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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화폐전쟁1 달러의종말

     

     

     

    로스차일드가의 등장

    메이어 암셀 바우어는 1744년 2월 23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유대인 지역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암셀 모세 바우어는 유럽 일대를 떠도는 골동품상이자 대금업자였다.

    메이어가 태어나자 모세는 프랑크푸르트에 정착하기로 결심한다.

     

    어릴 때부터 총명한 메이어를 위해 그의 아버지는 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다.

    돈과 대출에 관한 상업적 지식도 체계적으로 가르쳤다.

    몇 년 후 아버지가 죽자 메이어는 겨우 열세 살의 나이로 친척들의 격려를 받으며 하노버에 가서 오펜하이머 가문의 은행 수습생으로 일했다.

     

    메이어는 뛰어난 감각과 부지런함으로 은행의 온갖 전문 기능을 빠르게 습득했다.

    7년이라는 세월 동안 그는 마치 해면이 물을 빨아들이듯 영국에서 전해진 각종 금융업의 기상천외한 부분까지 모두 소화했다.

    탁월한 업무 능력을 인정받은 메이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식 직원이 되었다.

     

    은행에서 일하는 동안 그는 배경이 탄탄한 고객들과 친분 관계를 쌓았다.

    그중에는 훗날 그의 운명을 바꿔줄 에스토르프 장군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메이어는 정부와 국왕을 상대로 대출해 주는 것이 개인을 상대로 한 대출보다 훨씬 수익도 크고 안전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출 금액이 많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정부의 세금 수입을 담보로 잡을 수 있다는 점이 큰 매력이었다.

    영국에서 들어온 낯선 금융 이념은 메이어에게 완전히 새로운 충격이었다.

     

    몇 년 후, 젊은 메이어는 프랑크푸르트로 돌아가 아버지의 대부업을 계승한다.

    그는 자신의 성씨를 로스차일드로 바꾸었다.

     

     

    워털루 전투와 로스차일드가

    1815년 6월 18일, 벨기에 브뤼셀 근교에서 전개된 워털루 전투는 웰링턴 장군이 이끄는 영국군과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 국가의 운명을 걸고 벌이는 한판 승부였다.

     

    런던 증권거래소는 팽팽한 긴장감이 돌았다.

    모두가 초초하게 워털루 전투의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영국이 패할 경우 영국의 국채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승리한다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을 터였다.

    저녁이 되어 나폴레옹의 패색이 짙어지자, 로스차일드 측의 정보 전달원은 즉시 브뤼셀로 말을 달려 오스탕드항에서 배로 갈아탔다.

     

    정보 전달원이 6월 19일 새벽 영국 포크스턴의 해변에 도착했을 때, 네이선 로스차일드는 직접 부두까지 나와 맞아주었다.

    네이선은 급히 편지 봉투를 뜯고 제목만 대충 훑어보고 나서 즉시 런던의 주식거래소로 달려갔다.

     

    네이선이 주변에 있던 로스차일드 가문의 거래원들에게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그러자 거래원들은 묵묵히 거래창구로 가서 조용히 영국의 국채를 팔아 치우기 시작했다.

    이때 누군가 외쳤다.

    "로스차일드가 알아냈다! 웰링턴이 전쟁에서 패했다!"

     

    몇 시간에 걸친 투매 광풍이 휩쓸고 지나간 후 영국 국채는 액면가의 5%도 안 되는 휴지 조각으로 변해 있었다.

    네이선은 이 모든 과정을 시종일관 태연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이윽고 그의 눈빛이 한 번 번뜩였다.

    아까와는 완전히 다른 신호였다.

    거래원들이 이번에는 영국 국채를 닥치는 대로 사들이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6월 21일 밤 11시, 웰링턴 장군의 특사 헨리 퍼시가 런던에 당도했다.

    그리고 나폴레옹 대군이 여덟시간의 고전 끝에 무려 3분의 1의 병력을 잃고 무참히 패배했다는 소식을 알렸다.

     

    프랑스는 이제 끝장난 것이다!

    이 소식이 런던에 도착한 시간은 네이선의 정보보다 무려 하루나 늦은 후였다.

     

    그 하루 동안 네이선은 20배나 되는 차익을 챙겼다.

    나폴레옹과 웰링턴이 전쟁으로 얻은 재산을 합친 금액보다 훨씬 많았다.

     

     

    화폐발행권과 미국의 독립전쟁

    출처 입력 벤저민 프랭클린이 1763년 영국을 방문했을 때, 잉글랜드은행의 책임자는 그에게 신대륙 식민지가 어떻게 그토록 발달할 수 있었는지 물었다.

    그는 그 원인을 이렇게 대답했다.

     

    "그거야 간단하죠. 식민지에서 우리는 '식민권'이라는 화폐를 스스로 발행했습니다.

    상업과 공업의 필요에 따라 동등한 비율의 화폐를 발행하죠.

    그러면 상품이 생산자에게 소비자의 손까지 쉽게 이동됩니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 자신의 지폐를 만들고 구매력까지 보장하니까,

    우리 정부는 누구에게도 이자를 지급할 필요가 없어졌답니다."

     

    새로운 지폐의 출연으로 미 식민지는 필연적으로 잉글랜드 은행의 통제에서 벗어나게 되어 있었다.

    이에 화가 난 영국의 은행가들은 즉시 행동에 나섰다.

     

    영국 의회는 1764년 '통화조례'를 통과시켜 미 식민지 각지에서 자신들의 지폐를 발행하는 행위를 엄격히 금지했다.

    뿐만 아니라 영국 정부에 납부하는 세금을 반드시 황금과 백은으로 지불할 것을 강요했다.

     

    미국의 개국 옹호론자들 사이에서는 잉글랜드은행이 영국 정치를 통제하고 국민을 부당하게 대한다는 인식이 상당히 높았다.

     

    33세라는 젊은 나이에 유명한 미국 '독립선언문'을 작성한 미국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은 다음과 같이 길이 남을 명언을 남겼다.

     

    "만약 미국인이 끝까지 민간은행으로 하여금 국가의 화폐 발행을 통제하도록 둔다면,

    이들 은행은 먼저 통화 팽창을 이용하고 이어서 통화긴축 정책으로 국민의 재산을 박탈할 것이다.

    이런 행위는 어느 날 아침 그들의 손자들이 자기의 터전과 선조가 개척한 땅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국제 금융재벌의 첫 번째 전쟁: 미국 최초의 중앙은행

    워싱턴 대통령은 1791년 2월 25일 마침내 미국의 첫 번째 중앙은행을 설립하는 데 서명했다.

    유효 기간은 20년이었다.

    잉글랜드은행과 네이선 로스차일드는 미국 중앙은행의 주요 주주가 되었다.

     

    중앙은행이 설립된 1791년부터 1796년까지 불과 5년 동안 미국 정부의 채무는 무려 820만 달러로 증가했다.

    제퍼슨은 1798년 격노해서 말했다.

    "헌법을 수정해서라도 연방정부가 돈을 빌릴 수 있는 권리를 빼앗고 싶다."

     

    제퍼슨은 미국의 3대 대통령에 취임한 후 재선되어 연임하는 동안 중앙은행을 폐지하기 위해 백방으로 애를 썼고,

    중앙은행은 1811년 3월 3일자로 문을 닫았다.

     

    런던에서 조용히 사태를 관망하던 네이선 로스차일드는 그 소식에 격노했다.

    그는 이렇게 위협적인 말을 했다.

    "은행의 발행권을 연장하지 않으면 미국은 심각한 전쟁을 치러야 할 것이다."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영국과 미국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다.

    이 전쟁은 1812년부터 3년이나 지속되었다.

     

    로스차일드의 목적은 확실했다.

    미국 정부를 빚더미에 앉혀 결국 무릎 꿇고 투항하게 함으로써 자신들이 장악한 중앙은행을 계속 운영하는 것이었다.

     

    과연 미국 정부의 채무는 4,500만 달러에서 1억 2,700만 달러로 증가했으며,

    마침내 미국 정부는 1815년 굴복하고 말았다.

     

    미국의 4대 대통령 제임스 매디슨은 1815년 12월 5일 두 번째 중앙은행 설립을 승인했고,

    1816년 두 번째 은행이 탄생했다.

     

     

    국제은행가들의 권토중래: 미국의 두 번째 중앙은행

    미국의 두 번째 은행은 20년이라는 영업기간을 확보했다.

    첫 번째 은행과 마찬가지로 로스차일드가가 이 은행의 권력을 움켜쥐었다.

     

    1828년 대통령 선거에 나선 앤드루 잭슨은 은행가들을 만나 힘주어 말했다.

    "여러분은 독사와 같소.

    나는 신의 이름으로 여러분을 뿌리 뽑을 것이오.

    국민이 우리의 화폐와 은행 시스템이 얼마나 불공정한지 안다면 내일 아침 당장 혁명이 일어날 것이오."

     

    대통령에 당선된 앤드루 잭슨은 두번째 은행을 폐지하기로 결심하고 이렇게 말했다.

    "헌법이 의회에 화폐 발행 권한을 준 것은 의회가 직접 그 권한을 행사하라는 뜻이지,

    어떠한 개인이나 기업에 그 권한을 위임하라는 뜻이 아니다."

     

    잭슨 대통령은 1만 1,000명의 연방정부 직원 가운데 은행과 관련된 일을 하는 2,000여 명을 해고했다.

    그는 재무장관에게 모든 정부의 저축을 두 번째 은행의 계좌에서 인출해 각 주의 은행으로 송금하라고 지시했다.

     

    1835년 1월 8일, 잭슨 대통령은 마지막 국채를 상환했다.

    이로써 미국 정부는 역사상 유일하게 국채를 완전히 제로로 만들었다.

    게다가 3,500만 달러의 잉여금이 남았다.

     

    역사학자들은 이 위대한 역사를 이렇게 평가한다.

    "대통령의 가장 찬란한 영예이며, 그가 이 나라를 위해 한 가장 중요한 공헌이다."

    <보스턴 포스트>는 이날의 성과를 예수가 고리대금업자를 성전에서 쫓아낸 일과 같은 비중으로 취급하기도 했다.

     

     

    링컨의 새로운 화폐

    남북전쟁 기간 전체를 통틀어 링컨 정부는 4억 5,000만 달러의 새지폐를 발행했다.

    신종 화폐 제도가 이토록 잘 운영될 수 있었던 것은 링컨 대통령이 국채 없는 화폐 발행의 장기화와 법제화를 진지하게 고려했기 때문이다.

     

    이 점은 국제 금융 거두들의 근본적 이익을 심하게 침해하는 것이었다.

    흑인 노예를 해방하고 남부를 통일한 링컨은 남부 정부가 전쟁 중에 진 빚을 모두 무효로 한다고 선포했다.

    전쟁 동안 남부에 줄곧 거액의 금융 지원을 해온 국제은행은 참담한 손실을 보았다.

     

    독일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는 단도직입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링컨은 의회에서 권한을 부여받고 국민에게 국채를 팔아 자금을 조달했다.

    이렇게 해서 정부와 국가는 외국 금융재벌의 올가미에서 빠져나왔다.

    국제 금융재벌들이 자신들의 손아귀에서 미국이 빠져나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 링컨의 죽음도 멀지 않았던 것이다."

     

    링컨이 암살당한 후 국제 금융 세력의 조종을 받은 의회는 링컨의 새 화폐 정책을 폐지한다고 선언하고,

    새 화폐 발행 상한액을 4억 달러 미만으로 동결했다.

     

    미국의 남북 전쟁은 본질적으로 국제 금융 세력이 미국 정부와 미국 국가화폐 발행권 및 화폐 정책의 이익을 놓고 벌인 치열한 싸움이었다.

     

    남북전쟁을 전후한 100년 동안 쌍방은 민영 중앙은행 시스템이라는 금융의 고지를 선점하기 위해 투쟁을 반복했다.

    이 과정에서 일곱 명의 미국 대통령이 살해되었으며, 다수의 의원이 사망했다.

     

    1913년 설립된 미국 연방저축은행은 이 투쟁이 결국 국제은행의 결정적 승리로 끝났음을 상징한다.

    이를 두고 비스마르크는 이렇게 말했다.

     

    "링컨의 죽음은 기독교 세계의 중대한 손실이다.

    미국은 그처럼 위대한 족적을 남길 인물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은행가들은 부유한 사람들을 다시 장악할 것이다.

    나는 외국 은행가들이 그들의 기묘하고도 잔혹한 수단으로 앗아간 미국의 풍요로움을 이용해 현대 문명을 체계적으로 망가뜨릴까봐 두렵다."

     

     

    '양털 깎기'와 1921년 미국 농업의 불경기

    양털 깎기는 은행가들 사이에 통하는 전문 용어로, 경제가 번영과 쇠퇴를 거듭하는 과정에서 기회를 창출해 정상 가격의 몇 분의 1 밖에 안 되는 가격으로 타인의 재산을 가로채는 행위를 말한다.

     

    미국의 화폐 발행권을 통제하게 된 은행가들은 경제의 번영과 쇠퇴를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게 되었다.

    이때의 양털 깎기 행위는 은행가에게 마치 사냥으로 생활하는 유목의 단계에서 과학적으로 사육하는 고도의 안정적 생산 단계로 진화한 것과 같다.

     

    그들은 먼저 '유인 작전'으로 '연방농업대출위원회'라는 기구를 설립해서 농민들의 피땀 어린 돈을 새로운 토지 구매에 사용하도록 '격려'했다.

     

    농민들은 장기 대출을 해주는 이 조직에서 돈을 얻고자 안달이었다.

    많은 농민이 이 조직의 도움을 받아 국제 금융재벌에게 장기대출을 신청했으며, 고액의 선납금을 지불했다.

     

    1891년 미국 은행가협회,1913년 4월 29일 의회 기록에서

    "1894년 9월 1일, 우리는 모든 대출의 연장을 중단할 것이다.

    그날 우리는 돈을 회수할 것이다.

    우리는 아직 상환하지 않은 재산을 소유하고 경매에 부칠 것이다.

    우리 스스로 정한 가격으로 미시시피강 서쪽 3분의 2에 달하는 농토와 동쪽의 거대한 토지를 얻을 것이다.

    농민들은 토지를 잃고 고용인이 될 것이다. 영국처럼 말이다."

     

    상원의 은행 및 통화위원회 오언 위원장은 1939년 상원에서 열린 백은 공청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1920년 초에 농민들은 매우 부유했다.

    그들은 장기 대출금 상환에 박차를 가했으며, 대출을 얻은 새 땅을 사들였다.

    그러나 1920년 하반기에 갑자기 들이닥친 신용대출과 통화의 긴축으로 그들의 대규모 파산 사태를 맞았다.

    1920년에 발생한 농민 파산은 정상적인 상태에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금본위제의 폐지: 은행가들이 루스벨트에게 역사적 사명을 부여하다.

    1812년, 미국 최초의 중앙은행이 폐지된 사건은 로스차일드의 보복을 불러왔다.

    그 결과 1812년 영미전쟁이 일어났으며, 미국 정부의 굴복으로 전쟁이 끝나면서 미국의 두 번째 은행이 탄생했다.

     

    1837년, 잭슨 대통령이 미국의 두 번째 중앙은행을 폐지하자 은행가들은 즉시 런던에서 미국 채권을 투매하고 각종 대출을 회수했다.

    그 결과 미국 경제는 심각한 불경기에 빠져들었으며, 이러한 상황은 1848년까지 지속되었다.

     

    1857년, 1870년, 1907년, 국제 금융재벌들은 미국 정부로 하여금 민영 중앙은행을 부활하도록 압박을 가하기 위해 다시 경제 불황을 만들어냈다.

    결국 민영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은행의 탄생으로 미국의 화폐 발행을 전면적으로 장악했다.

     

    1929년 대공황의 궁극적 목적은 금본위제도를 폐지하고 염가화폐 정책을 실시함으로써 금융업계에 제2차 세계대전을 향한 탄탄한 대로를 깔아주는 것이었다.

     

    1933년 3월 4일,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미국 32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루스벨트는 취임하자마자 월가와의 대립을 기치로 내걸었다.

     

    그는 취임 당일 전국 은행들에 3월 6일부터 영업을 중지하라고 선포하고, 장부에 대한 감사가 끝난 후에 영업을 재개하도록 했다.

     

    이는 미국 역사상 전국의 은행이 처음으로 문을 닫는 조치로, 미국인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세계 최대의 경제주체인 미국에서 은행 영업이 거의 완전히 중단된 초유의 사태는 적어도 열흘간 지속되었다.

     

    사람들의 이목이 온통 모건의 청문회에 집중해 있는 동안 루스벨트는 금본위제를 폐지할 중요한 법을 조용히 통과시켜버렸다.

     

    대통령에 취임한 지 겨우 1주일 만인 3월 11일에 루스벨트는 경제 안정을 내세워 은행의 황금 교환을 금지하는 행정명령을 발표했다.

     

    곧이어 4월 5일, 미국인은 소유한 황금을 모두 내놓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정부는 온스당 20.67달러로 이를 수매했다.

     

    약간의 금화와 금 장신구만 허용할 뿐, 금을 소장한 사람들에게는 10년 징역에 25만 달러의 벌금을 부과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비상 상태에서 내린 임시 조치라고 변명한 이 법은 1974년에 가서야 폐지되었다.

     

    1934년 1월, 황금준비금 법안을 통과시켜 금 가격을 온스당 35달러로 고정했다.

    그러나 미국 국민은 황금을 교환할 권한이 없었다. 사람들이 황금을 정부에 내고 나서 몇 년 동안 모아놓은 저축액은 절반으로 줄어버렸다.

     

    1929년 증시 대폭락 전에 내막을 알고 발 빠르게 대처한 국제 금융재벌들의 '우량 고객'들은 많은 자금을 증시에서 빼내 황금으로 바꾼 다음 런던으로 운반했다.

    그들의 황금이 런던에서 팔릴 때는 온스당 35달러였으니 눈 깜짝할 새 69.33%의 차액을 챙긴 셈이다.

     

    루스벨트가 미국 의원들 중 가장 학식이 깊은 맹인 상원의원 토머스 고어에게 자신의 금본위제 폐지에 대한 생각을 묻자,

    고어는 차갑게 대답했다.

    "이건 명백한 도적 행위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각하?"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

    브레턴우즈협정의 설계 초기에 이들 두 금융기구를 설립한 것은 달러에 세계화폐의 패권적 지위를 부여하기 위해서였다.

    국제 금융 재벌들이 금본위제를 폐지하려는 생각은 3단계로 실현되었다.

     

    먼저 루스벨트가 1933년에 전통적인 금본위제를 폐지한 후 황금과 달러의 직접교환 관계는 황금간접교환으로 대체되어 1단계를 완성했다.

     

    국제 유통시장에서 외국의 달러 소지자는 여전히 달러를 황금으로 교환할 수 있었다.

    그런데 브레턴우즈협정에서는 좀더 발전해 달러를 이용해 환전할 수 있게 함으로써 황금간접교환 제도를 대체했다.

     

    즉 각국 화폐와 달러를 연동시키고 달러와 황금을 연동시킴으로써 외국 중앙은행만 달러를 가지고 황금으로 바꿀 수 있게 했다.

     

    이로써 황금은 화폐의 유통 영역에서 한 걸음 더 밀려났고, 금본위제 폐지의 2단계가 완성되었다.

    IMF와 IBRD 모두 실질적으로는 미국이 통제한다.

     

    IMF의 최고 리더 자리에 유럽인을 앉힌 이유는 통제할 수 없는 사태를 막기 위해서였다.

    미국 재무부는 중대 의제의 경우 반드시 85% 이상의 찬성표를 얻어야 통과된다는 조항을 설계하고, 미국 재무부에 1표의 부결권을 부여했다.

     

    미국 재무장관이 세계은행에서 특히 총재를 인선하고 인사권을 완전히 장악한 상황에서는 85%라는 찬성표의 제약을 받는 경우가 거의 없었으므로 '효율'이 상당히 제고되었다.

    이 점이 '정책적 설계'와 '작업 흐름'의 양자 사이를 교묘하게 이용한 것이다.

     

    브레턴우즈협정의 총 설계자인 케인스는 한 단계 앞선 개념인 '특별인출권'을 고안해 냈다.

    특별인출권은 이른바 '종이 황금'으로, 미국에서 장기적인 부족 상태를 겪는 실물 황금의 부족을 메우는 개념이다.

    그야말로 인류 역사상 초유의 '발명'이다.

     

    특정 '지폐'를 인위적으로 영원히 가치가 절하되지 않도록 해서 황금과 동등한 위치를 부여하되 금으로 교환은 할 수 없었다.

     

    이 개념은 1969년 미국에서 심각한 황금 지급의 위기가 닥쳤을 때 시행된 적이 있으나, 달러와 황금의 교환 관계라는 국제적 규약의 붕괴를 막지 못했다.

     

    브레턴우즈협정이 해체된 후 특별인출권은 '통화바스켓' 환율 연동으로 다시 정의되었다.

    케인스가 1940년대에 내놓은 '세계화폐'의 구상은 아직 본격적으로 그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1971년 닉슨이 황금과 달러의 교환 중지를 선포했을 때 IMF와 IBRD의 역사적 사명은 이미 종결되었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국제 금융재벌은 재빨리 이 기구들에게 개발도상국의 '세계화'를 '돕는다'라는 새로운 역할을 부여했다.

     

     

    은화의 역사적 지위

    미국에서 은이 합법적 화폐로 인정받은 것은 1792년에 '화폐 주조법'을 제정해 달러의 법적 지위를 확정하면서부터다.

    1달러는 미국 화폐로서 가장 기본적인 도량형인 은을 본위로 했다.

     

    이때부터 미국은 금·은 화폐 병행제를 오랫동안 유지했다.

    1873년 2월, '1873년 화폐주조법'이 제정되면서 유럽 로스차일드가의 압박 아래 화폐로서 은의 지위를 폐지하고 단일 금본위제를 시행했다.

     

    금광과 금 공급을 대부분 장악한 로스차일드 가문이 유럽 전체의 화폐 공급을 통제했다.

    그런데 은의 산지는 금보다 분산되어 있고 생산량과 공급량도 훨씬 많아서 이를 통제하기가 쉽지 않았다.

     

    따라서 로스차일드가는 1873년을 전후로 유럽 대부분 국가에 은을 화폐에서 배제하라고 압력을 넣어 단일 금본위제를 시행했다.

    그래서 미국도 이에 따른 것이다.

     

    미국 서부의 은산지에서는 이 법을 강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사람들은 이 법을 '1873년의 악법'이라고 강하게 비난했다.

    그 후 은본위제를 지지하는 서민들의 움직임이 거세게 일었다.

     

    1933년에 루스벨트가 국제 금융재벌들 편에 서서 금본위제를 폐지한 후 미국 화폐 제도는 은본위제에 속해 있었다.

    세 종류의 주요 화폐는 모두 은으로 교환할 수 있었다.

     

    은을 화폐에서 퇴출하지 않으면 '염가화폐'와 '적자재정'의 과업에 치명타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통화 팽창이라는 효과적 금융 도구를 이용해 쥐도 새도 모르게 대중의 부를 약탈하려던 국제 금융재벌들의 야심 찬 계획도 물거품이 될 판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과 대규모 적자재정을 추진하고 전후 유럽 경제를 일으키느라 많은 돈이 들어갔다.

    여기에다 한국전쟁 개입과 베트남전의 복잡한 양상을 띠면서 연방준비은행이 대규모로 발행한 '채무' 화폐의 후유증이 사장에서도 나타나고 있었다.

     

    미국인들은 1940년대부터 지폐를 은화나 은괴로 교환했으므로 재무부가 보유한 천문학적 숫자의 은이 급격히 감소했다.

    설상가상으로 1950년대에 들어서자 무섭게 발전하는 전자산업과 우주산업 영역에서 은 수요가 급증했다.

     

    1960년대 초 케네디가 백악관에 입성할 때 재무부의 은 보유액은 이미 19억 온스로 격감했다.

    은의 시장가격이 하루가 다르게 뛰면서 은화의 화폐 가치가 1.29달러에 육박했다.

     

    은증서를 실물 은으로 교환한 후에는 은증서가 자연스럽게 유통 영역에서 사라짐으로써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그레셤의 법칙의 효과를 입증했다.

     

     

    특별인출권

    화폐학자들은 달러가 위기를 맞을 때마다 금 부족이 통화위기를 가져왔다고 주장한다.

    금본위제의 역사로 볼 때 이런 주장은 원인과 결과가 바뀐 것이다.

     

    금의 부족은 문제의 원인이 될 수 없으며, 무절제한 달러의 과다한 발행이 위기의 근본적 원인이다.

    오랫동안 묶여 있던 은 가격과 마찬가지로 금 가격을 장기적으로 왜곡하는 주요 목적은 황금 생산량 부족 국면을 일부러 조성하려는데 있다.

     

    막상 위기가 닥쳐올 때 사람들이 한다는 조치는 이상하게도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으로 넘어갈 뿐 성실하게 문제의 본질을 직시하지 않는다.

     

    골드 풀이 모든 '실탄'을 다 써버리자 국제 금융재벌들이 기껏 생각해 낸 방안이 일찍이 케이스가 1940년대에 내놓았던 '페이퍼골드'의 주장을 다시 포장해서 특별인출권이라는 '위대한 발명'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프랑스의 유명한 경제학자 자크 루에프도 이 점을 날카롭게 꼬집었다.

    "화폐학자들은 새로운 것을 발명해서 미국 화폐의 파산을 덮으려고 했다.

    모든 나라의 중앙은행에는 특수한 국제 비축 화폐가 분배되었다.

    그러나 인플레이션을 촉발하지 않기 위해서는 특별인출권에 엄격한 제한을 두어야 했다.

    특별인출권으로 말미암아 미국은 여전히 달러 채무를 전혀 상환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월가는 특별인출권이 현대 금융사의 쾌거라며 한껏 들떠 있었다.

     

     

    1973년 중동전쟁: 달러의 반격

    1973년 10월 6일에 일어난 제4차 중동전쟁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같은 해 5월 빌더버그 클럽은 연례회의에서 84명의 국제 금융재벌, 글로벌기업 거두와 선거에 당선된 정객들이 모여 황금 기반이 없는 달러의 약세라는 골치 아픈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지를 두고 논의를 거듭했다.

     

    데이비드 록펠러는 자신의 심복 브레진스키를 회의에 참석시켰다.

    회의 결과 달러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고 수세에 몰린 금융전쟁에서 주도권을 뺏어오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이 대담한 계획에는 몇 가지 목표가 포함되어 있다.

     

    먼저 세계의 석유 거래가 통상 달러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석유 가격이 네 배나 폭등하면 세계 각국의 달러 수요가 폭증한다.

     

    그러면 달러가 금의 기반을 잃은 후 각국에서 발생한 투매 현상으로 말미암은 부작용을 상쇄할 수 있다.

    또 하나는 몇 년 전 경제 저격수들의 뛰어난 활약으로 라틴아메리카와 동남아 국가들이 이미 과도한 대출의 덫에 걸려 있었다.

     

    일단 석유 가격이 폭등하면 미국은 이를 틈타 금리를 대폭 인상할 것이다.

    그러면 낙후한 경제에 자원은 풍부한 이들 나라가 통통하게 살이 올라 도살되기만 기다리는 양의 신세가 된다.

     

    이 계획의 절묘함은 '화를 남에게 전가하기'에 있다.

    먼저 이집트와 시리아를 부추겨 이스라엘을 공격하게 하고, 미국은 공개적으로 이스라엘을 편들어 아랍인들의 화를 돋운다.

     

    아랍권 국가들은 홧김에 서방 세계로 가는 석유 수송을 중단하고 기름 값은 천정부지로 치솟는다.

    사람들의 원망은 자연 아랍권 국가에 집중되기 마련이다.

     

    국제 금융재벌들은 한쪽에서 유유히 싸움 구경을 하면서 오일달러로 번 돈이나 세고 있으면 그만이다.

    이렇게 하면 힘 안 들이고 달러 약세를 만회하고 금융전쟁의 주도권을 되찾아올 수 있다.

     

    게다가 라틴아메리카와 인도네시아를 상대로 '양털 깎기'까지 해주면 작전은 완벽하게 성공한다.

    키신저의 회유와 협박에 못 이긴 사우디아라비아는 OPEC 회원국 중 최초로 미국과 제휴를 맺고 오일달러로 미국의 국채를 구입해 '오일달러의 귀환'을 거들었다.

     

    1975년 OPEC의 장관들은 달러로 석유를 계산하는 데 동의했다.

    이로써 세계화폐는 '석유본위제' 시대로 진입했다.

     

    1970년대에는 막 공업화를 실시한 많은 개발도상국이 IBRD의 저금리 차관에 완전히 의존하고 있었다.

    석유 가격의 폭등으로 이들 나라의 많은 자금이 잠식되었다.

     

    개발도상국은 공업화를 포기해 IBRD의 차관을 상환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거나, 아니면 IBRD에서 더 많은 돈을 빌려 석유를 구입하고 거액의 채무에 대한 원금과 이자를 갚아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IMF와 결탁한 국제 금융재벌들은 벌써부터 그물을 치고 고기가 모이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IMF는 가혹한 구제 조건을 내세우면서 얼떨결에 재수 없이 걸린 개발도상국들에 유명한 'IMF의 네 가지 명약'을 먹도록 몰아댔다.

    '네 가지 명약'이란 국가 핵심 자산의 사유화, 자본시장의 자유화, 기본 생활 요소의 시장화, 자유무역의 국제화였다.

     

    이 약을 먹은 대부분의 나라는 죽지 않으면 치명상을 입고 쓰러졌다.

    몇몇 저항력이 강한 나라도 큰 타격을 입고 국력이 눈에 띄게 약해졌다.

     

     

    금융 핵폭탄 투하: 목표는 도쿄

    영국과 미국이 1980년대에 실시한 고금리 정책은 달러의 신인도를 높이는 데 성공하고 아프리카와 라틴 아메리카의 많은 개발도상국을 위기에 빠뜨렸다.

     

    그러나 고금리는 미국의 공업 능력에도 심각한 타격을 입혀 일본 제품이 1980년대 들어 미국 시장을 대거 점령하는 사태를 초래했다.

     

    1985년 9월, 국제 금융재벌들이 마침내 손을 쓰기 시작했다.

    미국, 영국, 일본, 독일, 프랑스 5개국 재무장관이 뉴욕 플라자호텔에서 '플라자합의'를 체결했다.

     

    목적은 다른 주요 화폐에 대한 달러의 환율을 통제하면서 평가절하 하려는 것이었다.

    일본은행은 미국 재무장관 베이커의 압력으로 엔화의 평가절상에 동의했다.

     

    플라자합의를 체결한 후 몇 개월 안에 엔화 대 달러의 비율은 250 대 1에서 149대 1로 엔화가 크게 절상했다.

    일본의 금융 세력이 강하다는 사실을 안 국제 금융재벌들은 과거와 같은 금융전쟁으로는 이길 자신이 없었다.

     

    일본 금융 시스템에 치명적 일격을 가하려면 미국이 막 제조해 낸 금융 핵폭탄인 주식선물지수를 동원해야 했다.

    도쿄 증권시장에서 보험회사는 매우 중요한 기관투자자들이다.

     

    국제 금융재벌들이 모건스탠리나 살로몬브라더즈 등의 투자은행들을 일본에 깊이 침투시켰을 때 이들의 수중에 거액의 현금을 쥐고 그들의 공격 목표를 찾아 사방을 헤매고 있었다.

     

    이들의 서류 가방에는 '주가지수 풋옵션'이라는 당시 일본에서는 듣도 보도 못한 금융 신상품이 가득 들어 있었다.

    일본 기관투자자들은 이 상품에 큰 관심을 보였다.

    이들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본 증시 폭락에 거액을 걸고 덤비는 미국의 투자은행이 머리가 돈 것이 아닌지 의심했다.

     

    1989년 12월 29일, 일본 증시가 정점에 올랐다.

    닛케이지수가 38.915를 돌파하자 주가지수 풋옵션은 마침내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닛케이지수의 고공행진이 갑자기 멈춘 것이다.

     

    1990년 1월 12일, 미국 쪽에서 손을 쓰기 시작했다.

    미국 주식거래소에는 '닛케이지수 풋 워런트'라는 새로운 금융상품이 갑자기 출현했다.

    일본 증시는 더 이상 힘을 받지 못하고 한 달 만에 완전히 붕괴되고 말았다.

     

    일본 증시는 70%나 폭락하고 부동산은 14년 연속 하락세를 면치 못했다.

    요시카와 모토타다는 <머니 패전>이라는 책에서 재산 손실의 비율로 볼 때 1990년 일본에서 일어난 금융 참패의 결과는 제2차 세계대전 참패의 결과와 맞먹는다고 주장했다.

     

     

    아시아 통화 교살전

    냉전 시기 미국의 맹방이던 또 하나의 나라 한국은 금융위기가 닥치자 미국에 구원의 손을 내밀었다.

    한국 사람들은 미국이 그토록 단호하게 거절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한국 정부는 하는 수 없이 미국이 은행지점들을 한국에 설립하도록 허용했다.

    외국 기업들이 보유할 수 있는 상장회사의 지분은 26%에서 50%로 상향 조정했으며, 외국인 개인이 보유할 수 있는 기업의 주식 지분은 7%에서 50%로 늘어났다.

     

    한국 기업은 반드시 국제회계의 원칙에 따라야 했으며, 금융기관은 국제회계사무소의 회계 감사를 받아야 했다.

    한국 중앙은행은 독립 운영되어야 하며 완전한 자본 계정하의 화폐 자유 교환, 수입허가증 수속 투명화, 기업 구조조정 감독, 노동시장 개혁 등 각종 개혁 조치가 잇달았다.

     

    미국의 금융재벌들은 한국 기업에 진작부터 군침을 흘리고 있었다.

    한국이 협의를 체결하기만 하면 당장이라도 몰려들어 사냥감을 물어뜯을 판이었다.

     

    그러나 국제 금융재벌들은 한국의 강한 민족정신을 너무 얕잡아보았다.

    민족정신이 강한 나라는 외세의 압력에 쉽게 굴하지 않는 법이었다.

     

    고립무원의 처지에 빠진 한국인들은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너도나도 금 모으기 운동에 나서 정부를 도왔다.

    외화보유고가 완전히 바닥난 상태에서 금과 은은 최종 지급 수단으로, 외국의 채권자들은 이를 흔쾌히 채무 상환 방식으로 받아주었다.

     

    국제 금융재벌들이 더 놀란 것은 한국에서는 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대규모 기업과 은행의 도산 파동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서양의 기업들은 한국 대기업을 거의 하나도 사들이지 못했다.

    한국 경제는 가장 어려웠던 1998년 여름의 악몽에서 완전히 빠져나오면서 수출을 빠르게 회복했다.

     

    월가의 속셈을 미리 알아차린 한국 정부는 IMF가 내세우는 독약을 의연히 거절하고 파산 신청 준비를 마친 대기업의 안건을 일괄 동결했다.

     

    그리고 은행의 700억~1,500억 달러나 되는 부실채권을 정부가 과감하게 떠안았다.

    정부가 이 부실채권들을 접수할 때 은행의 통제권은 다시 정부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로써 IMF는 은행의 구조조정 밖으로 배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