이 들어가면 느끼하잖아. 과다한 수식이나 현학적 표현은 피하는 게 좋지.
8. 음식 서빙에도 순서가 있다네. 글도 오락가락. 중구난방으로 쓰면 안 돼, 다 순서가 있지.
9. 음식 먹으러 갈 때 식당 분위기 파악이 필수이듯이.
그 글의 대상에 대해 잘 파악해야 해.
사람들이 일식당인 줄 알고 갔는데 짜장면이 나오면 얼마나 황당하겠어.
10. 요리마다 다른 요리법이 있듯 글마다 다른 전개 방식이 있는 법이지.
11. 요리사가 장식이나 기교로 승부하려고 하면 곤란하네.
글도 진심이 담긴 내용으로 승부해야 해.
12. 간이 맞는지 보는 게 글로 치면 퇴고의 과정이라 할 수 있지.
13. 어머니가 해주는 집밥이 최고지 않나? 글도 그렇게 편안하고 자연스러워야 해.
김대중 자서전 중에서
김대중 대통령도 자서전에서 글은 어떻게 써야 하는지 밝히고 있다.
연설문은 누가 들어도 알 수 있도록 쉽게 쓰려고 노력했다.
문장은 명료하고, 예는 쉽게 들었다.
미문은 경계했고, 오해 소지가 있는 문구는 배격했다.
그리고 중요한 내용은 되풀이해서 전달했다.
청중들이 싫증을 낼 만큼 반복했다.
그래야 비로소 청중들이 ‘김대중 연설’로 인식했다.
무슨 일이든 내가 알아야 남을 설득할 수 있었다.
연설문을 작성하는 것은 일종의 공부였고, 현안에 대한 나의 입장을 정리하는 기회이기도 했다.
그리고 연설문은 진실해야 했다.
말의 유희나 문장의 기교에 빠지면 나의 가치와 철학, 그리고 의지가 없어지고 만다.
나는 내 연설물을 역사에 남긴다는 생각으로 썼다.
그래서 늘 진지했다.
억강부약(抑强扶弱)과 낭중지추(囊中之錐)
억강부약이란 말이 있습니다.
‘강한 것을 누르고 약한 것을 도와준다’는 말입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여 정부 5년을 관통한 대통령의 철학이었다.
대통령은 서거 직전까지 힘없는 사람들이 살기 좋은 나라를 어떻게 하면 만들 수 있나 고민했다.
또 하나.
낭중지추 ‘주머니 속의 송곳은 밖으로 삐져나오게 되어 있다는 말.
역량이 있는 사람은 눈에 띄려고 애쓰지 않아도 언젠가 눈에 띄게 되어 있습니다.’
글쓰기는 집을 짓는 것과 같으며, 좋은 집을 짓기 위해서는 연장 통을 잘 갖춰놓아야 한다.
유혹하는 글쓰기_스티븐 킹
내게 포털사이트는 훌륭한 연장 통이다.
연장 통 쓰는 요령은 이렇다.
포털사이트의 ’뉴스‘를 클릭한다.
우측 상단의 ’검색‘을 클릭한다. ’
뉴스 상세검색‘을 클릭한다.
검색어를 입력하고, 하단의 ’칼럼‘을 클릭한다.
예를 들어, 도서관에 관한 글을 쓰기 위해 ’도서관‘을 검색하면 이에 관한 통계나 사례 등을 풍부하게 얻을 수 있다.
해당 칼럼이 너무 많은 경우에는 ’제목에서만‘을 클릭하면 된다.
유머에도 법칙이 있다.
미국 대통령은 청중을 웃게 만드는 것이 대통령의 의무라도 되는 것처럼 끊임없이 유머를 시도한다.
미국 상원 의원 후보 자리를 두고 대결할 때 스티븐 더글러스 의원은
에이브러햄 링컨에게 공격적인 언사도 서슴지 않았다.
‘당신은 두 얼굴을 가진 이중인격자요’
링컨이 받아쳤다.
‘만약 내게 두 개의 얼굴이 있다면 하필 이런 중요한 자리에 이 얼굴을 가지고 나왔게소’
물론, 링컨이 잘생겼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이해되지 않는 조크다.
두 대통령의 연설문 차이
1. 일반론에 대한 생각이 달랐다.
노무현 대통령은 연설에 일반론을 담는 것을 꺼려 했다.
자신만의 독창적인 논리와 주장·제안을 담으려고 했다.
2003년 5월 제11차 반부패 국제회의 연설문 초안에서 부패의 해악에 대해 언급한 후,
국제 공조를 통해 부패를 일소해야 한다고 썼다.
대통령은 전면 수정을 지시했다.
부패가 안 좋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고, 국제 공조 역시 공자님 말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것보다는 대한민국이 부패 척결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고,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해나갈 것인지, 우리의 이야기를 넣으라는 주문이었다.
‘Man(인류)에 대해 쓰지 말고, man(한 인간)에 대해 쓰라’ _ E.B. 화이트
김대중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일반론에 가까운 지론을 펼치는 걸 즐겨 했다.
‘인류는 농업혁명, 도시혁명, 사상혁명, 산업혁명과 지식 정보혁명 등 다섯 번의 혁명을 거쳤으며,
21세기는 눈에 보이지 않는 지식과 정보·문화가 인류 진보를 이끄는 힘이 될 것입니다.’
2. 인용에 대한 선호 차이다.
노 대통령은 속담·격언·명언을 인용하는 것을 탐탁치 않게 여겼다.
그러나 김 대통령은 세계적인 학자나 권위 있는 국제기구를 자주 인용했다.
‘합리적 기대이론’을 주창한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로버트 루카스 교수의 말인
‘경제는 그 주체들이 기대한 대로 이뤄진다.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하면, 실제로 좋은 방향으로 가고, 나빠질 것이라고 생각하면 나빠진다.’를
인용하여 연설문 초안을 작성한 적이 있다.
이후에 대통령은 ‘경제는 심리다’라며 이 내용을 몇 차례 인용했다.
3. 한자어 사용도 달랐다.
노 대통령은 광복 이듬해에 태어났다. 한글세대다. 가급적 우리말을 쓰려고 했다.
‘달하다’는 ‘이르다’,
‘표방하다’는 ‘내세우다’,
‘풍요로운’은 ‘넉넉한’,
‘기인한’은 ‘비롯된’,
‘수립했다.’는 ‘세웠다.’로 바꿨다.
어쩌면 좀 더 쉬운 말을 쓰고자 하는 노력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말 표현이 말의 구수함을 더했다.
김대중 대통령도 다르지 않다.
연설문에 ‘재테크’란 단어를 썼다가 ‘재테크란 말은 일본식 표현입니다.
되도록 쓰지 않는 게 좋습니다.’라는 코멘트를 받은 적이 있다.
하지만 한자어를 많이 썼다.
‘만난萬難을 극복하고’이런 표현이 대표적이다.
‘어려움을 이겨내고’보다는 고색창연한 맛이 있다.
IMF 외환위기 상황에서 특히 많이 썼다.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꽃이 되었다.
거명하기 어느 자리에나 그 자리를 만들기 위해 수고한 사람이 있다.
또한 그 자리에서 반드시 감사를 표해야 할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들을 한 사람 한 사람 거명하면서 감사를 표하는 것으로도 천 냥 빚을 갚을 수 있다.
김대중 대통령은 이름을 거론하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연설문 보고를 받으면 거명해야 할 사람 중에 빠진 사람이 없는지부터 챙길 정도였다.
거명을 하는 데 있어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다.
거명하면서 이름이 틀리는 경우다.
이것은 치명적이다.
참석 예정 명단에는 있었는데 현장에 오지 않은 사람도 꼼꼼히 챙겨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다른 거명까지 의례적인 헛말로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사람을 거명해야 하는지 아닌지 애매한 경우에는 무조건 넣는 게 좋다.
자기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고 평생 등지는 사람도 있다.
거명은 아무리 인심이 후해도 나쁘지 않다.
거명만 잘해도 최악은 면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