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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러미 벤담의 공리주의
공리주의의 핵심 사상은 간결하며, 직관적으로 마음에 와닿는다.
도덕의 최고 원칙은 행복을 극대화하는 것, 전반적으로 쾌락이 고통을 넘어서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벤담에 따르면, 옳은 행위는 '공리'를 극대화하는 모든 행위이다.
그가 말하는 '공리'란 쾌락이나 행복을 가져오고, 고통을 막는 것 일체를 가리킨다.
벤담은 다음과 같은 추론을 거쳐 자신이 주장하는 원칙에 도달한다.
우리는 모두 고통과 쾌락이라는 감정에 지배된다.
이 감정은 우리의 '통치권자'다.
이는 모든 행위를 지배할뿐더러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결정한다.
옳고 그름의 기준은 "그의 주권에 달렸다".
우리는 모두 쾌락을 좋아하고 고통을 싫어한다.
공리주의 철학은 이 사실을 인정할 뿐 아니라 도덕적·정치적 삶의 기초로 삼는다.
공리를 극대화한다는 원칙은 개인만이 아니라 입법자에게도 해당한다.
정부는 법과 정책을 만들 때, 공동체 전체의 행복을 극대화하는 일은 무엇이든 해야 한다.
그렇다면 공동체란 무엇인가?
벤담에 따르면, 공동체란 "허구의 집단"이며 그것을 구성하는 개인들의 총합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시민과 입법자들은 이렇게 물어야 한다.
"우리가 이 정책에서 얻는 이익을 모두 더한 뒤에 총비용을 빼면, 다른 정책을 펼 때보다 더 많은 행복을 얻을까?"
폐암의 이익
담배 회사인 필립 모리스는 체코에서 사업이 한창이다.
체코는 흡연이 여전히 대중의 사랑을 받고 사회적으로 용납되는 곳이다.
최근 체코 정부는 흡연에 따른 의료비용 증가를 우려해, 담배에 부과하는 세금을 높이는 방안을 검토했다.
필립 모리스는 세금 인상을 막기 위해, 흡연이 체코의 국가 예산에 미치는 효과에 대한 비용·편익 분석 작업을 의뢰했다.
그 결과, 정부는 흡연으로 손해가 아닌 이익을 본다는 결론이 나왔다.
이유인즉, 흡연자들이 생존 중에는 정부의 의료 예산을 높이지만,
결국에는 일찍 죽기 때문에 노년층을 위한 의료·연금·주거 부문에서 상당한 예산 절감 효과를 낳는다는 이야기다.
이 연구에 따르면, 담배에서 거둬들이는 조세 수입, 흡연자의 조기 사망에 따른 예산 절감 등
흡연의 "긍정적 효과"를 모두 계산하면, 국가는 연간 1억 4700만 달러의 순수익을 올릴 수 있다.
자유론
존 스튜어트 밀 밀의 저서 <자유론>은 개인의 자유를 옹호하는, 영어권 세계의 고전이다.
이 책의 요지는, 사람들은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자유롭게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는 개인의 자유를 간섭하면서 개인을 그 자신에게서 보호하려 들거나
다수가 믿는 최선의 삶을 개인에게 강요하지 않아야 한다.
개인이 사회에 책임을 져야 하는 유일한 행동은 타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행동이라는 게 밀의 주장이다.
내가 어느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한, 내 "독립은 당연히 절대적이다.
개인은 자신에 대해, 자신의 몸과 마음에 대해 주권을 갖는다".
칸트의 정의
우선 칸트는 공리주의를 개인 도덕성의 기초만이 아니라 법의 기초로서도 거부한다.
칸트가 보기에, 공정한 헌법이라면 개인의 자유가 다른 모든 사람의 자유와 조화를 이루도록 힘써야 한다.
그것은 공리를 극대화하는 것과는 관계가 없으며, 공리는 기본권 결정에 "결코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
"행복이라는 경험적 목적에 관해, 그리고 행복의 구성요소에 관해 저마다 견해가 다르기" 때문에
공리는 정의와 권리의 기초가 될 수 없다.
왜 그럴까?
공리를 권리의 기초로 삼는다면, 행복에 관한 여러 견해 가운데 사회가 어느 하나를 지정해야 한다.
특정한 행복을(이를테면 다수의 행복을) 헌법의 기초로 삼는다면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의 가치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게 되면 자기만의 목적을 추구할 개인의 권리가 무시된다.
"어느 누구도 나더러 타인의 기준에 맞춰서 행복하라고 강요할 수 없다.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한, 저마다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행복을 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칸트의 정치론에 나타난 두 번째 두드러진 특징은 정의와 권리를 사회계약에서,
다소 특이한 사회계약에서 도출한다는 점이다.
로크를 비롯해 사회계약을 주장한 초기 사상가들은 합법 정부는 사회계약에서 탄생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때 사회계약은 집단의 삶을 지배하는 원칙을 스스로 정하는 사람들이 결정한다.
그러나 칸트는 이 계약을 달리 본다.
합법 정부는 원초적 계약을 기반으로 해야 하지만,
"이 계약이 (......) '사실'로 존재한다고 생각할 필요는 전혀 없다.
그건 불가능하니까".
칸트는 이 원초적 계약이 진짜가 아닌 상상의 계약이라고 주장한다.
공정한 헌법이 왜 진짜가 아닌 상상의 계약에서 나올까?
우선 국가가 형성된 이래 사회계약이 맺어졌다는 증거를 찾기 힘들다는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다.
둘째로, 도덕 원칙은 경험한 사실에서만 나올 수는 없다는 철학적 이유 때문이다.
도덕법이 개인의 이익이나 욕구에 좌우될 수 없듯이, 정의의 원칙도 공동체의 이익이나 욕구에 좌우될 수 없다.
과거에 어떤 한 집단이 헌법에 동의했다는 사실만으로 그 헌법이 공정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어떤 상상의 계약이 이런 문제를 피해 갈 수 있을까?
칸트는 그것을 간단히 "이성이라는 관념"이라 말한다.
"관념이지만 의심의 여지 없이 존재한다.
그 이유는 그것이 입법자들에게, 국가 전체의 뜻을 통일한다면
어떤 법이 만들어질까를 고려해 법의 틀을 짜도록 만들 수 있기 때문"이며,
각 시민에게는 "동의한 듯한" 의무감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칸트는 집단적 동의라는 상상의 행위가 "모든 공공 법의 정당성을 판가름하는 잣대"라고 결론짓는다.
칸트는 상상의 계약이 어떤 모양새일지, 또는 거기서 어떤 정의의 원칙이 나올지는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거의 두 세기가 지나, 미국의 정치철학자 존 롤스가 이 물음에 답을 하고자 했다.
도덕적 자격은 누가 입학 허가를 받아야 하는가와 관련이 없다
<입학 거절 통보>
귀하의 입학 지원이 거절되었음을 알려드리게 되어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이번 결정에 귀하를 모욕할 의도는 전혀 없었음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귀하를 경멸하지 않습니다.
사실은 귀하가 입학이 허가된 사람들보다 자격이 미달한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귀하께서 귀하가 제공할 자격이 필요치 않은 사회를 만난 것은 귀하의 잘못이 아닙니다.
귀하 대신 입학이 허가된 사람들도 그 몫을 마땅히 받을 자격은 없으며,
어쩌다 입학에 적합한 요소를 갖추었다고 해서 칭송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단지 그들을, 그리고 귀하를, 더욱 광범위한 사회적 목적을 수행할 도구로 이용할 뿐입니다.
귀하께서 이 소식을 들으면 실망하겠지요.
그러나 입학이 거절되었다고 해서 귀하의 타고난 도덕적 가치를 의심하며 더 깊은 절망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귀하는 어쩌다 보니 사회가 원하는 특성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점에서 우리도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다음에는 귀하께 행운이 함께하길 바랍니다.
<입학 허가 통보>
귀하의 입학이 허가되었음을 알려드리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귀하께서는 지금 이 순간 사회에 필요한 특성을 갖고 있다고 판단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귀하께 법을 연구하도록 허가함으로써,
귀하께 귀하의 자신을 사회 이익을 위해 이용하도록 제안하는 바입니다.
귀하는 축하받아 마땅합니다만,
그것은 귀하께서 입학에 필요한 자질을 소유할 당연한 자격이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사실 귀하께 그런 당연한 자격은 없습니다)
복권 당첨을 축하하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귀하는 적절한 순간에 적절한 특성을 갖게 된 행운아입니다.
귀하께서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신다면, 그런 식으로 생긴 혜택을 누릴 권리를 받으실 것입니다.
이 점에서 귀하는 축하를 받으셔도 좋습니다.
귀하께서는, 어쩌면 귀하보다 귀하의 부모님께서는,
거기서 더 나아가, 이번 입학 허가가 타고난 재능을 높이 평가한 결과가 아니라면,
적어도 능력을 갈고닦은 귀하의 의식적인 노력을 높게 평가할 것이라고 여겨 그 점을 축하하고픈 유혹을 느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귀하의 노력을 가능케 한 우월적 성격은 귀하의 당연한 몫이라는 생각도 문제가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귀하의 성격은 다양하고 훌륭한 주변 환경 덕이고, 그러한 환경은 귀하의 공으로 돌릴 수 없기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는 자격 또는 당연한 몫이라는 개념이 해당하지 않습니다.
어쨌거나 가을에 함께 만날 그날까지 안녕히 계십시오.
정의, 텔로스, 영광(아리스토텔레스 정치철학의 핵심)
정의는 목적론에 근거한다.
권리를 정의하려면 문제가 되는 사회적 행위의 "텔로스(telos:목적, 목표, 본질)"를 이해해야 한다.
정의는 영광을 안겨주는 것이다.
어떤 행위의 텔로스를 이성적으로 판단하거나 논한다는 것은,
적어도 어느 정도는, 그 행위가 어떤 미덕에 영광과 포상을 안겨줄 것인가를 추론하거나 논의하는 것이다.
고대에는 오늘날보다 목적론적 사고가 더 흔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불이 위로 솟는 이유는 본래의 자리인 하늘에 닿기 위해서고,
돌이 아래로 떨어지는 이유는 원래 속해 있던 땅에 가까워지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자연은 의미 있는 질서에 따라 움직인다고 여기던 시절이었다.
자연을 이해하고 그곳에서 우리 위치를 이해하는 것은 곧 자연의 목적과 본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권력을 요구하는 주요한 두 세력을 비난한다.
과두정치를 행하는 독재자들과 민주주의자들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들이 오로지 편파적 요구만 한다고 말한다.
과두정치가들은 부자인 자기들이 통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민주주의자들은 자유로운 신분이 시민권과 정치권력의 유일한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두 집단의 요구는 모두 과장되어 있다.
정치 공동체의 목적을 오해하기 때문이다.
정치 공동체는 재산을 보호하거나 경제적 풍요를 달성하기 위해서만 존재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과두정치가들은 틀렸다.
정치 공동체가 오직 그런 것이라면 갑부가 가장 큰 권력을 차지해야 할 것이다.
정치 공동체는 다수에게 주도권을 맡기는 게 아니라는 점에서 민주주의자들도 틀렸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민주주의자'란 우리가 다수결주의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이다.
그는 정치의 목적이 다수의 취향을 만족시키는 것이라는 생각을 거부했다.
결국 양쪽 모두 정치 연합의 최고 목적을 간과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보기에 정치의 목적은 시민의 미덕을 키우는 것이다.
국가의 목적은
"동맹 관계를 맺어 상호 방위에 힘쓰거나 (......) 경제 교환을 수월하게 하고 경제 교류를 증진하는 것"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치는 그보다 숭고한 행위인 좋은 삶을 사는 법을 터득하는 것이다.
정치의 목적은, 사람들이 고유의 능력과 미덕을 개발하게 만드는 것,
즉 공동선을 고민하고, 판단력을 기르며, 시민 자치에 참여하고, 공동체 전체의 운명을 걱정하게 하는 것이다.
정치에 참여하지 않고도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가?
왜 유독 정치에서만 언어력과 사고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왜 가족, 친족, 또는 다른 모임에서는 불가능하까?
이 질문에 답하려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설명한 미덕과 좋은 삶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 책은 주로 도덕철학을 다루고 있지만, 미덕 습득이 시민이 되는 것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도 잘 보여준다.
도덕적 삶은 행복을 목표로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행복'은 쾌락을 극대화하고 고통을 줄이는 공리주의 행복이 아니다.
덕이 있는 사람은 쾌락과 고통을 느끼는 대상을 구별할 줄 안다.
만약 누군가 투견을 보면서 쾌락을 느낀다면,
우리는 이를 극복해야 할 악으로 여기지, 진정한 행복의 원천으로 여기지 않는다.
도덕적 우수성은 쾌락과 고통을 합산하는 데 있지 않고,
그것을 구별하여 고상한 것에서 기쁨을, 천박한 것에서 고통을 느끼는 데 있다.
행복은 마음 상태가 아니라 존재 방식이며, "미덕과 일치하는 영혼의 활동"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노예제 옹호
모든 사람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찬양하는 시민권을 누리지는 못했다.
여성은 자격이 없었고, 노예도 마찬가지였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여성과 노예의 본성은 시민이 되기에 적절치 않다.
지금 생각하면 누가 봐도 부당한 일이다.
그런데 이 부당함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런 주장을 한 뒤로도 2000년 이상 지속되었다.
미국에서도 노예제는 1865년까지 폐지되지 않았고, 여성은 1920년에야 비로소 투표권을 얻었다.
그러나 이러한 부당함이 끈질기게 이어졌다고 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그 부당함을 인정했다는 사실이 용서되지는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노예제를 인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거기에 철학적 정당성을 부여했다.
그의 노예제 옹호론을 살펴보면서, 그것이 그의 정치론 전반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알아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노예제를 옹호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사고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또 어떤 사람은 목적론적 사고가 당시의 편견 때문에 잘못 적용되었다고 생각한다.
텔로스와 적합성이라는 윤리가 일터에서 요구하는 정의의 도덕적 기준은
선택의 합의라는 자유주의 윤리의 기준보다 더 까다롭다.
이를테면 몇 시간씩 똑같은 작업을 반복하는 닭 가공 공장 일처럼 위험한 직업을 생각해 보자.
그런 노동은 정당한가, 부당한가?
자유지상주의자들에게 그 대답은 노동자가 노동력과 임금을 자유롭게 교환했는가에 달렸다.
롤스라면 주변 여건이 공정한 상태에서 노동이 자유롭게 교환되었을 때만 그 노동은 정당하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주변 여건이 공정한 상태에서의 합의가 끝이 아니다.
그 일이 정당하려면, 노동자의 본성에 맞아야 한다.
하지만 어떤 일은 그렇지 못하다.
너무 위험하고 반복적이며 지치는 일이라 사람이 하기에 적절치 않다.
이 경우엔 우리 본성에 맞도록 일을 재조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노예제가 부당하듯, 그 일도 부당하다.
케이시 마틴의 골프 카트
케이시 마틴은 다리가 불편한 프로 골퍼였다.
혈액순환 장애가 있어서 골프 코스를 걸어가려면 심한 고통이 따르고 출혈과 골절이라는 심각한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마틴은 이런 장애에도 불구하고 늘 뛰어난 실력을 보였다.
스탠퍼드 대학에 다닐 때는 대학 챔피언십 팀에서 활동하다가 이후 프로로 전향했다.
마틴은 미국 프로골퍼협회에 토너먼트 경기 중 카트를 이용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PGA는 최고 프로 토너먼트에서는 카트 이용을 금지한다는 규정을 들어, 이 요구를 거절했다.
마틴은 결국 소송을 제기했다.
그는 미국 장애인 법을 지적했다.
이 법은 애초 활동의 "본성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는 범위에서, 장애인에게 합당한 편의시설을 제공하도록 규정한다.
골프계의 거물들이 이 사건에 증인으로 출석했다.
아널드 파머, 잭 니클라우스, 켄 벤추리는 카트 금지 규정을 지지했다.
이들은 골프 토너먼트에서 피로 역시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마틴이 걷지 않고 카트를 타면 불공정하게 이익을 본다고 주장했다.
이 사건은 연방 대법원까지 올라갔고, 근엄한 판사들은 비전문가 입장에서, 언뜻 어리석어 보이는 질문과 씨름해야 했다.
"골프 코스에서 카트를 타고 다니면서 샷을 하는 사람도 '진짜' 골프선수인가?"
이 사건은 전형적인 아리스토텔레스식 정의에 의문을 제기한 셈이다.
마틴에게 골프 카트를 이용할 자격이 있는지 판결하려면, 법원은 문제가 되는 활동의 본질을 결정해야 한다.
코스를 걷는 것은 골프의 본질인가, 부차적 행위인가?
PGA 주장대로, 걷는 것도 골프의 본질에 해당한다면
마틴에게 카트를 타도록 허용하는 것은 경기의 "본성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조치다.
권리에 관한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법원은 골프의 텔로스, 즉 본질을 정해야 했다.
대법원은 7 대 2로, 마틴은 골프 카트를 이용할 권리가 있다고 판결했다.
존 폴 스티븐스 판사는 다수 의견을 대표해 카트 이용은 골프의 근본 성격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판결했다.
"예전부터 골프의 본질은 샷을 하는 행위였다.
즉 골프채를 이용해, 그라운드에 있는 공을 때려 가급적 적은 타수로 멀리 떨어진 홀까지 날려 보내는 행위다".
걷는 행위가 골프 선수의 체력을 시험한다는 주장에 대해, 스티븐슨 판사는 한 생리학 교수의 증언을 인용했다.
이 교수는 18개 홀을 걷는 데 고작 500칼로리 정도가 소모되며,
이는 "맥도날드의 빅맥 햄버거 하나에 든 칼로리보다 적은 양"이라고 주장했다.
골프는 "강도가 낮은 활동이라, 경기에서 오는 피로는 주로 정신 현상이며 여기에는 스트레스와 동기 부여가 핵심 요소다.
마틴에게 카트 이용이란 편의를 제공한다고 해서 골프가 근본적으로 바뀌거나 그가 불공평한 이익을 얻지는 않으리라는 것이 법원의 판결이다.
앤터닌 스캘리아 판사의 생각은 다르다.
그는 적극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명하면서, 법원이 골프의 본질을 결정할 수 있다는 생각을 거부한다.
그는 단순히 판사에게 그 문제를 결정할 권위나 능력이 부족하다고 주장하는 데 그치지 않고, 법원 견해의 밑바탕이 된 아리스토텔레스식 전제에 의문을 제기했다.
경기의 텔로스,
즉 본질을 이성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다.
'본질적'이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특정한 목적을 성취하는 데 꼭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경기의 진짜 본성은 오락이 전부이기에(그것이 경기와 생산적 활동의 차이다), 임의로 정한 경기 규칙을 '본질적'이라고 말하기란 불가능하다.
사죄와 손해배상
우려되는 사죄 정치의 상당 부분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자행된 만행과 관련이 있다.
독일은 유대인 대학살 책임을 인정해, 생존자와 이스라엘을 상대로 수백억 달러 상당의 배상금을 지출했다.
지난 수년 동안 독일 정치 지도자들은 공개 사죄하면서, 나치에 대한 책임을 다양한 모습으로 인정했다.
일본은 전쟁에서 저지른 만행을 사죄하는 데 인색했다.
1930~1940년 대에 일본군은 한국과 다른 아시아 국가의 여성과 여자아이들을 강제로 끌어가 성 노예로 이용했다.
1990년대 이후 일본은 소위 '위안부 여성'에게 공식 사죄와 배상을 하라는 세계 각국의 압력에 직면해 왔다.
1990년대에 희생자들에게 민간 기금이 전달되었고, 일본 지도자들은 일부 행위에 사죄를 표했다.
그러나 2007년에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일본군은 여성을 성 노예로 동원한 책임이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미국 의회는 일본 정부에 위안부 여성을 노예로 삼은 일본군의 책임을 공식 인정하고 사죄하라고 촉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또 다른 사죄 논란은 토착민에 대한 부당한 역사적 행위와 관련이 있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최근 몇 년 사이에 원주민에 대한 정부의 의무를 주제로 격론이 일었다.
1910년대부터 1970년대 초까지, 여러 인종의 피가 섞인 원주민 아이들이 강제로 부모와 떨어져 백인 가정이나 정착촌에 살아야 했다. 아이들을 백인 사회에 동화시키고 원주민 문화를 하루빨리 없애기 위한 정책이었다.
1997년에는 오스트레일리아의 한 인권단체가 '도둑맞은 원주민 세대'에 가해진 잔혹 행위를 기록하고, 국가 사죄의 날을 지정하라고 권고했다.
존 하워드 당시 총리는 공식 사죄에 반대했다.
사죄 문제는 오스트레일리아 정치의 논란거리다.
2008년에는 새로 선출된 케빈 러드 총리가 원주민에게 공식 사죄했다.
비록 원주민 개인을 상대로 한 배상은 언급되지 않았지만, 원주민들이 겪는 사회적·경제적 불이익을 극복할 조치를 취하겠다고 약속했다.
미국에서 공개 사죄와 배상에 관한 논쟁 역시 최근 10~20년 사이에 두드러졌다.
1988년에는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국 서해안의 포로수용소에 일본계 미국인을 감금한 일을 공식 사죄하는 법에 서명했다.
이 사죄에 더해,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던 생존자에게 각각 배상금 2억 달러를 지급하고, 일본계 미국인의 문화와 역사 발전을 위해 기금을 지원하는 법을 제정했다.
1993년에는 의회가 1세기 전 하와이 독립왕국을 전복한 잘못을 사죄했다.
미국에서 가장 크게 대두되는 사죄는 노예제 유산과 관련된다.
남북전쟁 후 정부는 해방된 노예에게 "땅 40에이커와 노새 한 마리"를 약속했지만, 이 약속은 결코 실현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90년대에 흑인에 대한 배상 운동이 다시 주목을 끌었다.
존 코니어스 의원은 1989년 이래 해마다, 미국 흑인에 대한 배상 문제를 연구하는 위원회를 만들자는 법안을 제출했다.
이 법안은 많은 흑인 조직과 민권 단체의 지지를 얻었지만, 일반 대중의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
설문조사 결과, 흑인은 다수가 찬성했으나 백인은 4퍼센트만이 찬성했다.
배상 운동은 제자리걸음인 반면에 공식 사죄만은 최근 몇 년 사이에 봇물처럼 쏟아졌다.
2007년에는 노예를 가장 많이 소유했던 버지니아 주가 가장 먼저 사죄했다.
이어 앨라배마, 메릴랜드, 노스캘롤라이나, 뉴저지, 폴로리다를 비롯한 여러 주가 사죄 대열에 동참했다.
그리고 2008년에는 미국 하원이 노예제와 20세기 중반까지 이어진 인종차별 정책인 '짐 크로'법, 그리고 당시의 잘못을 사죄한다는 결의를 통과시켰다.
국가의 역사적 잘못을 사죄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답하려면, 집단 책임과 공동체의 요구라는 다소 어려운 질문부터 생각해 보아야 한다.
공개 사죄를 정당화하는 주요 근거는 정치 공동체에 의해 부당함을 강요당한 사람들을 기억하고, 그 부당함이 희생자와 후손에게 미치는 지속적인 영향을 인식하여, 부당 행위를 저지른 사람이나 그것을 막지 못한 사람들의 잘못을 배상해야 한다는 것이다.
공개 행위로서 공식 사죄는 과거의 상처를 감싸고 도덕적·정치적 화해의 기초를 다진다. 사죄와 속죄를 표하는 수단은 손해배상이나 금전 지원도 비슷한 이유로 정당화될 수 있다.
더불어 희생자와 그 후손에게 미치는 부당 행위의 후유증을 줄이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이러한 이유들이 사죄를 정당화하기에 충분한지는 상황에 따라 다르다.
더러는 공개 사죄나 배상을 하려는 시도가 오래전의 증오를 불붙이거나, 역사적 적개심을 강화하고 피해의식을 공고히 하며 분노를 키우는 등 득보다 실을 더 많이 낳기도 한다.
공식 사죄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문제를 걱정한다.
모든 상황을 고려할 때, 사죄나 반환 행위가 정치 공동체에 치유제가 될지 해가 될지는 복잡한 정치 판단을 요구하는 문제이며 그 답은 상황에 따라 다를 것이다.
도덕적 개인주의
합의와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개념은 오늘날의 정치뿐만 아니라 근대의 정의론에서도 크게 부각된다.
선택과 합의에 관한 다양한 개념이 어떻게 오늘날의 사고를 형성했는지 한번 돌아보자.
선택하는 자아라는 생각은 존 로크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합법정부는 반드시 합의에 근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왜 그럴까?
우리는 자유롭고 독립적인 존재이지, 아버지의 권위나 왕의 신권에 종속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선천적으로 자유롭고 평등하고 독립적이며, 어느 누구도 이 상태를 벗어나 자신의 합의 없이 다른 정치권력에 예속될 수 없다".
한 세기가 지나 이마누엘 칸트는 선택하는 자아에 관해 더욱 호소력 있는 논리를 제시했다.
칸트는 공리주의와 경험주의 철학자들에 맞서, 우리는 스스로를 취향과 욕구의 덩어리 이상의 존재로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유롭다는 것은 자율적이라는 뜻이고, 자율적이라는 것은 내가 나에게 부여한 법칙에 지배된다는 뜻이다.
칸트식 자율은 합의보다 더 까다롭다.
내가 도덕법을 따른다고 할 때, 그것은 단지 우연히 생겨난 욕구나 충심에 따라 선택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보다는 특정한 이해관계와 애착에서 한 걸음 물러나 순수 실천 이성을 따르는 사람으로 행동한다는 뜻이다.
21세기에는 존 롤스가 칸트의 자율적 자아 개념을 받아들여 그것을 토대로 정의론을 주장했다.
칸트와 마찬가지로 롤스 역시 우리 선택에는 도덕적으로 임의의 요소들이 반영되는 경우가 많음을 발견했다.
예를 들어 노동력을 착취하는 공장에서 일하기로 했을 때, 그것은 어려운 경제 사정에서 나온 선택이지, 진정으로 자유로운 선택이 아니다.
따라서 자발적 합의에 기초한 사회를 원한다면, 실제 합의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우리의 특정한 이해관계와 이점을 접어두고 무지의 장막 뒤에서 선택한다면 어떤 정의의 원칙에 동의하겠는가를 물어야 한다.
정부는 도덕적으로 중립을 지켜야 하는가?
칸트와 롤스가 보기에, 좋은 삶에 대해 종교적으로든 세속적으로든 특정한 개념을 강조하는 정의론은 자유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 정의론은 타인의 가치를 강요함으로써, 인간을 자기 목표를 선택할 능력이 있는 자유롭고 독립적인 자아로 존중하지 않는다.
이처럼 선택이 자유로운 자아와 중립 상태는 밀접하게 연관된다.
여러 목적에 구애받지 않는 중립적인 권리의 틀이 필요한 이유는 우리가 자유롭고 독립적인 자아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중립은 도덕적·종교적 논란에서 어느 쪽도 편들지 않으며, 시민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선택할 자유를 부여한다.
정의론과 권리는 도덕적으로 중립을 지킬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분명 맞는 이야기다.
칸트와 롤스는 도덕적 상대주의자는 아니다.
자기 목적은 자기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그 자체로 대단한 도덕적 사고다.
하지만 어떻게 살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어떤 목적을 추구하든, 다른 사람에게도 동일한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그만이다.
중립적 틀의 매력은 어떻게 살아야 바람직하고, 무엇이 좋은 삶인지 단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칸트와 롤스는 자신들이 특정한 도덕적 이상을 지지한다는 점을 부인하지 않는다.
이들은 선을 이야기하면서 권리를 배제하는 이론에 대항한다. 공리주의도 그중 하나다.
공리주의는 쾌락 또는 행복 극대화를 선으로 간주하면서, 권리에 초점을 둔 어떤 제도가 그것을 성취하겠느냐고 묻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선에 관해 사뭇 다른 이론을 제시한다.
그가 말하는 선은 쾌락을 극대화하는 게 아니라 위 본성을 실현하고 인간 고유의 능력을 개발하는 것이다.
인간은 선을 미리 정해놓고 그것을 바탕으로 추론한다는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추론은 목적론적이다.
이는 칸트와 롤스가 거부하는 추론 법이다.
두 사람은 옳음이 선에 앞선다고 주장한다.
의무와 권리를 정하는 원칙은 좋은 삶에 대한 주관적 견해를 기초해서는 안 된다.
칸트는 "도덕의 최고 원칙을 둘러싼 철학자들의 혼동"을 이야기한다.
고대 철학자들은 "윤리적 고민을 최상의 선을 정의하는 데 온통 쏟아붓고는" 그 선을 "도덕법을 결정하는 근거"로 삼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러나 칸트에 따르면, 이는 앞뒤가 바뀐 일이다.
자유와도 어울리지 않는다.
우리가 자신을 자율적 존재로 여긴다면 도덕법부터 정할 일이다.
그런 뒤에야, 즉 의무와 권리를 규정할 원칙에 도달한 뒤에야, 비로소 그 원칙에 맞는 선이 무엇인지 물을 수 있다.
롤스는 정의의 원칙과 관련해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평등한 시민의 자유는 목적론적 원칙에 근거할 때 위태로워진다".
권리가 공리주의적 계산에 좌우되면 얼마나 취약해지는가는 쉽게 알 수 있다.
종교의 자유를 누릴 권리가 존중되는 이유가 오로지 전체의 행복을 늘리기 위해서라면, 어느 날 절대다수가 내 종교를 업신여기고 금지하려 든다면 어찌 되겠는가?
하지만 공리주의 정의론이 롤스와 칸트의 유일한 표적은 아니다.
옳음을 선에 앞세우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하는 정의 역시 문제가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정의를 추론하는 것은 문제가 되는 선의 텔로스, 즉 본질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공정한 정치 질서를 고민하려면, 좋은 삶의 본질부터 따져야 한다.
어떤 삶의 방식이 최선인가를 알아내기 전까지는 공정한 헌법의 틀을 잡을 수 없다.
그러나 롤스는 생각이 다르다.
"목적론적 원칙의 체계에는 심각한 오류가 존재한다.
그 원칙은 애초부터 옳음과 선을 잘못 연관시킨다.
우리는 독립적으로 규정된 선을 보고 그에 따라 삶의 틀을 형성하려 해서는 안 된다".
이 논쟁의 관건은 정의를 어떻게 추론해야 하는가라는 추상적 문제에 머물지 않는다.
옳음이 선에 앞선다는 문제를 둘러싼 논쟁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자유에 관한 논쟁이다.
칸트와 롤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을 거부하는 이유는 우리가 선을 스스로 선택할 여지를 남겨두지 않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이 어떻게 이런 우려를 낳는가는 쉽게 알 수 있다.
그는 정의를 사람과 목적 또는 선의 적합성 문제로 본다.
그러나 우리는 정의를 적성의 문제가 아닌 선택의 문제로 보는 성향이 있다.
옳음이 선에 앞서야 한다는 롤스의 주장은 "도덕적인 사람은 자신이 선택한 목적의 주체다"라는 신념을 반영한다.
우리는 도덕적 행위자로서, 우리의 목적이 아니라 우리의 선택 능력으로 규정된다. "
우리 본성을 일차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목적이 아니라" 목적에서 떨어져 나올 때 우리가 직접 선택할 권리의 틀이다."
자아는 목적에 앞서고, 목적은 오직 자아에 의해 확정되기 때문이다.
널리 인정받는 목적이라도 수많은 가능성 중에 선택되어야만 한다. (......)
따라서 우리는 목적론이 제안하는 옳음과 선의 관계를 뒤집어, 옳음을 앞세워야 한다".
정의와 공동선
1960년 9월 12일, 텍사스 휴스턴에서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존 F. 케네디가 정치에서 종교의 역할을 주제로 연설했다.
'종교 문제'는 선거운동 내내 그를 따라다녔다.
케네디는 가톨릭 신자였고, 그때까지 가톨릭 신자로 대통령에 당선된 사람은 없었다.
어떤 이는 말은 안 해도 속으로 편견을 품었고, 또 어떤 이는 케네디가 공직에 오르면 바티칸에 신세를 지거나 공적인 정책을 가톨릭 교리를 반영하리라는 우려의 목소리를 높였다.
케네디는 이런 우려를 잠재우기 위해, 자신의 종교가 공직 수행에 어떤 역할을 할지 개신교 목사들 앞에서 분명히 밝혔다.
그의 답은 한마디로 아무 역할도 하지 않으리라는 것이었다.
종교 신념은 사적인 문제이며, 공적 책임에 아무 영향도 미치지 않으리라는 대답이다.
케네디가 말했다.
"대통령이 되어도 종교적 견해는 사적인 문제로 머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통령이 되어 산아 제한, 이혼, 검열, 도박 등 어떤 문제가 닥쳐도 (......)
외부의 종교적 압력이나 지시에 구애받지 않고, 제 양심에 비추어 국익을 위해 결단을 내릴 것입니다".
그것은 정치적으로 성공한 연설로 인정받았고, 케네디는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대선 운동을 기록한 유명한 작가인 시어도어 화이트는 그 연설을 "민주 사회에서 근대 가톨릭의 개인적 교리"를 규정한 연설로 칭송했다.
그로부터 46년이 지난 2006년 6월 28일,
곧 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설 버락 오바마는 정치에서 종교의 역할에 관해 무척 다른 연설을 했다.
그는 우선 2년 전 상원위원에 출마할 때 자신이 종교적 문제를 어떻게 다루었는가를 상기시켰다.
다소 엄격한 신앙인이자 보수주의자였던 상대 후보는 동성애 권리와 낙태 권리를 옹호하는 오바마를 비난하면서,
오바마는 선량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며 예수그리스도라면 그에게 표를 던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자신의 그리스도교 신앙을 묘사하면서, 종교가 정치 논의와 무관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진보주의자들이 정치에서 "종교적 담론의 영역을 포기" 하는 것은 잘못이다.
"일부 진보주의자들은 종교의 낌새만 보여도 불편해하는데, 그 때문에 어떤 문제를 도덕적 차원에서 효과적으로 다루지 못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자유주의자들이 종교가 빠진 정치 담론을 제시한다면, "수많은 미국인은 개인의 도덕과 사회의 정의를 이해할 때 사용하는 시상과 용어들을 포기" 하는 꼴이다.
종교를 공적인 것이 아닌, 사적인 것으로 보는 케네디의 견해는 가톨릭에 반대하는 세력을 누그러뜨릴 필요성에서 나온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1960~70년대에 꽃피운 공공철학을 반영한다.
정부는 도덕적·종교적 문제에서 중립을 지켜, 무엇이 좋은 삶인지 개개인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원칙이다.
1971년, 존 롤스는 <정의론>에서, 케네디의 연설이 암시한, 중립에 관한 자유주의적 사고를 철학적으로 옹호했다.
1980년대에는 자유주의적 중립을 비판하는 공동체주의자들이 롤스 이론의 핵심인 자유로운 선택권을 지닌, 부담을 감수하지 않는 자아라는 견해에 문제를 제기했다.
이들은 공동체와 연대를 강조할 뿐 아니라, 공개 석상에서 도덕과 종교 문제를 더 적극적으로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진보주의자들은 더 큰 아량을 베풀고 신앙 친화적인 공적 추론을 끌어안아야 한다는 오바마의 주장은 건전한 정치적 직관을 드러낸다.
그것은 훌륭한 정치철학이기도 하다.
정의와 권리에 관한 논의를 좋은 삶에 대한 논의에서 분리하려는 시도는 두 가지 이유로 잘못이다.
본질적인 도덕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정의와 권리의 문제를 결정할 수 없고, 설령 그럴 수 있다 해도 바람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의와 좋은 삶
여기까지 오는 동안 우리는 정의를 이해하는 세 가지 방식을 탐색했다.
어떤 이는 정의란 공리나 행복 극대화, 즉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정의란 선택의 자유를 존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 선택은 자유시장에서 사람들이 실제로 행하는 선택일 수도 있고(자유지상주의의 견해), 원초적으로 평등한 위치에서 '행할 법한' 가상적 선택일 수도 있다(자유주의적 평등주의의 견해).
마지막으로 어떤 이는 정의란 미덕을 키우고 공동선을 고민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쯤에서 독자들도 눈치챘겠지만, 나는 세 번째 방식을 좋아한다.
왜 그런지 설명해 보겠다.
공리주의적 이해 방식은 두 가지 단점이 있다.
첫째는 정의와 권리를 원칙이 아닌 계산의 문제로 만든다는 점이고,
둘째는 인간 행위의 가치를 하나의 도량형으로 환산해 획일화하면서 그것들의 질적 차이를 무시한다는 점이다.
자유에 기초한 이론들은 첫 번째 문제를 해결하지만 두 번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자유 이론은 권리를 진지하게 다루고, 정의는 단순한 계산 이상이라고 주장한다.
자유에 기초한 이론들 사이에서도 '어떤' 권리가 공리주의에서 생각하는 것보다 중시되어야 하는가를 놓고 의견이 분분하지만, 근본 권리를 존중받을 권리를 가려내기 전에, 사람들의 기호를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
그러면서 우리가 공적 삶에서 드러내는 취향과 욕구에 의문을 품으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이 이론에 따르면, 우리가 추구하는 목적의 도덕적 가치, 우리 삶의 의미와 중요성,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삶의 특성과 질은 하나같이 정의의 영역을 벗어난다.
이 부분이 내게는 오류로 보인다.
정의로운 사회는 단순히 공리를 극대화하거나 선택의 자유를 확보하는 것만으로는 만들 수 없다.
공정한 사회를 달성하기 위해서 우리는 좋은 삶의 의미를 함께 고민하고, 으레 생기게 마련인 이견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문화를 가꾸어야 한다.
하나의 원칙이나 절차가 있어서, 그에 따라 소득·권력·기회를 정당하게 분배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 원칙을 찾을 수만 있다면, 좋은 삶을 토론하는 과정에서 생기게 마련인 논란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논란을 피하기란 불가능하다.
정의에는 어쩔 수 없이 판단이 끼어든다.
구제금융이나 상이군인 훈장, 대리 출산이나 동성혼, 소수집단우대정책이나 군 복무, 최고경영자의 임금이나 골프 카트 이용권을 두고 어떤 논란을 벌이든, 정의는 영광과 미덕, 자부심과 인정을 둘러싸고 대립하는 여러 개념과 밀접히 연관된다.
정의는 올바른 분배만의 문제는 아니다. 올바른 가치 측정의 문제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