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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죽음의 수용소에서

     

     

     

    로고테라피

    "그런데 왜 자살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물으면 어떤 사람은 아이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재능이 아까워서라고 한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은 그저 간직하고 싶은 추억에 대한 미련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대답한다.

     

    이런 환자의 대답 속에서 프랭클 박사는 정신과 치료에 중요하게 적용될 수 있는 어떤 지침들을 발견하곤 한다.

    조각난 삶의 가느다란 실오라기를 엮어 하나의 확고한 형태를 갖춘 의미와 책임을 만들어 내는 것.

    이것이 바로 프랭클 박사가 독창적으로 고안해 낸 '실존적 분석', 즉 로고테라피의 목표이자 과세이다. ​

     

    로고스는 '의미'를 뜻하는 그리스어이다.

    로고테라피 혹은 다른 학자들이 '빈 제3정신 의학파'로 부르는 이 이론은 인간 존재의 의미는 물론,

    그 의미를 찾아 나가는 인간 의지에 초점을 맞춘 이론이다.

     

    로고테라피 이론에서는 인간이 자신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찾고자 하는 노력을 인간의 원초적 동력으로 본다. ​

    프로이트는 고통을 주는 혼란의 원인을 서로 모순되는 무의식적 동기에서 비롯된 불안에서 찾았다.

     

    반면에 프랭클은 신경 질환을 여러 형태로 분류한 다음, 그중에서 누제닌 노이로제와 같은 몇 가지는

    환자가 자기 존재에 대한 의미와 책임을 발견하지 못한 데 원인이 있다고 생각했다.

     

    프로이트가 성적인 욕구 불만에 초점을 맞추었던 반면,

    프랭클은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의 좌절에 초점을 맞추었다. ​ ​

     

     

    인간은 어떤 환경에도 적응할 수 있다. ​

    한번은 쌀쌀한 늦가을에 샤워를 하고 아직 물이 마르지 않은 상태에서 밖에 서 있었다.

    우리는 그다음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몹시 궁금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며칠 후 궁금증은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우리 모두 감기에 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

     

    교과서에는 사람이 일정 시간 이상 잠을 자지 않으면 죽는다고 적혀 있다.

    하지만 완전히 틀린 말이었다.

     

    수용소에서 우리는 이를 닦을 수 없었다.

    그리고 모두 심각한 비타민 결핍증에 시달리고 있다.

    하지만 잇몸은 그 어느 때보다도 건강했다.

     

    흙일을 하다가 어쩌다 찰과상을 입어도-동상에 걸린 경우만 제외하면-상처가 곪는 법이 없었다. ​

    만약 어떤 사람이 인간을 어떤 환경에도 적응할 수 있는 존재로 묘사한 도스토옙스키의 말이 사실이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물론입니다. 인간은 어떤 환경에도 적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방법에 대해서는 묻지 말아 주십시오." ​ ​

     

     

    인간에 대한 구원은 사랑을 통해서, 사랑 안에서 실현된다.

    높이 세운 옷깃으로 입을 감싸고 있던 옆의 남자가 갑자기 이렇게 속삭였다.

    "만약 마누라들이 우리가 지금 이러고 있는 꼴을 본다면 어떨까요?

    제발이지 마누라들이 수용소에 잘 있으면서 지금 우리가 당하고 있는 일을 몰랐으면 좋겠소" ​

     

    그때 한 가지 생각이 내 머리를 관통했다.

    생애 처음으로 나는 그렇게 많은 시인들이 시를 통해 노래하고,

    그렇게 많은 사상가들이 최고의 지혜라고 외쳤던 하나의 진리를 깨달았다.

     

    그 진리란 바로 사랑이이야말로 인간이 추구해야 할 궁극적이고 가장 숭고한 목표라는 것이었다. ​

    그때 나는 이 세상에 남길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며

    (그것이 비록 아주 짧은 순간이라고 해도) 여전히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 ​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도 있다니

    나는 상상 속에서 버스를 탔고,

    열쇠로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문을 열었다.

    걸려 오는 전화를 받고 전등을 껐다.

     

    우리 생각은 대개 이런 자질구레한 일들에 집중돼 있었고,

    이런 기억들이 때로 우리 마음을 감동시켜 눈물을 흘리게 했다. ​

     

    어느 날 저녁이었다.

    죽도록 피곤한 몸으로 막사 바닥에 앉아 수프 그릇을 들고 있는 우리에게 동료 한 사람이 달려왔다.

    그러더니 점호장으로 가서 해가 지는 멋진 풍경을 보라는 것이었다.

     

    밖에 나가서 우리는 서쪽에 빛나고 있는,

    짙은 청색에서 핏빛으로 끊임없이 색과 모양이 변하는 구름으로 살아 숨 쉬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진흙 바닥에 패인 웅덩이에 비친 하늘의 빛나는 풍경이

    잿빛으로 지어진 우리의 초라한 임시 막사와 날카로운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

     

    그날도 우리는 참호 속에서 일하고 있었다.

    잿빛 새벽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었다.

     

    우리 위에 있는 하늘도 잿빛이었고, 창백한 새벽빛에 반사되는 눈도 잿빛이었다.

    동료가 걸치고 있는 넝마 같은 옷도 잿빛이었고, 얼굴도 잿빛이었다.

     

    나는 또다시 아내와 침묵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어쩌면 당시 나는 내 고통에 대한 그리고 내가 서서히 죽어 가야 하는 상황에 대한

    정당한 '이유'를 찾으려고 애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곧 닥쳐 올 절망적인 죽음에 대해 마지막으로 격렬하게 항의하고 있는 동안,

    나는 내 영혼이 사방에 뒤덮은 음울한 빛을 뚫고 나오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것이 절망적이고 의미 없는 세계를 뛰어넘는 것을 느꼈다.

    '삶에 궁극적인 목적이 있는가'라는 나의 질문에 어디선가 '그렇다'라는 활기찬 대답을 들었다. ​ ​

     

     

    인간의 정신적 자유

    강제 수용소에 있었던 우리들은 막사를 지나가면서

    다른 사람을 위로하고 마지막 남은 빵을 나누어 주었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

     

    물론 그런 사람이 아주 극소수였는지도 모든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다음과 같은 진리가 옳다는 것을 입증하기에 충분하다.

     

    그 진리란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 갈 수 있어도 단 한 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 갈 수 없다는 것이다. ​

     

     

    시련의 의미

    적극적인 삶은 인간에게 창조적인 일을 통해 가치를 실현할 기회를 주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반면 즐거움을 추구하는 소극적인 삶은 인간에게 아름다움과 예술,

    혹은 자연을 체험함으로써 충족감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그러나 창조와 즐거움 두 가지가 거의 메말라 있는 삶에도,

    외부적인 힘에 의해 오로지 존재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수 있는 지고의 도덕성을 요구하는 삶에도 목적은 있다.

     

    물론 그에게는 창조적인 삶과 향락적인 삶이 모두 금지되어 있다.

    그러나 창조와 즐거움만이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곳에 삶의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시련이 주는 의미일 것이다.

     

    시련은 운명과 죽음처럼 우리 삶의 빼놓을 수 없는 한 부분이다.

    시련과 죽음 없이 인간의 삶은 완성될 수 없다. ​

     

    병든 사람의 경우,

    특히 치료가 불가능한 환자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언젠가 병에 걸린 한 젊은이로부터 편지를 받은 적이 있다.

    편지에서 젊은이는 친구에게 방금 자기가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고 했다.

    수술도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러면서 젊은이는 언젠가 자기가 본 영화 이야기를 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이 아주 용감하고 품위 있게 죽음을 기다리는 과정을 생생하게 그린 영화였는데,

    그 영화를 보면서 죽음을 그렇게 의연하게 맞는 것이 인간으로서 참 위대한 성취였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썼다. 이제 운명이 자기에게 그와 똑같은 기회를 주었다고. ​

     

    젊은 여자는 자기가 며칠 안에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내가 그녀에게 말을 걸었을 때 그녀는 아주 명랑했다.

    "나는 운명이 나에게 이렇게 엄청난 타격을 가한 것에 대해 감사하고 있어요."

     

    그녀가 나에게 말했다.

    "그전에 나는 제멋대로였고, 정신적인 성취 같은 것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거든요."

     

    그녀는 창밖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여기 있는 나무가 내 외로움을 달래 주는 유일한 친구랍니다."

     

    창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밤나무 가지 한 개와 그 위에 피어 있는 꽃 두 송이였다.

    "저는 저 나무와 나주 이야기를 나누죠" 그녀가 나에게 말했다.

     

    나는 한순간 어리둥절했다.

    그녀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헛소리를 하는 것일까?

    환각에 빠졌나?

     

    나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에게 나무가 대답을 하는지 물었다.

    "물론인지요."

    나무가 그녀에게 뭐라고 대답했을까?

     

    그녀는 말했다.

    "나무가 이렇게 대답해요. 내가 여기 있단다. 내가 여기 있단다. 나는 생명이야. 영원한 생명이야." ​

     

    한번은 나이 지긋한 개업의 한 사람이 우울증 때문에 상담을 받으러 왔다.

    그는 2년 전에 세상을 떠난 아내에 대한 상실감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아내를 이 세상 누구보다 사랑했다.

    내가 그를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그에게 어떤 말을 해 주어야 할까?

     

    나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한 것을 제외하고는 말을 될 수 있는 대로 자제했다.

    "만약 선생님이 먼저 죽고 아내가 살아남았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그가 말했다. "오 세상에! 아내에게는 아주 끔찍한 일이었을 겁니다. 그걸 어떻게 견디겠어요?"

     

    내가 말했다. "그것 보세요. 선생님, 부인께서는 그런 고통을 면하신 겁니다.

    부인이 그런 고통을 겪지 않게 한 게 바로 선생님입니다.

    그 대가로 지금 선생께서 살아남아 부인을 애도하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는 조용히 일어서서 내게 악수를 청한 후 진료실을 나갔다. ​ ​

     

     

    미래에 대한 기대가 삶의 의지를 불러일으킨다

    내가 실제로 경험했던 일이 생각난다.

    그날 나는 눈물도 흘릴 정도의 극심한 통증(찢어진 신발 때문에 발에 심한 종기가 생겼다)을 겼으며

    긴 행렬에 끼어서 수용소에서 작업장까지 몇 킬로미터를 절뚝거리며 걸어가고 있었다. ​

     

    나는 생각을 다른 주제로 돌리기로 했다.

    갑자기 나는 불이 환히 켜진 따뜻하고 쾌적한 강의실의 강단에 서 있었다.

    앞에서 청중들이 푹신한 의자에 앉아 내 강의를 경청하고 있었다.

    나는 강제 수용소에서의 심리 상태에 대한 강의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 나를 짓누르던 모든 것들이 객관적으로 변하고,

    일정한 거리를 둔 과학적인 관점에서 그것을 보고 설명할 수 있게 됐다.

     

    이런 방법을 통해 나는 어느 정도 내가 처한 상황과 순간의 고통을 이기는 데 성공했고,

    그것을 마치 과거에 이미 일어난 일처럼 관찰할 수 있었다.

    나 자신과 문제는 내가 주도하는 흥미진진한 정신과학의 연구 대상이 됐다.

     

    스피노자가 그의 '윤리학'에서 무엇이라고 했던가? ​

    감정. 고통스러운 감정은 우리가 그것을 명확하고 확실하게 묘사하는 바로 순간에 고통이기를 멈춘다. ​ ​

     

     

    미래에 대한 믿음의 상실은 죽음을 부른다

    인간의 정신 상태-용기와 희망 혹은 그것의 상실-와 육체의 면역력이 얼마나 밀접한 연관이 있는지 아는 사람은

    희망과 용기의 갑작스런 상실이 얼마나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는지 이해할 것이다. ​

     

    1944년 성탄절부터 1945년 새해에 이르기까지 일주일간 사망률이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추세로 급격히 증가했다.

    주치의는 이 기간에 사망률이 증가한 것은

    보다 가혹해진 노동 조건, 식량 사정 악화, 기후 변화, 새로운 전염병 때문이 아니라고 했다.

     

    그것은 대부분의 수감자들이 성탄절에는 집에 갈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시간이 다가오는데도 희망적인 소식이 들리지 않자 용기를 잃었으며 절망감이 그들을 덮쳤다. ​

     

     

    왜 살아아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삶에 무엇을 기대하는가가 아니라 삶이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하는가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삶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을 중단하고,

    대신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해 매일 매시간마다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다. ​

     

    릴케가 <우리가 완수해야 할 시련이 그 얼마인고!>라는 시를 쓴 것도

    아마 시련 속에 이런 기회가 숨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릴케는 마치 '작업을 완수한다'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이 '시련을 완수한다'라고 했다.

    우리에게는 완수해야 할 시련이 너무나 많았다. ​ ​

     

     

    집단정신 치료의 경험

    며칠 전에 반쯤 굶어 죽게 된 한 수감자가 감자 창고를 부수고 들어가 감자 몇 파운드를 훔친 일이 있었다.

    절도가 있었다는 사실이 곧 밝혀졌고, 수감자 중 몇 명은 '도둑'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수용소 당국자들이 이 사실을 알고 죄를 지은 사람이 누군지 말하지 않으면

    수용소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하루 동안 굶기겠다고 했다.

    2,500명의 사람들은 물론 굶는 쪽을 선택했다. ​

     

    온종일 꼬박 굶어야 했던 그날 저녁,

    우리는 막사에 누워 있었다.

    분위기가 착 가라앉은 상태였다.

     

    몇 마디 말이 오갔을 뿐이고 한마디 말조차도 신경에 거슬렸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불이 나가버렸다.

    기분이 완전히 바닥까지 떨어졌다.

     

    하지만 우리 고참 관리인은 현명한 사람이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즉흥적으로 그 순간 모든 사람들이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있던 이야기를 입 밖으로 냈다.

     

    그는 지난 며칠 동안 병이나 자살로 죽어 간 수많은 동료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동시에 그는 죽음의 진짜 원인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그것은 바로 희망을 버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앞으로 생길지도 모를 희생자들이 이런 최악의 상태에 이르지 않도록 어떤 방법이 강구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런 조언을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나라고 했다. ​

     

    신은 알고 있을 것이다.

    당시 나는 정신 의학에 대해 설명하거나 설교하고 싶은 기분이 전혀 아니었다는 것을.

    동료들을 상대로 정신과적 치료를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춥고, 배고프고, 짜증 나고, 피곤했다.

    하지만 노력해야 했다.

    좀처럼 생기지 않는 이런 기회를 활용해야만 했다.

     

    그 어느 때보다 용기를 북돋아 주는 것이 절실한 때였기 때문이다. ​

    나는 단순한 위로의 말부터 시작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고 여섯 번째 겨울을 맞았지만

    지금 유럽 정세를 살펴보면 우리 처지는 그렇게 최악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시련을 겪어 오면서 다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것을 잃은 적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라고 했다. ​

     

    그리고 나는 미래에 대해 얘기했다.

    공정하게 얘기해서 미래가 가망 없어 보일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수용소에서의 경험을 통해 우리는 적어도 각 개인에게 얼마나 엄청난 기회가,

    그것도 아주 갑자기 찾아오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예를 들자면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의외로 작업 환경이 좋은 특별 작업반에 배치된다거나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일들이 당시 수감자들에게 바로 '행운'이라고 불릴 수 있는 일이었다. ​

     

    나는 그때 바로 그곳, 그 막사에서,

    실제로 가망이 없는 그런 상황에 놓여 있는 우리 삶이 갖고 있는 충만한 의미를 찾아보려고 이 말을 했다.

     

    내 말은 효과가 있었다.

    불이 다시 들어와 주위가 밝아지자 누추한 몰골을 한 동료들이

    두 눈에 눈물을 가득 머금고 나에게 다가와서 감사하다고 했다. ​ ​

     

     

    초의미 ​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실존 철학자들이 가르친 대로 삶의 무의미함을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지닌 절대적인 의미를 합리적으로 터득하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초의미 개념을 잘 알지 못하는 정신 의학자는 머지않아 환자들로부터 당혹스러운 질문을 받게 될 것이다.

     

    내가 여섯 살짜리 딸에게 받았던 질문처럼,

    "아빠, 왜 우리는 '선하신'하나님이라고 하지요?"

     

    딸아이의 질문에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얘야, 몇 주일 전에 네가 홍역에 걸려 고생하고 있었지. 그런데 그때 '선하신'하나님께서 너를 낫게 해 주셨잖니?"

     

    꼬마는 수긍할 수 없었던 모양인지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하지만 아빠, 이걸 잊지 마세요. 처음에 홍역에 걸리게 한 것은 바로 하나님이에요." ​ ​

     

     

    집단적 신경증

    인간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가르침,

    즉 인간은 생물적, 심리적, 사회적 조건의 결과물이거나 유전과 환경의 산물에 불과하다는 이론은

    태생적으로 위험을 안고 있다.

     

    인간을 어떻게 바라보는 시각은 환자로 하여금 자기가 믿고자 하는 것,

    즉 자기가 외적인 영향과 내적인 환경의 담보물이나 희생물이라는 사실을 믿게 된다.

     

    이런 신경증적 숙명론은 인간이 자유로운 존재라는 것을 부정하는 심리 치료법에 의해 조성되고 강화된다. ​

    인간이 유한한 존재이고, 인간의 자유 또한 제한되어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자유란 조건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조건에 대해 자기 입장을 취할 수 있는 자유를 말하는 것이다. ​ ​

     

     

    범 결정론에 대한 비판

    정신 분석은 모든 문제를 성욕의 차원에서만 해석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나는 이 비판이 타당한 것인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볼 때, 정신 분석에는 이보다 훨씬 잘못되고 위험천만한 가정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범 결정론이다.

     

    범 결정론은 어떤 조건이든지 그 조건에 대해 자기 태도를 취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염두에 두지 않는

    인간관을 의미한다. ​

     

    인간 존재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는 인간에게는 그런 조건을 극복하고 초월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가능하다면 세계를 더 나은 쪽으로 변화시킬 수 있고, 필요하다면 자기 자신을 더 좋게 변화시킬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