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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화폐전쟁3

     

     

     

    아편무역: 금본위제와 은본위제의 결전

    영국이 전 세계에 금본위제를 보급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다른 국가의 은본위제를 무너뜨릴 필요가 있었다.

    그중 규모가 어마어마하고 대적하기 가장 어려운 국가는 바로 중국이었다.

     

    국제 은행가들은 다년간 연구를 거듭한 끝에 마침내 중국의 은본위제에 치명적 일격을 가할 무기를 발견했으니,

    그것이 바로 아편이었다.

    그리고 이 전략을 구체적으로 추진한 주체는 바로 동인도회사였다.

     

    일개 기업이 군대를 모집하고 토지를 약탈하고 화폐를 주조하고 행정, 사법권을 행사하고 전쟁을 선포하고 강화 조약을 체결한다는 것은 일반인이 상식으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동인도회사는 이 모든 것이 가능했다.

     

    그렇다면 이토록 강대한 기업을 설립한 사람은 누구인가?

    다름 아닌 시티오브런던의 국제 은행가들이다.

    동인도회사는 엄밀하고 체계적인 절차에 따라 아편무역을 진행했다.

     

    우선 영국령 인도 식민지의 아편 독점권을 확보하여 인도와 방글라데시에서 생산되는 아편을 일괄 수매하고 판매했다.

    그리고 콜카타 한 곳에서만 집중적으로 아편 경매를 진행했다.

     

    더불어 동인도회사와 대리 관계가 있는 산상에게만 아편무역을 허용하는 동시에, 광주에는 상주 관리위원회를 두고 대중국 무역을 총괄하도록 했다.

     

    이 관리위원회 위원들은 '대반'으로 불렸다.

    관리위원회는 대중국 무역에서 '중앙은행'역할까지 담당하며 모든 중국 관련 환업무를 처리하고 산상들에게 대출 서비스를 제공했다.

     

    나중에는 동인도회사와 거래 관계가 있는 광주 13행에도 대출을 해줬다.

    산상들은 아편무역을 비롯해 대중국 무역을 통해 얻은 모든 수입을 반드시 이 관리위원회가 설치한 창고에 저축해야 했다.

     

    그런 다음 관리위원회가 서명 발급한 환어음을 런던, 인도, 방글라데시에서 은으로 바꿀 수 있었다.

    동인도회사는 창고에 보관해 둔 은으로 중국의 황금, 비단, 찻잎 등을 사재기한 후 다시 유럽에 내다 팔아 폭리를 취했다.

     

    아편무역으로 인해 중국의 은이 물밀듯이 외국으로 빠져나가 중국에는 '은 가치 상승, 화폐가치 하락'이라는 심각한 금융위기가 발생했다.

     

    청나라는 건국 이후부터 19세기 초까지 100여 년 동안 은화와 동전 두 가지를 병용하는 화폐제도를 실시했다.

    당시 농민, 수공업자 및 일반 서민들은 평소에 주로 동전을 사용했으나 각종 세금을 납부할 때에는 반드시 은화로 바꿔 납부해야 했다.

     

    대청제국 금융 하이 프런티어의 초석인 은본위제가 결국 아편에 의해 무너지면서 무역적자 급증, 재정 수입 급감, 백성 생활의 불안정, 빈부 격차 심화 등 사회적 모순이 격화되었다.

     

    이에 반해 국제 은행가들은 아편무역을 통해 수탈한 거액의 은으로 '중국의 잉글랜드은행'을 설립했다.

    홍콩상하이은행의 설립은 중국 근대사가 금융 식민지 시대에 접어 들었음을 의미했다.

     

     

    메이지 유신이 외국 자본에 의존하지 않은 이유

    일본은 메이지 유신 초기에 금록공채를 자본금으로 삼는 기발한 생각을 했다.

    이는 당시에 이미 일본이 현대 금융의 본질에 대해 철저히 이해했음을 설명한다.

    같은 시대의 청나라를 훨씬 앞선 진보적인 사상이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때 투자 유치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일본은 외국의 기술, 기계설비 및 원자재만 필요했을 뿐, 경영 분야는 오히려 서구보다 한 수 위였다.

     

    필요한 경화도 생사, 찻잎, 도자기를 수출해 얻으면 그만이었다.

    외국 자본 역시 일본이 스스로 화폐 창조 능력을 갖췄기 때문에 전혀 필요 없었다.

     

    조슈, 사쓰마번의 귀족과 사무라이 계급으로 구성된 메이지 정부가 서구 열강을 상대한 마음가짐과 태도는 정객, 문인이 장악한 청나라 정부와 달라도 너무 달랐다.

    금융 분야는 특히 더 심했다.

     

    대장성은 메이지 정부의 핵심 권력기관으로 재정·금융 관료들은 대부분 조슈, 사쓰마번의 명문 사무라이들이 담당하고 있었다.

    이들은 금융 시장마저 사무라이 정신으로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 각축장으로 여겼다.

     

     

    마오쩌민의 금융 공성계

    마오쩌민은 갑자기 닥친 뱅크런 위기에 대단히 슬기롭게 대처했다.

    그는 군중들을 상대로 금융 공성계라는 고도의 심리전을 펼쳐 위기 확산을 막았다.

    또 제때에 소비에트구에 물자를 공급함으로써 국가은행과 소비에트 정부의 신용을 견고하게 다지는 데 성공했다.

     

    국가은행의 신용이 회복되면서 소비에트 정부의 융자 능력과 물자 분배 능력이 보장되었고,

    나아가 홍군의 반 포위토벌 전쟁의 승리를 위한 경제적 토대도 다졌다.

     

    사람들에게 화폐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각종 물자를 바꿔 소유하는 것이다.

    사실이 이렇다면 금본위제나 은본위제가 아니라 물자본위제를 통해서 지폐의 신용을 충분히 구축할 수 있다.

    마오쩌민의 물자본위 화폐 이론은 훗날 공산당의 화폐 사상에 큰 영향을 끼쳤다.

     

     

    최초의 중미 환율전쟁: 은 수출 붐

    역사는 때때로 주인공만 바뀌고 놀랄 만큼 똑같이 반복되곤 한다.

    루스벨트 전 대통령이 1933년에 추진한 '은 구매법'과 오바마 대통령이 2010년 중국에 인민폐 평가절상 압력을 가한 것은 완벽히 똑같은 의도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루스벨트의 두 가지 전략적 목표는 처음부터 실패가 예정돼 있었다.

    당시 미국의 대공황은 GDP 대비 채무 규모가 너무 컸기 때문에 발생했다.

     

    1929년에 미국의 GDP 대비 채무 비중은 무려 300%에 육박했다.

    거액의 채무에 힘입은 산업 확장 속도는 미국 국내의 구매력 증가 속도를 훨씬 앞질렀다.

    그 결과 심각한 소비력 부족과 대량의 잉여 상품을 초래했다.

     

    기업의 채무 위약 리스크가 급증하면서 급기야 증시가 붕괴되고 은행의 악성 부채 규모가 증가해 많은 은행들이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기업 채무 위약 리스크의 증가에 따라 은행이 신용대출 긴축 정책을 펼치면서 더 많은 기업이 파산하고 대량의 실업자를 양산했다.

     

    이로 인해 국내 소비력이 급감하고 과잉 상품 문제가 더욱 심각해졌다.

    이와 같은 악순환이 반복되면서 디플레이션이 물가 폭락을 부르고 대규모 실업 사태와 경제 공황을 초래했다.

     

    이 점만 보더라도 1929년 미국 대공황과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는 본질적으로 완벽히 일치한다.

    2008년에도 미국의 GDP 대비 부채 비율은 무려 400%에 이르렀다.

    비슷한 위기 상황에서 오바마 역시 루스벨트와 거의 유사한 해결 방안을 내놓았다.

     

    채무 규모를 줄이지 않고 막무가내로 화폐 발행량과 신용 공급을 늘리는 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다.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은 8년 동안 시행됐으나 대공황을 극복하지 못했다.

    당연히 오바마는 루스벨트보다 더 운이 나빴다.

     

    막대한 채무로 인해 위기가 유발된 경우 지급 준비금을 늘리는 방법으로 위기를 해결할 수 있을까?

    결론은 말할 것도 없이 'No'이다.

     

    채무 규모를 줄이지 않는 한 지급 준비금을 아무리 늘려도 신용 대출은 확대될 수 없다.

    기업이 대출을 원하지 않거나 설사 원해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대출이라는 경로를 거치지 않고 신용을 경제체제에 공급할 수는 없다.

    한마디로 루스벨트의 첫 번째 전략적 목표는 실현 불가능했다.

    의도적으로 은 가격을 상승시켜 중국 화폐를 평가절상한다면 미국의 수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만약 미국의 은 가격이 상승한다면 중국의 금속화폐는 투기꾼들에 의해 대량으로 미국에 유입돼 중국의 본위화폐는 큰 타격을 입을 가능성이 높다.

    이 경우 중국은 심각한 경제 침체를 맞아 소비력이 급감해 필연적으로 수입이 감소한다.

     

    루스벨트의 은 구매법은 의도와 전혀 다른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남에게 손해를 끼치고 자기 이익만 도모하는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은 그저 금융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것이었을까?

    사실 미국 지배 엘리트들의 전략적 목표는 이보다 더 높은 곳에 있었다.

    바로 파운드화를 대신해 달러화를 세계의 기축통화로 만드는 것이었다.

     

     

    항일전쟁과 외국환평형기금

    국민정부는 1935년 11월 3일에 제정한 화폐 개혁 법령을 통해 법폐와 파운드화의 고정환율을 규정하고 사실상 법폐를 파운드화 블록에 가입시켰다.

     

    게다가 1936년 5월에 중미 양국은 중미 은 협정을 체결하여 미국은 금으로 중국의 은 7,000만 온스를 매입하고 5,000만 온스의 은을 담보로 중국에 2,500만 달러의 차관을 빌려주었다.

     

    중국은 이렇게 얻은 금과 달러를 법폐와 달러화의 교환 비율을 법폐 1 위안에 달러화 30 센트로 규정했다.

    이렇게 해서 중국의 법폐는 파운드화 및 달러화와 연동되었다.

     

    일본 군부와 관동군의 일부 중좌 및 소좌들은 즉각 국민정부의 의도를 간파했다.

    이들은 중국 정부가 중국 화폐를 파운드화 블록과 달러화 블록에 가입시킴으로써 영미 세력과 운명 공동체를 이뤄 일본을 철저히 배격하려는 속셈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했다.

     

    관동군은 말 대신 대포로 법폐 개혁에 대한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때는 중국이 화폐 개혁 방안을 발표한 11월 3일에 불과 12일 밖에 지나지 않은 11월 15일이었다.

     

    이날 관동군은 보병 병력을 비롯해 탱크, 장갑차와 야전포 부대를 산해관 최전선에 집결하고 여차하면 관내로 쳐들어갈 준비를 했다.

     

    동시에 일본은 이른바 '화북 5성 자치 운동'을 책동하고 화북 방향으로 대거 침투하여 화북 지역을 제2의 만주국으로 만들려는 계획까지 획책했다.

     

    일본의 목적은 매우 분명했다.

    국민정부가 화폐 개혁을 통해 일본의 대동아 공영권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으므로 좋은 말로 할 때 듣지 않는 국민정부에게 제대로 된 맛을 보여주겠다는 심산이었다.

     

    1937년 드디어 항일 전쟁이 폭발했다.

    중국의 법폐가 영국과 미국의 품에 살포시 들어간 것이 이번 전쟁의 중요한 원인이었다.

     

    국민정부는 외화 사재기 압력에 직면하자 외화 자유 매매 정책을 폐지하고 중앙은행이 직접 외환 시장에 개입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정부의 이 같은 조치는 오히려 역효과를 일으켰다.

     

    법폐의 신용은 위기에 빠졌다.

    법폐의 가치를 회복하고 항일 전쟁의 사활을 결정하는 금융 시스템을 안정시키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영국과 미국으로부터 돈을 빌리는 길밖에 없었다.

     

    우선 영국과 미국으로부터 빌린 파운드화와 달러화를 중국 정부의 명의로 잉글랜드은행과 연방준비은행에 저축해 둔 다음 출자자인 영국과 미국 측이 이사회를 파견해 이 외화를 관리하고, 계획적으로 중국 외환 시장에 파운드화와 달러화를 풀어 법폐를 회수하는 것이었다.

     

    그럼으로써 법폐의 가치를 안정시키고 전쟁이 종식된 다음 중국 정부가 기간을 나눠 영국과 미국의 차관을 갚는 방법이었다.

    이 돈이 바로 외국환 평형기금이다.

    외국환 평형기금이 현실화 되면 사실상 중국의 중앙은행이 되는 꼴이었다.

     

     

    쿵샹시의 횡재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이 발발했다.

    이전까지 미국 국회는 전쟁에 대해 방관적인 태도를 견지했으나 진주만 공격으로 입장이 180도 바뀌었다.

     

    미국은 곧 중국과 공동으로 일본에 대항하기로 방침을 정한 데 이어, 1942년 초에 군사력 강화를 목적으로 중국 정부에 5억 달러라는 거액을 대출해 주기로 결정했다.

     

    그해 미국의 화폐 발행액은 96억 달러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중에서 무려 5억 달러를 중국에 지원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중국 입장에서도 5억 달러는 대단히 큰 액수였다.

     

    게다가 이 대출은 중국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세 가지 조건이 없는' 대출이었다.

    우선 상환 기간을 정하지 않았고, 금리가 0%였으며, 다른 부가 조건이 전혀 없었다.

    겉보기에는 미국이 밑지는 장사를 한 것처럼 보였으나 실제로는 적은 자본으로 큰 이익을 얻었다.

     

    미국으로부터 5억 달러를 대출받은 중국은 항전에 대한 사기가 한껏 높아지고 군사력도 대폭 강화돼 일본을 상대로 더욱 맹렬히 싸웠다.

    당연히 태평양 전선에 있는 미국의 사상자 수는 그만큼 줄어들었다.

     

    월스트리트의 은행가들은 일찌감치 전쟁 종식 후 세계 화폐와 관련한 전략적 구도를 구상하고 있었다.

    화폐의 전략적 각도에서 보면 미국은 5억 달러의 본전을 투자해 네 가지 거액의 보답을 얻을 수 있었다.

     

    첫째, 즉시 나타날 수 있는 효과로는 미국 방위산업 규모를 신속하게 확장시키는 동시에 철강, 광산, 기계제조, 운송, 조선, 자동차, 비행기 등 관련 산업 발전을 이끄는 것이 가능해졌다.

    이를 통해 경제 대공황의 곤경에서 벗어나고 18%의 높은 실업률을 낮춰 국내 소비를 활성화하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둘째, 중국의 화폐 시스템이 달러화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어 미국은 중국의 화폐 발행권, 더 나아가 중국의 경제 명맥까지 장악할 수 있게 되었다.

     

    셋째, 이런 방식으로 유추해 보면 유럽의 '마샬 계획' 및 다른 여러나라에 대한 경제 원조 계획을 통해 달러화 유통 범위를 크게 확대하고 전 세계적으로 자원 통합 능력을 크게 강화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달러화가 유통 범위를 끊임없이 확장하면서 향후 파운드화를 대체해 세계의 새로운 통화 맹주로 군림할 수 있었다.

     

    그러면 세계 각국이 앞다퉈 미국에게 대출을 원하게 되고, 달러화는 국제 준비 통화 및 결제 화폐로서의 지위를 확립하는 것이 가능하다.

     

    또 세계대전 종식 후 달러화를 마구 찍어내 매년 세계 각국에서 '세뇨리지'를 징수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리고 이는 지금까지 70년간이나 이어져 오고 있다.

     

    미국의 달러화 전략 제정자들은 똑똑하게도 달러화 보유고가 형식만 다른 세금의 일종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를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세계 각국이 꼼짝 못하고 대대손손 영원히 미국에 납부해야 하는 '슈퍼 세종'이 아니었을까, 미국이 적은 자본으로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이런 장사를 절대 마다할 리 없었다.

     

     

    산동 근거지, 물가 본위의 북해폐를 발행하다.

    항일 전쟁 승리 후인 1945년 8월에 한 미국 기자가 산동 근거지에서 팔로군 간부와 인터뷰를 가졌다.

     

    미국 기자: 산동 근거지 화폐는 금, 은이나 외화를 준비금으로 하지 않고 어떻게 화폐 가치와 물가를 안정시킬 수 있었는가? 이는 정말 믿기 어려운 기적이다.

     

    팔로군 간부: 우리 화폐는 '물가 본위' 화폐이다. 우리는 40%의 황금과 50%의 물자를 준비금으로 삼았다.

    (미국 기자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상대방을 바라봤다.)

     

    팔로군 간부: 예를 들어 화폐 1만 위안을 발행한다면 우리는 그중 5,000위안으로 식량, 목화, 무명, 땅콩 등 주요 물자를 구매, 비축했다. 물가가 상승할 경우에는 이 물자들을 풀어 시중의 화폐를 회수하고 물가 상승을 억제했다. 반대로 물가가 하락할 때에는 화폐를 증발해 시중의 물자를 매입했다. 우리가 준비금으로 삼은 이 생필품이야말로 먹을 수도, 입을 수도 없는 금보다 은보다 훨씬 낫다.

    (미국 기자는 한편으로는 필기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팔로군 간부: 지폐 본위제가 확립되면 통화량이 화폐가치를 결정한다. 다른 조건이 변하지 않고 통화량이 10배 증가하면 물가도 똑같이 10배 상승한다. 법폐와 위폐 가치가 폭락한 이유는 통화량이 급증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상대적으로 물가를 안정시킬 수 있었던 건 통화량을 적절히 조절했기 때문이다.

     

    미국 기자: 참으로 흥미로운 이론이다.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해 달라.

    (미국 기자는 팔로군 간부의 설명을 장장 4시간이나 듣고 나서 겨우 이 이치를 이해했다)

     

    미국 기자: 미국에서도 이와 같은 물자 본위제를 실시할 수 있는가?

     

    팔로군 간부: 미국은 세계 황금의 3분의 2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금본위제가 가장 적합하다.

     

    사실 위의 미국 기자의 진짜 신분은 경제학자였다.

    또 인터뷰에 응한 팔로군 간부는 쉐무차오였다.

     

    쉐무차오는 대대적인 조사와 연구 끝에 북해폐의 가치와 물가를 안정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법폐를 몰아내고 북해폐만 유통시키는 것이라는 입장을 정리했다.

     

    구체적으로는 북해폐로 법폐를 태환하고, 회수한 법폐로 적의 점령 지구에서 물자를 사재기한 다음 비축한 물자로 북해폐의 통화량을 조절해 북해폐의 가치와 물가를 안정시키는 방법이었다.

     

    근거지 정부는 물가가 상승할 때 미리 비축해 둔 물자를 풀어 시중의 화폐를 회수하고 물가를 떨어뜨렸다.

    쉐무차오는 산동 근거지가 농촌에 있는 관계로 계절별 화폐 발행량이 물가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객관적 법칙을 발견했다.

     

    즉 가을과 겨울에 화폐를 증발해 농산물을 대량 구매했다가 봄철에 그 농산물을 팔아 화폐를 흡수해야 1년 내내 물가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면직물 전쟁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이 천안문 성루에서 "중국 인민이 떨쳐 일어났다!"라고 장엄하게 선포했다.

    전국이 축제 분위기에 들떴으나 보름 후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상해와 천진을 시작으로 전국 물가가 급등하기 시작한 것이다.

    11월 물가는 7월 말 대비 두 배나 폭등했다.

    국민들은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기도 전에 살인적인 인플레이션 때문에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

     

    그러나 천윈은 물가를 안정시킬 방법을 알고 있었다.

    민심 안정의 관건은 식량 확보에 있으므로 정부가 주요 물자를 장악하면 물가를 안정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천윈은 투기 세력을 상대하기 위해 우선 투기꾼들보다 더 많은 물자를 사재기한 데 이어 금융 긴축 정책을 펼쳐 투기꾼들의 자금을 흡수했다.

     

    천윈은 과거 소비에트 국가은행의 핵심 요원이었던 차오쥐루를 심양에 파견해 식량 조달 사업을 진두지휘하도록 지시했다.

     

    천윈은 또 과거 소비에트의 무역국장을 역임한 첸즈광을 상해, 서안, 광주 등지에 파견해 각지의 면직물 재고량을 조사하도록 했다.

     

    더불어 투기 자금을 흡수하기 위해 징세, 공채 발행 등의 다양한 방법도 동원했다.

    인민은행은 또 실물 가격으로 환산한 저축 상품을 출시해 사회의 유휴 자금을 흡수했다.

     

    그러자 시중의 핫머니는 점점 줄어들었다.

    투기꾼들은 이 사실을 전혀 모른 채 고금리 급전을 빌려 식량과 면직물 사재기에 열을 올렸다.

     

    상해, 북경, 천진, 한구 등 대도시의 국영 무역회사들은 11월 20일 부터 잇달아 상품을 출고하기 시작했다.

    또 돈벌이 기회가 생겼다고 여긴 투기꾼들은 벌떼처럼 몰려들어 가격도 따지지 않고 물자가 나오는 족족 사들였다.

     

    이때 국영 무역회사들은 평상시와 달리 물자 가격을 점점 인상해 거의 암시장 가격 수준까지 올렸다.

    투기꾼들의 예상대로라면 잘 팔리는 상품은 가격이 하루에도 몇 번씩 오르기 때문에 높은 이자를 지불하고도 폭리를 취할 수 있었다.

     

    수중에 돈이 떨어지면 돈을 빌려서라도 계속 사들였다.

    은행이 대출해 주지 않자 사채에까지 손을 빌렸다.

    심지어 하루에 원금의 50%, 100%의 이자를 지불하면서 사채를 끌어 쓰는 사람도 있었다.

     

    11월 24일 시중의 물가가 7월 말로 2.2배로 뛰었다.

    이는 천윈이 목표로 한 물가 수준이었다.

    물가가 이 수준일때 국가가 확보한 물자와 시중의 통화량이 거의 맞먹었다.

     

    11월 25일부터 국영 무역회사들은 전국 각지에서 면사를 대규모로 출고하는 한편 끊임없이 가격을 낮췄다.

    투기꾼들은 처음에는 멋모르고 물자가 나오는 족족 사들였다.

     

    그러나 국영 회사들이 방대한 물량을 멈출 줄 모르고 공급하자 투기꾼들도 배겨낼 재간이 없었다.

    투기꾼들의 자금이 얼마 안 가서 바닥을 드러내고 말았다.

     

    투기꾼들은 이때야 비로소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다.

    이에 앞서 높은 가격으로 매점했던 면사들을 되팔기 시작했다.

    하지만 면사 가격이 걷잡을 수 없이 하락하면서 투기꾼들은 막대한 손해를 보았다.

     

    정부와 투기 세력이 10일 동안 공방전을 벌인 결과 식량, 목화 등 생필품 가격은 30~40%나 급락했다.

    3개월 후 벌어진 '식량전쟁'에서도 천윈은 똑같은 전략으로 최후의 발악을 하는 투기 세력에 치명타를 가했다.

    이로써 중국 대륙에서 10여 년 동안 기승을 부리던 하이퍼인플레이션이 드디어 잠잠해지고 물가도 점차 안정을 되찾았다.

     

     

    화폐 춘추 전국 시대의 도래

    하버드 대학의 니얼 퍼거슨 교수는 2009년 12월 <뉴스위크>에 실린 '위기에 선 제국'이라는 표지 기사에서 "역사적으로 보면 재정 수입의 20%를 채무 원리금 상환에 사용할 때, 그 국가는 심각한 재정 위기에 빠졌다고 봐도 무방하다"라고 지적했다.

     

    스페인은 1557~1696년에 과중한 채무 부담으로 인해 열네 번이나 디폴트 위기에 빠졌다.

    프랑스도 프랑스 대혁명을 앞둔 1788년에 재정 수입의 62%를 채무 원리금 상환에 지출했다.

     

    오스만 제국 역시 1875년 재정 수입의 50%를 채무 원리금 상환에 지출했고, 제2차 세계대전 전야의 영국도 재정 수입의 44%를 채무 원리금 상환에 썼다.

    한때 전 세계를 주름잡던 제국들은 마지막에 모두 과중한 채무에 의해 몰락했다.

     

    그렇다면 이들 제국의 채무 부담을 가중시킨 원인은 무엇일까?

    한마디로 부의 창조 능력 상실과 제국 유지 비용의 상승이었다.

     

    부를 너무 쉽게 얻으면 피땀 어린 노동을 통해 부를 창출하려는 열정이 줄어든다.

    국가의 거대한 부는 아이러니하게도 부의 창조 능력을 하락시키는 요인이 된다.

    이것이 역사에서 말하는 변증법이 아닐까?

     

    2035년에 이르면 미국 GDP 대비 국채 비율은 200%에 육박하게 될 것이다.

    이는 미국이 재정 수입의 46%로 채무 원리금을 상환해야 한다는 얘기가 된다.

    1939년의 영국과 똑같은 상황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주목할 점은 영국은 그때부터 국세가 기울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미국 부채 규모의 급증에 따라 달러의 몰락도 시간문제가 되고 있다.

     

    달러가 구제불능 상태에 이르면 뒤이어 화폐의 춘추전국 시대가 열릴 것이다.

    지금부터 2035년까지 4분의 1세기 동안 전 세계적인 화폐전쟁은 서서히 막을 올릴 것이다.

     

     

    은, 화폐 금속과 산업 금속의 임무를 모두 짊어지다

    고대 페니키아인들은 은이 살균력이라는 신기한 기능을 가졌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깨달았다.

    이에 그들은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 포도주를 은병에 담아 보관했다.

     

    고대 그리스 의사들은 은을 상처에 바르면 금방 낫고 질병 예방 효과도 있어서 일찌감치 약으로 이용했다.

    중국 고대의 군주들은 은 젓가락을 이용해 음식물에 독이 들어 있는지를 알아봤다는 내용은 역사책에 자주 등장한다.

     

    은은 모든 금속 중에서 가장 빛을 잘 반하고 연마성이 뛰어난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태양에너지를 모으는 집열판에 없어서는 안될 핵심 재료로 쓰이고 있다.

     

    또 은은 뛰어난 가속제여서 반도체 재료와 혼합되면 태양에너지에서 전기에너지로의 전환 효율을 12%나 향상시켜준다.

    전지는 향후 그린 환경보호 시대의 핵심 요소로, 은 전지는 기존의 리튬 전지를 대체할 최고의 후보이다.

     

     

    음모에 의해 가격이 계속 억눌리는 은의 운명

    "은 시장은 공급이 달린다. 그럼에도 은 가격이 수 년 동안 오르지 않고 있다. 도대체 이유가 무엇인가?"

    버틀러는 고객의 의문을 풀어주고 싶어 바로 은 선물 시장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훗날 그는 상품 선물 시장에서 오랫동안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시장에서 공매도로 거래되는 은의 수량이 현금으로 거래되는 은의 수량보다 훨씬 많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알고 보니 기관이나 기업들이 인위적으로 은 가격을 억제한 것이다.

    현재 세계의 은 시장에서 1온스 실물 은의 배후에는 100온스에 이르는 각종 호칭의 페이퍼 실버들이 있다!

     

    100배로 부풀려진 '실물 은은 수요와 공급 양면 모두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거래도 빈번하며 시장이 번성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거품으로 이루어진 '실물'은 '시장에서 가격은 합리적으로 나타난다.

    이것이 바로 저렴한 은의 가격이고, 얼핏 보기에 무궁무진한 은의 공급량이다.

     

    99%의 페이퍼 실버 거래량을 이용해 1%에 불과한 실물 은의 가격을 완벽히 통제하는 것은 그야말로 천재적인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99%의 페이퍼 실버를 소유한 사람들이 이를 실물 은으로 바꾸려 하지만 않는다면 이 게임은 아무런 염려도 할 필요가 없다.

     

    최종적으로 은의 가격을 결정하는 것은 국제 은행가들이 영원히 모자라지 않게 찍어내는 달러이지, 절대로 은의 실질적인 수요와 공급 관계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