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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의 지배
1868년에 금본위 제도를 채택한 나라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영국을 비롯해 영국의 식민지인 포르투갈, 이집트, 캐나다, 칠레, 오스트레일리아 정도였다.
프랑스, 러시아, 페르시아 등과 일부 남미 국가들은 양본위 제도를 채택하고 있었다.
이 밖에 중부 유럽의 다수 국가들을 포함한 거의 대부분 국가들은 모두 기존의 은본위 제도를 버리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40년 후 은본위 제도를 계속 고수한 나라는 중국, 페르시아를 비롯한 남미 몇 개 나라 외에는 없었다.
이로써 황금은 실질적으로 세계화폐 시스템의 표준이 되었다.
유럽 주요 국가들의 화폐 시스템 전환 과정을 보면, 독일이 1871~1873년에 가장 앞서 금본위 제도를 도입했다.
이어 프랑스가 1878년, 이탈리아가 1881~1882년, 러시아가 1897년에 각각 이를 도입했다.
이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주인공은 당연히 로스차일드은행이었다.
로스차일드의 런던은행과 파리은행은 실질적으로 이들 국가의 두 번째 중앙은행이나 다름없었다.
로스차일드은행 네트워크는 국제 금융시장에서 대량의 신용과 화폐를 수송하는 역할을 자임했다.
세계 각 나라들은 로스차일드가가 주도하는 금본위 시스템에서 환율이 급격히 변동하는 위험을 피할 수 있었다.
로스차일드가 역시 자신들의 주요 사업인 공채 교역에서 각 나라 화폐들 간의 자유 태환을 필요로 했으므로 각국의 통일된 금본위 제도하에서 마음껏 사업을 펼치는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로스차일드가는 이처럼 황금 시장을 완전히 장악함으로써 각국 중앙은행에 대한 통제력을 간접적으로 보유하게 되었다.
로스차일드은행이 19세기 후반에 힘을 아끼지 않고 각국들이 금본위 제도를 도입하도록 만든 전략적 의도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프랑스: 금권의 할거
프랑스 산업혁명은 영국에 비해 두 세대나 늦었다.
게다가 18세기 말의 프랑스 대혁명과 뒤이어 벌어진 나폴레옹 전쟁은 프랑스 경제에 막대한 타격을 안겼다.
비록 이런 상황이었음에도 프랑스는 독일이나 미국보다 훨씬 빨리 산업혁명의 과정에 접어들었다.
프랑스는 또한 북미와 인도차이나, 아프리카 등에 방대한 해외 식민지 자원을 보유하고 있어서 해외 무역이 대단히 발달했다.
풍부하게 비축돼 있는 자원과 자본은 당연히 프랑스 산업혁명 시대의 중요한 자금원이 되었다.
프랑스 금융 자본주의의 발전 모델은 네덜란드와 영국의 중간 지점에 위치했으며, 독일과 미국 모델과는 분명하게 달랐다.
특히 민영 은행업은 프랑스 금융업을 이끈 주도적 역량이었다.
그러나 주식제 은행이 19세기 후반 출현하면서 둘 사이에 전에 없던 격렬한 경쟁이 벌어졌다.
사기꾼이자 예언가
카를 마르크스
신용 제도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 성질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다른 사람의 노동을 착취하여 치부하는 자본주의의 생산 동력이라는 성질이다.
이는 가장 순수하고 거대한 도박을 하는 사기 제도로 사회의 부를 착취하는 소수의 사람을 갈수록 적게 만든다.
다른 성질은 새로운 생산방식으로 변화돼가는 과도기의 형식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 두 가지 성질은 신용 제도의 주요 선전가인 존 로나 이사크 페레르 같은 사람들을 사기꾼이자 예언가라는 재미있는 성질을 가지게 했다.
진정한 '파나마 건국의 아버지', 셀리그먼
1869년 수에즈 운하가 개통됨에 따라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구상이 마침내 현실이 되었다.
또 하나의 중요한 전략적 가치를 지닌 카리브해의 파나마에 운하를 파 태평양과 대서양을 연결하자는 구상이 제기되었다.
한편 미국은 수년 전부터 중앙아메리카의 니카라과에 운하를 건설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지리적 위치로 보면 니카라과가 파나마보다 미국에 더 가까운 곳에 자리하고 있어서 니카라과 호수를 통과하는 운하를 건설하는 게 모든 면에서 효율적이었다.
서인도제도의 세인트 빈센트섬에서 화산이 폭발해 수천 명이 목숨을 잃는 비극이 일어났다.
이보다 이틀 전에는 사화산으로 여겨졌던 마르티크섬의 펠레 화산이 폭발해 3,000명의 목숨을 앗아간 일도 있었다.
"니카라과에는 화산이 있으나 파나마에는 화산이 없다. 그래, 바로 이거야."
열 살 때부터 파나마에 운하 건설을 꿈꿔온 집념의 사나이 부노바리야는 우체국으로 달려가 5페소짜리 나카라과 우표를 샀다.
우표에는 짙은 연기를 내뿜는 화산 폭발 장면이 담겨져 있었다.
그는 진귀한 보물이라도 얻은 양 니카라과 우표 90장을 구매해, 그 우표를 붙인 편지를 90명의 상원 의원들에게 보냈다.
미국 상원은 8표 차이로 파나마 운하 계획안을 통과시켰지만 콜롬비아 정부는 갑자기 태도를 바꿔 운하 통로를 내주지 않겠다고 변덕을 부렸다.
당시 부노바리야는 제시에게 속수무책의 심정으로 탄식했다.
"우리는 철저하게 패하고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파나마가 콜롬비아로부터 독립을 하지 않는 한 희망이 없습니다.
파나마에서 혁명이라도 일어난다면 아마 독립을 할지도 모릅니다."
부노바리야의 말에 제시가 반문했다.
"혁명을 일으키려면 돈이 얼마나 필요할 것 같소?"
부노바리야는 파나마 민족주의자들의 약속을 받아내자 쏜살같이 제시의 사무실로 날아갔다.
이어 셀리그먼은행 동업자의 책상에서 파나마 독립선언과 파나마 헌법 초안을 작성했다.
그의 다음 행선지는 워싱턴이었다.
그는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 그동안의 진척과정에 대해 보고를 올렸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부노바리야의 부탁에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러나 이는 다시 말하면 암묵적 동의나 다름없었다.
1903년 파나마에서 혁명이 발발하자 미국은 전함 내슈빌호를 파견해 사태의 진전을 지켜봤다.
미국은 전함 파견을 통해 파나마 분열주의자들을 지원한다는 뜻을 암시한 셈이었다.
콜롬비아는 파나마에 대한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이로써 파나마는 독립을 쟁취했다.
파나마의 독립은 셀리그먼가의 위대한 승리를 의미했다.
셀리그먼가는 파나마 운하 건설의 최대 공신인 부노바리야에게 의미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기 위해 막후 로비에 나섰다.
이에 프랑스 국적인 부노바리야는 파나마 주재 미국 초대 대사로 부임하는 영광을 누렸다.
국제 은행 가문들은 이때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국가 분열은 기본이고 혁명, 전쟁까지 일으킬 정도로 무소불위의 능력을 자랑했다. 가장 분명한 결과가 바로 파나마 독립이었다.
이유나 어쨌든 파나마는 극적으로 독립을 쟁취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셀리그먼가는 진정한 '파나마 건국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었다.
독일 은행 가문: 귀향 희망의 불꽃이 타오르다
유대인은 시종 배척과 박해 속에서 매우 힘들게 생존해 왔다.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은 사회의 주변부 계급으로 몰려 지정된 거주지에서 벗어나 생활할 수 없었다.
그래도 그들은 자신들의 언어, 복장, 음식, 관습 등을 꿋꿋이 고수했다.
유럽 주류 권력층인 종교 세력의 박해와 현지 세속 사회의 멸시로 말미암아 그들에게는 취업, 이민, 생활 등에서 각종 제약이 뒤따랐다.
유대인들은 원칙적으로 땅과 농장을 소유할 권리가 없었고, 수공업에도 종사할 수 없었다.
오로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하층민의 직업인 환전 밖에 없었다.
당시 환전상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세계 각국을 다니는 여행자나 장사꾼들이 대부분이었다.
외국의 화폐를 현지에서 통용 가능한 화폐로 바꿔야 여행이나 장사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대인의 화폐 셰켈은 환전이 용이하고 통용 범위가 넓고 유통 속도가 빠르고 계산이 정밀하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유대인들은 각종 화폐 시장에서 환전 서비스를 통해 차액을 챙김과 동시에 넓은 인맥 관계를 맺고 고객 자원 확보를 위해 정성을 쏟았다.
수천 년에 걸친 노력을 발판으로 환전업은 유대임을 대표하는 직업이 되었고, 외부인들이 감히 넘볼 수 없는 독보적인 경지를 구축했다.
예를 들어 이집트의 수출업자와 프랑스의 수입업자가 모피 무역 계약을 체결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런데 이집트 상인은 융자를 얻어야 물건을 댈 수 있고, 프랑스 상인도 대출을 받아야 대금을 지불할 수 있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때 이탈리아의 한 상인 은행가가 중개인으로 나서서 양측에 자금을 제공하고 대가로 이자를 받았다.
상업 대출의 개념은 바로 이렇게 생겨났다.
또한 이집트 수출업자는 모피를 선적한 다음 바로 대금을 받고 싶었다.
그러나 프랑스 수입업자는 모피를 아직 받지 못했기 때문에 대금 지불을 거부했다.
양측이 모두 난감한 상황인 이때 이탈리아인이 '어음'이라는 새로운 금융 도구를 들고 다시 나타났다.
어음에는 "프랑스인이 언제, 어떤 화폐로 이집트인이 지정한 이탈리아인에게 모피 대금을 지급한다"라고 적혀 있었다.
이집트인은 새로운 지불 수단에 매우 만족해했다.
그런데 어음을 받은 이집트인은 갑자기 주머니에 현금이 있어야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어 어음을 현금으로 바꾸는 시간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탈리아인을 시켜 어음을 할인해 다른 사람에게 팔았다.
그렇다면 할인된 어음을 사서 약정 시간까지 기다려 차액을 얻은 투자자는 누구였을까?
바로 똑똑한 유대인들이었다.
유대인이 어음을 구매한 목적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투자 수익을 얻기 위해서였고, 다른 하나는 교황청에서 법으로 금지한 고리대금업의 규제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어음 할인이 고리대금이라는 행위를 교묘하게 위장해 주는 역할을 했다.
봉쇄와 부상: 영국과 독일의 전략적 경쟁
영국은 자유무역으로 나라의 기반을 닦았다.
이 이론의 근거는 스코틀랜드의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가 최초로 제공했다.
그의 고전 경제학 이론의 핵심은 "국제무역은 쌍방 국가에게 모두 이점이 있다. 어떤 상품의 생산 비용이 자국에 비해 다른 나라가 적게 들 경우 그 나라는 그 상품을 생산할 필요가 없다. 다른 나라의 상품을 직접 구매하는 것이 더 실용적이고 이익이다"라는 말로 대표된다.
당시 전 지구의 6분의 1에 달하는 광대한 해외 식민지를 차지하고 있던 영국은 해양, 산업 기술, 금융, 원자재의 통제권을 틀어쥐고서 산업화를 아직 이루지 못한 국가들을 강요해 무역 관계를 구축했다.
그러나 이는 자유무역이라는 미명 아래 일방적으로 상대국의 자원과 시장을 약탈하고 막대한 이익을 얻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청나라와 영국 사이에 벌어진 아편전쟁이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 초 독일의 산업화 수준과 해외 식민지 규모는 영국과 프랑스보다 훨씬 뒤처졌다.
이 때문에 당시 독일의 경제학자들은 영국 경제를 성공적으로 이끈 자유무역을 본받자는 입장을 천명했다.
그러나 1870년대에 이르러 영국 경제가 쇠퇴하기 시작하면서 독일인들은 영국식 자유무역 모델의 심각한 폐단을 인식하게 되었다.
상황이 바뀌자 독일 경제학자들은 프리드리히 리스트의 보호무역론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프리드리히 리스트는 애덤 스미스의 자유주의 경제학을 비판한 인물로 유명하다.
그는 <정치경제학의 국민적 체계>라는 저서에서 "자유무역을 이상화한 애덤 스미스의 세계주의 정치경제학은 실상 영국의 이익을 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독일은 국가 정치경제학에 기반을 둔 보호무역을 통해 자국의 이익을 보호해야 한다"라는 입장을 표명했다.
그는 또한 낙후한 국가가 산업화를 먼저 이룬 강대국과의 자유경쟁을 통해 신흥 산업국가로 거듭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이에는 그는 "상대적으로 낙후한 독일이 선진국인 영국과 자유무역을 통행 경쟁하는 것은 어린이와 어른의 씨름처럼 결과는 불 보듯 뻔하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이런 현실 속에서 후발국이 강력한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국의 취약한 산업을 보호해야 한다.
그의 이런 보호무역론의 핵심은 관세 제도였다.
관세 인상을 통해 자국의 생산력, 특히 산업 생산력을 대폭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독일은 그의 이론에 입각해 해상 운수와 철도를 대대적으로 발전시키고, 국내의 관련 산업에 대해 관세 보호 정책을 실시하며, 과학자와 기술자를 대거 육성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고생을 두려워하지 않고 부지런한 독일 국민은 정부의 지원에 힘입어 영국과의 경제 격차를 점차 줄여나갔다.
1871년에는 철혈 재상 비스마르크가 중부 유럽의 통일 대업을 이룩했다.
이는 유럽 대륙에서 200여 년 동안 유지돼온 세력 균형이 무너졌음을 의미했다.
여기저기 흩어지고 약하기 이를 데 없었던 중부유럽이 완강하고 거친 프로이센에 의해 통일된 획기적 사건이었다.
여기에 독일이 구축한 새로운 경제 발전 모델과 폭발적인 경제 성장은 영국의 전략적 방침과 이익에 강력한 도전으로 다가왔다.
베를린-바그다드 철도: 영국의 해상 봉쇄에 대항한 독일의 전략적 출구
영국의 강력한 해상 전력을 당분간 추월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독일은 육지로 눈길을 돌려 새로운 발전 기회를 찾아 나섰다.
아나톨리아 반도는 북쪽으로 흑해, 서쪽으로 에게 해, 남쪽으로는 지중해와 접하고 있는, 유럽에서 중동으로 통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독일의 전략적 목표는 명확했다.
베를린에서 바그다드에 이르는 철도를 건설하여 독일의 강력한 산업 생산 능력과 중동 지역의 풍부한 원자재, 석유, 식량 및 잠재 시장을 연결시키겠다는 계획이었다.
계획대로 된다면 독일은 경제적으로 중부 유럽, 발칸 및 중동 전 지역의 산업 생산과 원자재를 완벽하게 통합하고, 정치적으로는 서아시아와 남아시아까지 영향력을 확대해 페르시아만에서 인도양에 이르는 해상 통로를 개척하는 것이 가능했다.
베를린-바그다드 철도의 가장 중요한 점은 강력한 영국 해군력을 피하고 영국과 프랑스가 통제하는 수에즈 운하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또한 이 철도는 강력한 독일 육군의 보호하에 국가 안전의 대동맥이 될 수 있었다.
1900년 독일 함부르크의 바르부르크 은행과 도이체 방크는 공동으로 베를린-바그다드 철도 건설 공사를 위한 거액의 융자를 제공했다.
영국은 독일의 전략적 의도를 눈치채고 크게 긴장했다.
이로써 양국의 팽팽한 신경전은 격화일로로 치달았다.
1907년 아서 밸푸어 전 영국 수상은 미국 외교관 헨리 화이트에게 자신의 걱정거리를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독일이 더 많은 운수 및 물류 시스템을 건설해 영국의 무역을 완전히 빼앗기 전에 선전포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영국은 바보 같은 실수를 저지르는 것입니다."
영국과 비슷한 입장이었던 프랑스와 러시아도 베를린-바그다드 철도 건설에 극력 반대하며 철도 건설 저지를 위해 온간 수단을 동원했다.
베를린-바그다드 철도 건설 계획은 독일이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의 해상 봉쇄에 대항해 고안해 낸 전략이었다. 이는 제1차 세계대전을 불러일으킨 중요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독일의 자작극, 아가디르 사건
1911년 7월 1일, 한 독일인이 모로코 해변에서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빌헬름 2세는 상황을 전혀 알아보지 않고 영국이 지배하던 모로코에 전함 판테르호를 출격시켰다.
이는 독일이 영국의 해상 패권에 도전한 심각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당시 모로코 남부에 독일인이 한 명도 살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독일인이 없는데 어떻게 "생명의 위협을 받는 독일인을 구조한다"라는 구실을 댈 수 있겠는가?
독일 정부는 고심 끝에 광산 개발에 종사하는 엔지니어 한 명을 '생명의 위협을 받을 독일인'으로 위장시켜 모로코 남부에 파견했다.
이 엔지니어는 예정대로라면 1911년 7월 1일에 정확히 지정된 장소에 도착해야 했다.
그러나 이 사람은 그만 길을 잃고 해변과 방향이 완전히 다른 산속을 헤매고 다녔다.
엔지니어가 어디에 있든지 간에 독일로서는 계획을 실행에 옮겨야 했다.
독일은 바로 모로코에서 한 독일인이 중화기의 습격을 받았다고 말하고, 영국과 프랑스에 독일인을 구조하기 위해 군함을 파견할 것이라고 통보했다.
독일 군함은 현지에 도착한 후 엔지니어를 찾아 나섰지만 종적이 묘연했다.
며칠 후 기진맥진한 엔지니어가 드디어 약속 장소에 모습을 나타냈지만 독일 군함은 끝내 그를 발견하지 못했다.
다급해진 그는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지르고 펄쩍펄쩍 뛰었다.
그제야 독일 군함은 그를 발견했으나 진짜 미친 사람으로 여기고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결국 7월 5일 저녁이 돼서야 '생명의 위협을 받은 소중한 독일인'은 겨우 구조될 수 있었다.
'아가디르 사건'이후 윈스턴 처칠은 영국 해군부 장군에 임명되었다.
취임 후 그는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 독일의 도전을 받지 않고 영원히 패권을 장악할 수 있도록 해군 건설에 총력을 기울이겠다고 맹세했다.
한편 영국과 프랑스가 '아가디르 사건'을 독일이 악의적으로 조작했다고 단정하면서 이들과 독일의 설전은 날로 강도를 더해갔다.
밸푸어 선언과 시오니즘의 갈등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중동을 통치할 야심에 불탔던 영국은 독일을 물리치고 오스만 제국을 분할한 후 오스만 제국 경내의 아랍인들과 협상을 벌여 전후 아랍 지역의 독립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를 통해 영국은 아랍인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영악한 영국 정부는 이번에는 아랍인들 몰래 프랑스와 전후 오스만 제국 영토 문제 처리와 관련한 '사이크스-피코 협정'을 체결했다.
협정에서 영국과 프랑스 양국의 세력 범위를 정하는 것 외에 팔레스타인을 공동 관리한다는 규정이 포함되었다.
이후 1917년 11월, 영국은 팔레스타인에 유대 국가 건국을 지지한다는 '밸푸어 선언'을 발표했다.
밸푸어 선언이 발표된 1917년 직후, 월터 로스차일드를 필두로 한 시온주의자들은 내심 연합군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승리를 거둬 하나님이 오래전에 약속한 땅 팔레스타인에 유대 국가를 건설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현실은 그들의 희망을 외면했다.
영국은 제1차 세계대전 때 오스만 제국을 무너뜨리기 위해 아랍인에게 독립 국가를 세워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전쟁에서 승리한 후 언제 그랬냐는 듯 태도가 돌변하더니 위임 통치라는 미명하에 팔레스타인을 영국의 식민지로 만들어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밸푸어 선언의 원칙을 지킨답시고 유대인 독립 국가 건설에 동조하면 아랍인들의 강력한 반발을 사게 돼 중동에서의 전략적 이익을 해칠 우려가 있었다.
영국 외교부를 비롯해 식민지 사무부 및 팔레스타인의 영국 총독 당국은 머리를 맞대고 절충안을 모색했다.
이렇게 해서 고안해 낸 안이 바로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이민은 장려하되 국가 건설은 불허한다는 방침이었다.
아랍인과 유대인의 충돌 및 팔레스타인 현지 주민과 영국 총독 당국 간의 갈등이 날로 격화되자 영국으로서는 팔레스타인 정책에 수정을 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22년 7월, 영국 식민지 장관 윈스턴 처칠은 영국 정부를 대표해 일명 '처칠 백서'로 불리는 성명을 발표했다.
주요 내용은 첫째 영국은 팔레스타인 전역을 유대 국가로 만들 계획이 없다는 것이었고,
둘째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공동체는 이민자 수를 늘릴 수는 있으나 현지의 경제 흡수 능력을 절대 초과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1922년 독일 중앙은행의 독립: 하이퍼인플레이션의 폭발
독일 제국은행 설립 이후 골드마르크의 화폐가치는 대단히 안정된 상태를 유지해 독일 경제가 회복되는 데 중대한 추진력을 발휘했다.
이는 금융이 낙후한 국가가 선진국을 따라잡은 모범적인 사례로 꼽힌다.
독일이 패전한 1918년부터 1922년까지 독일 마르크의 구매력은 여전히 견고했다.
인플레이션율 역시 영국, 미국, 프랑스 등의 전승국과 뚜렷한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여러모로 곤경에 처할 수밖에 없는 패전국 중앙은행의 화폐정책이 이 정도 수준에 이르고 효과를 봤다는 것은 정말 대단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승국들은 갖은 구실을 동원해 독일 정부가 가진 중앙은행 통제권을 완전히 박탈해 버렸다.
1922년 5월 26일에 입법을 통해 독일 중앙은행의 민영화를 확정함에 따라, 독일 정부는 중앙은행 통제권과 화폐 발행권을 모두 상실하고 말았다.
정부를 대신해 화폐 발행권을 장악한 세력은 개인 은행 가문들이었다.
그 안에는 바르부르크를 비롯한 거물급 국제 은행 가문이 포함돼 있었다. 독일 역사상 최악의 인플레이션은 사실은 이때부터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히얄마르 샤흐트의 '렌텐마르크' 방어전
마르크화가 18개월에 걸쳐 몰아친 투기 회오리에 휘말려 완전히 휴지 조각이 되어버리면서 새로운 화폐의 등장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갈수록 높아졌다.
이때 등장한 화폐는 금융 역사에서 '렌텐마르크'로 불리는 은행권이었다.
렌텐마르크는 토지와 산업 시설을 담보로 발행되었고, 총 가치는 32억 마르크에 상당했다.
마르크화를 안정시키는 중책을 맡은 사람은 금융계에서 23년이나 활약한 히얄마르 샤흐트였다.
샤흐트가 추진한 '새로운 정책'의 핵심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모든 민영 은행의 마르크화 발행을 즉각 금지시켰다.
이를 위해 그는 민영 은행이 보유하고 있던 구 마르크화를 모두 렌텐마르크로 교환해 주었다.
다른 하나는 외국인에게 렌텐마르크 대출을 금지한 것이다.
샤흐트는 독일에서 기승을 부리는 환투기 세력의 대부분이 외국인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당시 외국 투기 세력의 상투적인 수법은 마르크화를 매도한 다음 외환시장에서 그 액수만큼 화폐를 채워 넣는 방식이었다.
1924년 말에 이르러 독일의 사업가들과 일반 자영업자들은 렌텐마르크와 마르크화의 가치를 동일시하기 시작했다.
이에 샤흐트는 렌텐마르크를 회수하고 독일 중앙은행에서 발생하는 마르크화를 유통시켰다.
샤흐트가 추진한 조치는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 당시 런즈강 홍콩 금융관리국 총재가 실시한 것과 방법은 약간 달랐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모두 환투기꾼이 애용하던 단기 대출 금리를 상상 이상으로 대폭 인상함으로써 환투기 행위에 큰 타격을 가한 것이다.
페더: 히틀러의 금융 스승
페더는 경제나 금융 분야에 대해 정규 교육을 받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1917년부터 독자적으로 화폐, 경제, 대공황, 취업, 전쟁 등이 국가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정통 학문을 뛰어넘어 깜짝 놀랄 만한 일련의 결론을 도출해 냈다.
그는 "국가는 반드시 통화 공급을 장악하는 권력을 가져야 한다"라고 말하고, 중앙은행은 절대 개인의 수중에 넘어가서는 안 되며 국유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개인이 중앙은행을 장악하게 되면 이자를 비롯한 모든 이익을 국가와 공공의 행복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소유하기 때문이었다.
1920년 히틀러는 페더 등과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이렇게 해서 그는 나치 운동의 철학 원리 체계를 완성했다.
나치당의 '25개조 강령'으로 연결된 이 사상 체계는 1932년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나치당 전국 당 대회에서 재차 정치 강령으로서의 지위를 인정받았다.
25개조 강령 중에서 경제 분야와 관련된 몇 가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제11조: "모든 불로소득과 이자 노예제를 폐지한다"
이 관점은 "이자 노예제를 폐지하고 '창조적 산업 자본'과 '약탈적 금융 자본'을 구분하자"라는 페더의 일관적인 주장과 맥을 같이한다.
페더는 기본적으로 자본이 실물 경제의 사이클에 진입할 때만 가치를 창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제12조: "전쟁으로 얻은 모든 불법 소득은 국가에서 단속해 몰수한다."
히틀러는 제1차 세계대전이 군사적으로 패한 것이 아니라 '국가 이익을 팔아먹은' 자산 계급과 유대인 금융가들이 '등 뒤에서 비수를 꽂았기' 때문에 패했다고 생각했다.
제13조: "우리는 트러스트 같은 모든 기업을 접수해 국유화할 것을 요구한다."
페더는 국가에서 '국유기업'이라는 거대한 '항공모함'을 구축해 사회의 주요 자원을 독점해야 한다는 원칙을 주창했다.
제14조: "우리는 대기업이 이익 분배에 동참하기를 요구한다."
페더는 대기업이 반드시 자신들을 키워준 사회에 보은하여 경제 번영을 사회 각 계층과 공동으로 향유해야 한다는 주장을 견지했다.
제16조: "우리는 건전한 중산층의 육성과 보호를 요구한다. 이를 위해 대규모 백화점을 즉시 공유화해 소규모 경영자에게 염가로 임대해 줄 필요가 있다. 국가와 각 주는 필요한 물품을 조달할 때 소규모 납품업체들을 최대한 고려해야 한다."
제17조: "우리는 민족의 수요에 부합하는 토지 개혁을 요구한다. 공공의 이익을 위해 대가 없는 토지를 몰수할 수 있는 법령을 제정해야 한다. 지세도 폐지해야 하며, 모든 토지의 투기를 발본색원해야 한다."
페더는 '불로소득'과 '토지에 대한 투기'를 가장 혐오했다.
제18조: "매국노와 고리대금업자 및 투기업자들은 사형에 처한다."
페더는 이 밖에도 '국가의 권위'를 이용해 '경제건설 은행'을 설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히틀러는 누가 뭐래도 정치가였다.
그는 페더의 많은 관점에 대해 수긍하는 입장을 보였으나 이론 자체에는 크게 흥미를 가지지 않았다.
메포어음
'메포어음' 발행을 실제로 주도한 사람은 샤흐트였으나 기본적인 이론과 정신은 페더가 제공한 것이다.
1933년 5월 31일, 독일 정부는 특수한 기술 프로젝트에 자금을 지원한다는 목적으로 10억 마르크의 '메포어음'을 발행했다.
기한연장이 가능한 이 어음을 고용주에게 발행하고, 고용주는 노동자를 대규모로 고용해 대형 프로젝트에 착수하는 방식이었다.
'메포어음'의 최대 장점은 어음의 구매력이 고용 창출에 실제적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이다.
'메포어음'의 유통량이 증가하면서 유휴 자원 이용률이 대폭 상승하고 실업률 역시 급속도로 하락했다.
히틀러의 경제 정책으로 독일의 중산층과 빈곤층은 상당한 혜택을 보았다.
그러나 외국 은행가들은 강한 불만을 터뜨리며 이 정책에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독일 정부는 화폐와 유사한 기능을 하는 '메포어음'을 직접 발행함으로써 국제 은행 가문이 쳐놓은 통제의 사슬을 에둘러갈 수 있었다.
마셜 플랜
마셜 플랜은 미국에게 일석다조의 절묘한 프로젝트였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유럽에 대한 대외 원조 계획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미국 금융 세력이 유럽 재건을 주도하도록 만드는 동시에 소련의 경제 재건에 심각한 타격을 입힐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마셜 플랜의 취지는 소련에 대한 독일의 전쟁 배상금을 취소하고, 대신 미국이 유럽에 금융 원조를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참가국들이 수용해야 할 요구 조건에 경제 자유화가 포함되어 있었다.
따라서 계획경제를 실시하는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은 이 계획에서 실질적으로 배제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
마셜 플랜의 또 다른 '절묘한 점'은 미국인이 납부한 세금으로 유럽 국제 은행 가문들이 전쟁에서 입은 손실을 보전해 주었다는 것이다.
미국은 마셜 플랜에 따라 유럽 은행 가문들에게 130억 달러를 빌려주었다.
나중에 독일을 제외한 어떤 나라의 가문도 이 돈을 갚지 않았다.
대한항공 997기의 미스터리한 피격
1983년 8월 31일 새벽, KAL, 007편 보잉 747 여객기가 사할린섬 상공에서 소련 요격기의 공격을 받고 추락, 269명 탑승자 전원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지난 20여 년 동안 KAL, 007 사건과 관련해 다양한 추측이 난무했다.
이 가운데 1962년 이스라엘의 비밀 정보기관 모사드의 한 요원이 소련으로부터 입수했다는 내부 정보는 큰 충격을 던져주었다.
이 정보에 따르면 KAL, 007기는 미사일의 요격을 받은 다음 즉시 폭파된 것이 아니었다.
12분 정도 계속 비행하다 사할린섬 인근 해역에 성공적으로 착륙했다.
소련 당국은 여객기를 유도 착륙시킨 후 승객들을 모스크바 부근의 루비얀카 감옥과 극동의 브랑겔 수용소에 이송했다.
당시 KAL, 007기에 탑승한 승객 중에는 특별한 인물이 한 사람 있었다.
바로 로런스 패턴 맥도널드 미국 하원 의원으로, 제2차 세계대전 때 '신 세계 질서'에 완강한 반대 입장을 표명했으며, '국제주의'와 '글로벌화'의 명목으로 국가 주권을 파괴하려는 자들을 끔찍하게 증오했다.
맥도널드는 1998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출마를 준비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미국외교협회와 삼각위원도 공격할 '최대 위험인물'로 꼽힐 만큼 정치가로서의 영향력이 막강했다.
삼각위원회는 세계 경제를 독점하고 세계정부를 세우기 위해 1972년에 창설된 조직으로, '삼변회'라고도 한다.
삼각은 미국, 일본, 유럽을 일컫는다.
왜곡된 달러와 '부채 댐'
불합리한 달러화 제도를 바로잡지 못한다면 미국의 과잉 부채와 과잉 소비, 신흥 국가의 과잉 생산과 과잉 예금 사이의 극단적인 불균형은 절대 해소될 수 없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 30년 동안 무역적자와 재정적자 상태에서 꾸준히 버텨온 나라는 미국 밖에 없다.
달러화가 금본위제를 벗어난 1971년부터 미국의 부채 증가율은 연평균 6%에 이르렀고, 2000년 이후부터는 연 평균 7~8%로 더욱 높아졌다.
미국의 현재 GDP는 고작 11조 달러에 불과하며, 향후 41년 동안 지속적으로 연 평균 3%씩 성장한다 해도 41년 후에는 37조 달러밖에 되지 않는다.
반면 부채 이자율을 6%라고 가정할 경우, 621조 5,000억 달러의 부채 이자만 해도 37조 3,000억 달러에 이르게 된다.
위의 계산대로 한다면 2051년의 미국 부채의 이자 총액은 GDP를 초과한다.
주의할 점은 위의 부채는 의료보험 및 사회복지기금 등 100조 달러규모의 잠재 부채를 제외한 액수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달러화 위기는 터질 것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언제 터지느냐의 문제다.
화폐의 기능
역사적 교훈을 살펴보면, 화폐는 '저축 수단', '유통 수단', '지불 수단', '가치 척도'의 네 가지 기능을 동시에 발휘할 때 화폐 매커니즘이 안정되고 지속될 수 있었다.
그러나 순수한 신용 화폐 제도는 가장 핵심적인 '저축' 기능을 상실했기 때문에 결국 '가치 척도'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다.
달러화는 한때 화폐의 이 네 가지 기능을 온전하게 수행했다.
그러나 39년 전 금과의 연결 고리가 끊어진 뒤 '저축 수단'과 '가치 척도'의 두 가지 기능을 잃고 현재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 있다.
달러화 체계가 2020년을 전후해 붕괴된다고 가정할 경우, 이 세계에는 달러화를 대체할 주권 통화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다시 말해 신용 화폐 제도는 달러화의 붕괴와 더불어 역사 무대에서 영원히 사라진다는 얘기다.
그때가 되면 금이 다시 화폐의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 불가피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