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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 여인
아마 네 살쯤이었나 보다.
두 살배기 기어다니는 동생과 나만이 목포 이층집의 외진 방 안에 남겨져 있었는데,
마침 그때 바로 이웃집에서 큰불이 났다.
영겁의 시간이 흐른 뒤 어디선가 갓난애 울음소리가 찢어지는 듯이 들렸다.
내 동생 팥쥐의 울음소리였다.
팥쥐는 질식할 것 같은 기분을 본능적으로 느꼈는지 굉장히 크게 울었다.
그때서야 바깥의 모든 소리들이 힘차게 유리창을 뚫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비로소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는 이웃집에 불이 났다는 말을 듣고 시장에서부터 숨이 끊어져라 달려왔다고 했다.
콩쥐야, 이층 문을 열어라, 그리고 계단을 굴러라. 어서.
찢어지게 우는 팥쥐의 울음소리 사이로 엄마의 비명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더듬더듬 손을 내밀어 이층 문고리를 열어젖혔다.
아래층으로 가는 계단은 미칠 듯이 아름다운 불의 범람이었다.
아- 이 세상에 그토록 아름답고 풍부한 불이 또 있을까.
그보다 더 찬란한 불을 나는 다시 볼 수 있을까
그런데 거기 불의 한가운데 어머니가 서 계셨다.
그 장면을 생각하면 어머니는 흰옷을 입고 성모의 왕관을 쓰고 있는 듯이 생각된다.
자, 어서, 일 온, 어서,
나는 본능적으로 팥쥐를 계단으로 밀어뜨리고 나 역시 두 눈을 감고 불속으로 뛰어들었다.
무서운 불속에서 어머니, 나의 어머니가 서 계셨고,
어머니가 두 팔을 벌리고 그토록 애소하는 슬픈 눈동자로 노래하듯이 나를 부르고 계셨으므로
불속으로 뛰어든다는 것은 곧 나에게 사랑을 의미했고 산다는 것을 의미했다.
내 일기를 훔쳐본 그에게 분노 대신 짜릿한 희열을 느끼던 날
‘그런데 베레란 누구지?’
나는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그가 그토록 오늘 밤 까닭 없이 나에게 화를 내고 우리 엄마의 슬픔까지를 걱정하고,
나를 비도덕적인 문제아 취급을 한 것은 ‘베레’때문이었던 것이다.
베레가 누구냐고?
나 역시 베레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베레라는 이름이 어딘지 남성의 무드를 풍기고 멋진 남자의 이름 같은 느낌을 주기에
나는 그저 일기를 ‘베레!’라고 부르며 써나가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것은 불란서 말인가? 영어인가? 아니면 어느 무슨 외래어인가?
나는 알지 못한다.
그것은 그저 ‘다다’라는 말처럼 의미가 없는 것이다.
안네가 키티라고 자기 일기책을 불렀듯이 단지 그것뿐이었다.
베레는 누구인가,
그는 어떤 얼굴의 어떤 사람이어야 했을까.
나는 아직도 그것을 말할 수가 있다.
절대 애인,
모든 남자에게 절대 연인으로서 베아트리체가 있듯이 베레란 나의 절대 애인이어야 할 하나의 아름다운 추상명사였다.
천사의 이름 같은 것이었다.
먼 곳에 있는 별의 이름처럼 절대 순수의 영역이었다.
그리운 별,
아름다운 하나의 눈동자 같은,
‘아니 내 일기를 훔쳐봤어요?’
나는 분노 이전에 불가사의하게도 어떤 기쁨을 느끼고 전율했다.
왜?
고향이란 저 혼자 아름다운 나르시시즘적인 미녀 같은 것
하얀 말을 타고 누군가가 어두운 우리 집 대문 앞에 멈추었다.
그는 하프를 든 미청년이었다.
운명이 운명이 되게 하기 위해 그는 나를 찾으러 왔노라고 말했다.
차가움과 무표정만큼 크나큰 유혹이 있을 수 있을까.
그의 음악은 그 태양의 문지방을 여는 마법의 열쇠였다.
그의 하프 아래의 어둠은 마치 보석 알처럼 굴러떨어졌다.
나는 관 속에 갇혀 있었다.
고열에 시달리며 안방에 누워 있으려니 이제야 집에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나는 조금씩 회복되면서 기운을 되찾아 갔다.
나는 멍하게 경대 거울 속을 들여보았다.
두 눈이 황량한 검은 소녀가 얼이 빠진 듯이 거울 속에서 마주 바라보고 있었다.
소녀는 조금 부도덕한 낌새를 풍기고 있었다.
부도덕이란 다름 아닌 자기가 신뢰해야 할 것을 신뢰하지 못하는 그런 방종과 허무의 낌새를 말한다.
부도덕이란 다름 아닌 자기가 감사하면서 먹여야 할 음식에 전혀 식욕을 못 느끼는 그런 건방진 고통을 말하는 것이다.
영어회화 시간에 받은 억압과 수모가 창작 욕구에 불을 지피고
학교에서 영어회화와 영어 작문을 외국인이 맡아서 가르치는데 우리를 담당한 강사는
미세스 슈넬러라는 젊은 미국 여자였다.
그녀가 ‘일화(Anecdote)'라는 것을 써오라고 했다.
나는 밤을 새워 한영사전을 찾아가며 미국 초등학생이 쓴 작문만도 못한 것을 써서 제출했다.
나의 어린 시점에 관한 이야기였다.
‘나는 때대로 시간에 대해 어리둥절함을 느낄 때가 많다.
어린 시절,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나는 오전에 학교에 갔다 와서 낮잠을 잤다.
잠에서 깨어나니 어슴푸레한 빗속이었다.
저녁인지 아침인지 알 수 없는 그런 시간이었는데 식구들이 밥을 먹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아침밥인지 저녁밥인지 물었다.
식구들은 웃으며 아침밥이라고 하며 빨리 학교에 가야지 지각하겠다고 했다.
나는 밥도 먹지 못하고 허둥지둥 책가방을 챙겨 학교로 달려갔다.
텅 빈 운동장은 어두웠고 귀신이라도 나올 듯이 음산했다.
나는 한참 동안을 빗속에 서서 텅 빈 운동장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다 비로소 점점 더 어두워지는 빈 운동장의 의미를 알았을 때,
나는 눈물이 뜨겁게 흐르고 있는 것을 알았다.
그 눈물은 외로움 때문이었을까?
나의 시간이 타인의 시간들과 다르다는 것을 깨달은 무서움 때문이었을까?’
미세스 슈넬러는 작문 숙제를 돌려주면서 그동안 나를 들볶았던 것이 미안했는지
‘미스 킴! 문장의 오류가 아주 많긴 하지만 내용은 썩 좋아요. 탁월해요,
그러나 ...’ 하고 정관사와 부정관사의 용법 등에 대해 장황하게 늘어놓기 시작했다.
토머스 울프
나는 어떠한 잃어버린 세대에도 속한다고 느끼지 않으며
지금까지도 그렇게 느낀 적은 한 번도 없다.
혹시 모색하고 있는 세대라면
어떤 세 대건 틀림없이 잃어져 있을 것이라는 의미라면 이야기가 다르지만
그러므로 나는 어느 곳의 어떠한 잃어버린 세대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다.
나 자신은 개인적으로 내가 잃어져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느끼지만
그렇기 때문에 나는 차리리 나 자신을 모색하고 있는 세대라고 부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