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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
모두가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하지만 정작 스스로 변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이해관계가 아니라 오직 호기심으로 조건 없이 몰두할 때
우리는 다시 어린아이가 되어 사물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이 힘이 창의성이며 21세기 최고의 미덕이다.
창의성의 시작은 질문으로부터 온다.
사회에 나오는 순간 학생들은 이 세상에 정답이란 애초에 없는 것임을 알게 된다.
질문이야말로 멋진 답으로 가는 마법의 길이다.
전략과 실천
조르바는 살구나무 묘목을 심고 있는 노인에게 왜 묘목을 심고 있느냐고 묻자
노인은 '나는 결코 죽지 않을 것처럼 삽니다'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조르바는 '나는 내일 죽을 것처럼 삽니다'라고 말한다.
이 대화처럼 전략과 실천의 문제를 통쾌하게 밝혀 둔 예시를 알지 못한다.
삶의 전략을 세워 준비할 때는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원대한 꿈에서 시작하라.
그러나 실천할 때는 '나에게 내일은 없다'는 마음으로 일을 무찔러가야 한다.
월급쟁이
월급쟁이는 남의 집 종에 불과하다.
다른 사람이 내 운명을 쥐고 흔드는 것에 분개하라.
변화는 절박함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다.
절박함은 아직 희망이 있을 때 찾아온다.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것이 희망을 이루게 하는 강력한 에너지다.
모든 관심과 능력을 집중하게 된다.
절박함은 꿈이 있는 사람에게만 생겨난다.
이정록 시인
원고지를 처음 만난 건 초등학교 사학년 때다.
'뭘 써도 좋다. 원고지라는 걸 다섯 장만 채워 와라!'
처음 원고지라는 걸 펼쳐보니 (10×20)이라 쓰여 있는 게 아닌가?
그럼 답은 200! 원고지 칸마다 200이란 숫자를 가득 써 냈다.
'너 같은 놈은 교사 생활 삼십 년, 개교 이래 처음'
그로부터 15년 뒤 나는 작가가 되었다.
가치 있기 때문에 칭송받는 것이 아니라 칭송받기 때문에 가치 있어지는 것이다(세네카)
박세리가 막대기 몇 개 바꿔가며 딱딱한 작은 공을 구멍에 잘 집어넣는 것이 인류에게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가?
무엇이든 좋다.
그것이 자신의 유일한 삶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것이라면...
로고테라피
빅토르 프랑클은 수용소의 한 죄수라는 상황은 바꿀 수가 없지만 상황을 해석하는 자신의 관점을 변화시키자는 것이다.
한 노인이 아내의 죽음으로부터 오는 상실감에 시달릴 때 다음과 같이 물었다.
만일 선생님이 먼저 돌아가셔서 아내가 지금 혼자 남아 생을 살아야 한다면 그분은 어떻게 살아갈까요?
'그건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나는 처가 혼자 남아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이 절망을 겪게 할 수 없습니다.'
선생님의 고통은 그렇다면 아내의 고통을 대신한 고통입니다.
삶은 구체적인 것이다.
우리는 인생의 추상적 의미를 알아내려고 애써서는 안 된다.
이 순간에 당신에게 주어진 것이 바로 당신의 인생이다.
삶은 뜨거운 것이다.
사랑은 쳐다만 보는 것이 아니다.
삶은 떨림 그 자체다.
잘난 척하지 않고 똑똑하게 보여라
상대방의 말에 반박하고 싶거나 꼭 한 마디 해 주고 싶어 못 견딜 때는 의견을 말하기 전에 반드시 질문을 하라.
좋은 질문은 훌륭한 반박보다 훨씬 부드럽고 창조적이다.
답변이 부족하면 상대방은 스스로 무너지고 답변이 훌륭하면 당신은 황금 같은 조언을 듣게 되는 것이다.
선택과 집중
메두사의 머리를 자르라.
그리고 그 피 흘린 자리에서 날개 달린 천마를 탄생시켜라.
그래야 하늘을 날 수 있다.
재능이 많은 사람들은 한곳에 몰입하기 어렵다.
세 가지 위험(니체)
삶이 온전하려면 위험 속에 있어야 한다.
하나는 고독이다.
또 하나의 위험은 진리에 대한 절망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동경이다.
니체는 실존의 혼돈과 미로 속에서 아리아드네의 실을 찾아 나선다.
미궁을 지나지 않으면 삶의 광명을 느낄 수 없다.
삶이 좋아 더 살고 싶은 곳.
니체는 그곳이 바로 질스마리아였다.
매일의 고통과 환각 속에서 죽음을 직감하고 두려움에 떨어야 했던 니체는 질스마리아에서 환호의 눈물을 흘렸다.
해발 6000피트의 질스마리아에서 자라투스트라를 만나서 고통스러운 삶을 긍정하게 된 것이다.
삶의 긍정.
그것은 이렇다.
삶 속에는 의미와 가치를 부여할 최종 목표는 없다.
그것을 부여할 신이 죽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아무런 목표도 의미도 없이 반복한다.
그러나 우리는 목표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니라 삶 그 자체를 위해 산다.
좋은 사람에 대한 아주 멋진
기준 내가 서고 싶으면 먼저 그 사람을 세워 주어라.
이런 가치를 믿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다.
결혼은 관계다.
결혼을 하면 서로 한 두 가지씩은 희생해야 한다.
서로 내놓아야지 한 사람만 내놓으면 안 된다.
관계를 위해 희생해야지 상대를 위해 희생하면 내가 죽어버린다.
인종 지말자는 상종할 수 없는 막가는 인간이란 뜻으로
대표적인 인물이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실용주의 정치가 관중이다.
포숙아는 어려운 시절 함께 장사했던 관중이 이익을 더 가져가도 탐욕스럽다고 하지 않았다.
그가 가난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이 더 어렵게 꼬일 때도 무능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일하다 보면 잘 될 때도 있고 꼬일 때도 있다는 걸 이해했기 때문이다.
함께 하던 곳에서 쫓겨나도 모자라다 말하지 않았다.
그곳에서 받아들일 만큼 좋은 관계를 이룰 때가 아직 오직 않았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싸움터에서 도망쳐 와도 비겁한 자라고 탓하지 않았다.
그에겐 살아서 모셔야 할 노모가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시던 사람과 운명을 같이 하지 않아도 의리 없는 인간이라 말하지 않았다.
작은 치욕을 참고 더 큰일을 해 낼 사람이란 걸 이해했기 때문이다.
관중을 낳은 건 그의 부모였으나 그를 알아준 건 친구 포숙아였다.
공자는 관중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그 인격을 소인배라 칭한 바 있다.
공자의 인의는 좋은 말이지만 현실성이 떨어지고
중국을 통일한 법가 사상은 현실적이기는 하지만
인의와 법을 통합하고 여기에 백성의 먹거리인 경제를 더해 정치적 성과를 이룩한 관중이야말로
중국 최고의 정치적 모범으로 연구해야 할 대상이다.
그녀를 다루는 법
내 속에 들어 있는 또 다른 나.
그중에서 가장 원형적인 인격은 남자 속에 들어있는 아니마.
혹은 여자 속에 들어 있는 아니무스다.
예를 들어 남성의 무의식 속에는 전형적이고 원형적인 형상이 들어있는데 카를 융은 이것을 아니마라고 부른다.
종종 남자들은 내면에 들어 있는 여성인 아니마의 속삭임에 마음을 열어놓음으로써 현혹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아니마를 그냥 무조건 배척하면 안 된다.
그녀에게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무의식의 이미지를 의식에게 전달해 주는 것이 바로 그녀이며
합리성을 추구하는 우리 시대가 잃어버린 신화적 환상의 모태이기도 하다.
그녀를 잃는 순간 우리는 평범 그 자체가 되고 만다.
유혹 당해 완전히 빠져서도 안되고 결코 잃어서도 안 되는 것 그것이 아니마다.
그래서 의식으로서의 나와 무의식으로서의 또 다른 인격인 그녀를 분명히 구별 짓는 것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