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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화폐전쟁4

     

     

     

    공개 시장 조작

    FRB는 초창기에 어음 할인율 지정을 주요 수단으로 신용 환경을 통제했다.

    FRB를 구성하는 은행들은 은행인수어음을 할인하는 할인 창구를 통해 중앙은행으로부터 대출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대출 금리가 바로 할인율이었다.

     

    중앙은행이 할인율을 인상할 경우 이는 대출 비용의 상승을 의미했다.

    따라서 상업 은행들의 대출 의욕도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FRB의 이러한 수단은 1920년대 초부터 효력을 잃기 시작했다.

     

    유럽의 금이 미국으로 마구 유입되면서 뉴욕 은행들의 금 보유량이 급증했기 때문이다.

    금을 기반으로 은행이 직접 돈을 찍어냈기 때문에 시중의 통화량이 급증했다.

    따라서 중앙은행의 할인 창구를 통해 대출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뉴욕연방준비은행의 총재인 스트롱은 거듭 할인율을 강조했다.

    그러나 갈수록 범람하는 신용 대출의 홍수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마침내 스트롱은 통화 공급량을 더 효과적으로 조절하는 방법을 생각했다.

     

    중앙은행이 국채 및 유가증권 매매를 통해 금융 기관과 민간의 유동성을 통제하는 새로운 정책 수단을 고안한 것이다.

    즉 시중의 통화량이 너무 많을 경우 중앙은행이 국채를 매각해 시중 자금을 흡수하고, 반대로 부족한 경우에는 중앙은행이 시장에서 국채를 매입해 통화량을 늘리는 방법이었다.

     

    요컨대 오늘날 현대인에게 익숙한 '공개 시장 조작'이었다.

    스트롱이 고안한 공개 시장 조작 정책은 미국이 금 보유량에서 절대 우위를 차지하는 매우 유리한 조건을 이용해 금본위제를 뒤엎는 길을 닦아주었다.

     

    한편, 대서양 건너편에 있는 영국에서도 스트롱의 화폐 제도 혁신에 큰 관심을 갖고 면밀히 주시하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노련한 경제학자 존 케인스였다.

    케인스는 예리한 통찰력으로 금본위제뿐만 아니라 영국의 금융 패권 지위까지 모두 위험에 처해 있는 현실을 간파했다.

     

    그는 1922년부터 끊임없이 경고 메시지를 보냈다.

    이어 1923년 출판한 <화폐개혁론>에서 "물질적인 부를 토대로 '달러본위제'가 머리를 쳐들고 있다.

    미국은 지난 2년 동안 겉으로는 금본위제를 수호하기 위해 노력하는 듯했으나 사실은 달러본위제를 구축하고 있었다"고 지적했다.

     

    케인스는 한마디로 미국이 "금을 끼고 제후들을 호령하려 한다"로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미국은 4대 경제 대국 금 보유량의 75%를 보유하고 있다.

    다른 국가는 금이 부족해서 화폐가 제 기능을 못하고 있는데, 미국은 공개 시장 조작을 통해 금의 역활을 제약하고 달러화를 앞세워 독단적인 역할을 하도록 만들고 있다.

    미국이 금본위제를 수호하는 진짜 목적은 따로 있다.

    바로 영국을 비롯한 유럽 국가들의 화폐 시스템이 FRB의 지휘에 따라 움직이고 최종적으로 달러화의 "노예"가 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계속 이대로 나간다면 영국은 조만간 미국 월스트리트에 세계 금융 패권 지위를 빼앗기고 말 것이다."

     

    케이스는 이처럼 금본위제를 강력하게 비판하면서 영국의 운명에 대한 걱정도 털어놓았다.

    달러화와 파운드화 사이에 준비통화를 둘러싼 전면전이 벌어진 것은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사실 미국은 이미 파운드화의 결제통화 지위를 빼앗기 위한 측면 공격도 개시한 상태였다.

     

     

    달러화의 측면 공격, 파운드화의 결제통화 지위에 도전하다.

    영국의 상업어음 시장은 일찍이 형성됐다.

    그 규모도 상당히 컸다.

    다른 국가에 비해 원가와 신용 우위도 뚜렷했다.

    그 때문에 파운드화는 국제 결제통화라는 위치를 굳건히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인해 이 같은 구도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유럽 주요 국가의 공업과 농업 시스템은 전쟁 때문에 심각하게 파괴되었다.

    따라서 이들 국가의 미국 공산품과 농산물 수요가 급격히 증가했다.

    더불어 전쟁 수요로 인해 유럽 각 교전국의 금융 자본은 대대적으로 군수 산업에 집중되었다.

     

    무역 신용은 갈수록 떨어졌다.

    그 결과 유럽 각국은 상업어음을 할인하기 위해 자금이 비교적 충분한 뉴욕 시장으로 몰려들었다.

    이때부터 달러화 표시 상업어음이 금융 시장에 등장했다.

     

    천문학적인 전쟁 비용 때문에 1915년 이후부터 파운드화 가치가 마구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에 반해 엄청난 금 보유량을 담보로 한 달러화는 점점 안정되어 갔다.

    화폐 가치의 변동을 극도로 싫어하는 무역상들은 점차 파운드화 대신 달러화를 결제통화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능력 있는 사람이 제정한 계획은 '이상'이다.

    반면 능력 부족한 사람이 세운 계획은 '꿈'이다. 또 아무런 능력도 없는 사람이 세운 계획은 그냥 '환상'일 뿐이다.

    노먼 잉글랜드은행 총재는 이상과 꿈 그리고 환상의 차이점을 잘 몰랐던 것이 분명하다.

     

    파운드화의 패권적 지위를 되찾는 것이 그의 '꿈'이었다면 금본위제 회복을 통해 이 꿈을 실현하겠다는 생각은 실현 가능성이 전혀 없는 '환상'에 불과했다.

     

    선견지명이 있는 케인스는 금본위제의 위험성을 거듭 언급하며 영국 정부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러나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케이스는 미국의 금 보유량이 압도적 우세를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파운드화를 금과 연계하는 것은 파운드화를 달러화의 '노예'로 만드는 길이라고 우려했다.

     

    나아가 최종적으로는 월스트리트 은행가들이 영국 경제를 지배하는 최악의 국면을 형성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케이스의 우려는 현실이 됐다.

    노먼이 미국의 '쇼크 요법'을 받아들인 후 영국 경제는 15년 동안 계속 쇼크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구미 경제가 급성장한 1924~1929년에도 영국 경제는 부진했다.

    1929년부터 10년 넘게 지속된 대공황 기간에는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1925년 영국이 겨우 금본위제를 회복한 후 파운드화와 달러화는 모두 금과의 자유 태환이 가능해졌다.

     

    이때부터 이 두 화폐는 '경화'라 불리면서 세계의 중심 화폐 역할을 했다.

    다른 국가들은 파운드화와 달러화를 준비통화로 보유하고, 이를 담보로 자국 화폐를 발행했다.

    이런 나라들은 자연히 영국과 미국의 '화폐 위성 국가'로 전락했다.

     

     

    나락으로 떨어진 경제와 금권의 공백

    케인스가 "제삼자의 눈이 더 밝다"면서 상당히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프랑화의 (환율)수준은 투기자, 무역 수지 균형 또는 루르 지역에서의 군사적 행동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프랑스 납세자들이 자신의 소득 중 얼마를 꺼내 금리 생활자(채권 보유자)에게 지불하고자 하느냐에 따라 프랑화의 환율 수준이 결정되는 것이다."

     

    달러본위제의 전제 조건은 각국의 달러화에 대한 수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달러화 수요를 창출하는 가장 중요한 방식은 미국이 유럽 각국에 전쟁 채무 상환을 촉구하는 것이었다.

    미국은 애초 유럽의 전쟁 채무 액수를 200억 달러로 책정했다.

    이는 전 세계 금 보유량을 다 합친 것보다도 훨씬 많은 액수였다.

     

    유럽이 달러화 채무를 영원히 상환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 그래서 미국 국채가 향후 각국의 화폐 시스템에 뿌리를 내리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미국의 목적이자 달러화 전략의 핵심이었다.

     

    미국은 첫해에 운전 자금 명목으로 2억 달러를 제공해 영국 파운드의 독일 준비통화 지위를 일거에 빼앗았다.

    그뿐만 아니라 독일의 화폐와 금융을 지배하는 '태상황'자리에 너무나 쉽게 올라앉았다.

     

    미국의 계획은 마치 '영원히 굴러가는 기관차'처럼 완전무결해 보였다.

    사람들은 미국 은행가들이 전 세계에 대출을 제공하는 한 세계경제는 지속적인 번영을 누릴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돈을 빌린 국가들이 실제로는 아무런 채무 상환 능력도 없다는 사실을 염두해 두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1920년대에 유행한 이른바 '서브프라임모기지'게임이다.

     

    1929년 1차 위기가 발생한 후, 세계 경제는 짧은 '침묵의 시기'에 진입했다.

    겉보기에는 잠시 안정을 찾은 듯도 했다. 하지만 그 속에는 더 큰 위기가 잠재되어 있었다.

     

    1931년 5월 오스트리아 최대 은행의 파산을 시작으로 드디어 대공황의 폭탄이 터졌다.

    독일의 은행에서는 예금을 인출하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잇따라 영국이 금본위제 철폐를 선포했다.

    프랑스 역시 경기 침체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위기는 일본, 이탈리아, 중유럽, 남미 및 영연방 국가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1914년부터 1933년까지 달러화로 파운드화의 화폐 패권을 대체하려던 미국의 첫 번째 시도는 이로써 실패로 끝났다.

    달러화는 파운드화의 글로벌 패권 지위를 무너뜨리는 데는 성공했으나 새로운 통화 패권 지위를 확립하는 데는 실패했다.

     

    대공황 발발 후 각국의 달러화 채무 상환이 중단되면서 유럽에서의 달러화 영향력도 크게 하락했다.

    더불어 국제 무역 사슬의 단절과 함께 결제통화로서 달러화의 위상도 크게 흔들렸다.

    미국은 '금을 끼고 각국을 호령하는' 목적은 달성했지만 영국이 금본위제를 폐지함으로써 이 또한 아무런 소용도 없게 되었다.

     

    달러화가 파운드화의 통화 패권 지위를 빼앗은 직후 양대 화폐 간의 대치 및 할거 국면이 형성되었다.

    또 영국이 금본위제를 폐지하자 각 대륙에 분포한 영연방 국가들을 비롯해 북유럽의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핀라드, 남유럽의 포르투갈, 그리고 아프리카의 이집트, 아시아의 일본 그리고 영국의 중요한 무역 파트너인 남미 국가들도 잇따라 영국을 본받아 자국 화폐와 금과의 연결 고리를 끊어버렸다.

     

    이른바 거대한 '파운드 블록'을 형성한 이들 국가는 더 이상 미국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

    금이나 달러 대신 파운드화에 의존하며 블록 내부에서 강력한 무역 시스템을 구축했다.

     

    '파운드블록'은 여전히 세계의 원자재와 에너지 공급을 통제하고, 세계 무역 시장에서 압도적 점유율을 차지했다.

    이때에 이르러서야 미국은 비로소 달러화가 파운드화를 포위한 것이 아니라 파운드화가 달러화를 포위하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영국 파운드는 금본제에서 이탈한 이후 더욱 큰 자유와 힘을 얻었다.

    이로써 미국의 원대한 야망은 큰 좌절을 경험했다.

    그리고 마침내 강대한 '파운드 블록' 체제를 무너뜨리지 않는 한 달러화가 세계 기축 통화로 군림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파운드 블록'을 무너뜨린 최후의 일격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은 케이스를 미국에 파견해 전후 자금 지원 문제를 협상하도록 했다.

    그러나 파운드 블록의 생사존망과 관련한 이 중대한 문제에서 케인스는 잘못된 판단을 했다.

    이로 인해 영국은 미국의 올가미에 걸려들었다.

    급기야 200년 동안 장악해 온 화폐의 패권을 고스란히 미국에 넘겨주고 말았다.

     

    당시 미국은 케인스에게 영국의 재정 적자 보충에 필요한 자금 37억 5,000만 달러를 지원하겠다고 제안했다.

    당연히 조건이 있었다.

    영국 정부가 1947년 7월 15일까지 파운드화를 다른 통화와 교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권모술수에 능하지 못한 케인스는 결국 미국의 꾐에 빠져 그 요구를 수락하고 말았다.

     

    케인스는 귀국하자마자 비판에 직면했다.

    경제 전문지 <이코노미스트>는 케인스의 협상 내용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 나라에는 '영국과 영국이 대표하는 모든 것이 소멸시키는 것이 미국 정부의 계획적이고 의도적인 목적'이라는 공산주의자들의 이론을 믿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러나 지금 상황을 보면 공산주의자들이 예측한 대로 흘러가는 것이 확실한다.

    미국이 원조를 제공할 때마다 매번 부가 조건을 덧붙이니 영국은 필연적으로 올가미에서 빠져나갈 수 없게 될 것이다.

    영국으로서는 부득불 더 많은 원조를 요구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원조를 얻는 대가로 스스로 자국의 가치를 깎아내리고, 그로 인해 국력은 약화될 수밖에 없다."

     

    과연 1947년 7월 15일 파운드화 패권은 완전히 붕괴하고 말았다.

    영국은 전후에 파운드 블록을 바탕 삼아 제기하려는 욕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은 영국이 다시 일어설 기회를 원천적으로 봉쇄했다.

     

    독일이 일으킨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도 끄떡하지 않던 강대한 영국의 파운드화 패권은 이로써 고작 37억 5,000만 달러의 대출 때문에 미국에 강탈당하고 말았다.

     

     

    러시아 루블과 신경제 정책

    1921년 소비에트연방은 드디어 결정적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국내 경제의 형세는 심각하기 이를 데 없었다.

    무엇보다 물자가 부족하고 국민은 기아에 허덕였다.

    루블은 휴지 조각이 되었다.

     

    미국의 해머 박사는 주의 소식통으로부터 가장 먼저 소련의 상황에 대해 들었다.

    그리고 급기야 23세의 젊은 나이에 온갖 고생을 겪으면서 모스크바로 향했다.

    그의 눈에 비친 러시아는 생지옥이나 다름없었다.

     

    우랄 지역은 자연 자원이 대단히 풍부한 곳이었다.

    해머 역시 현지 창고에 백금, 보석, 모피, 양질의 석면광 등 귀중한 자원이 대량 쌓여 있는 것을 두 눈으로 직접 목격했다.

    그런데 이렇게 거대한 '보물창고'를 옆에 둔 채 사람들이 기근에 허덕인단 말인가?

     

    그는 소비에트 정부에 다음과 같이 제안했다.

    "미국에 있는 회사에 부탁해 100만 달러 상당의 식량을 주도록 하겠소.

    그 대가로 이곳 특산물을 미국에 가져다 팔 수 있게 해주시오."

    현지 정부는 심각한 식량난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던 터라 해머의 제안을 즉각 수락했다.

     

    이처럼 중요한 때 툭 털면 먼지밖에 나지 않는 소비에트 정권이 뜻하지 않게 떼돈을 벌 기회가 생겼다.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10월 혁명 이후 시베리아에 진을 치고 있던 러시아 황제의 군대는 해군 대장 알렉산드르 콜차크의 지휘 아래 있었다.

    이 콜차크의 반혁명 정부군은 곧 모스크바로 진군했다.

    이들의 초창기 기세는 놀라웠다.

     

    차르 정부의 중앙은행 국고가 있는 카잔을 기세등등하게 함락한 다음 무려 8,000만 파운드 가치에 달하는 어머어마한 양의 황금을 약탈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잇따른 모스크바 전투에서 대패하자 이들은 약탈한 황금을 갖고 시베리아 철도를 따라 동쪽으로 도주했다.

     

    한겨울의 시베리아 혹한에 사기가 크게 떨어진 반혁명군이 이르쿠츠크에 이르렀을 때였다.

    급기야 내란이 일어났다.

     

    당시 반란군 중에는 중유럽 출신 용병이 많았다.

    이들은 당연히 살아서 조국으로 돌아가겠다는 인간적 욕심을 갖고 있었다.

    또한 소비에트 정부와 협상을 개시하는 것이 자신들의 목숨을 부지하는 가장 확실한 선택이라고 믿었다.

     

    이들은 소비에트 정부에 제시한 조건은 단순했다.

    콜차크와 황금을 소비에트 정부에 넘겨주는 대가로 자신들을 블라디보스토크를 통해 안전하게 유럽으로 보내달라는 것이었다.

     

    궁핍하기 이를 데 없던 소비에트 정부는 졸지에 약 5,000만 파운드의 황금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당시 금 1파운드는 은 10냥에 상당했다.

    따라서 5,000만 파운드의 금을 은으로 환산하면 거의 5억 냥에 달했다.

     

    과거 일본은 청일전쟁 당시 중국으로부터 2억 3,000만 냥의 은을 갈취한 후 그중 일부를 영국을 통해 금으로 태환한 적이 있었다.

    또한 이를 계기로 국내에서 금본위제를 성공적으로 확립할 수 있었다.

     

    소비에트 정부는 이렇게 얻은 황금을 기축통화로 삼았다.

    그리고 곧 화폐 개혁을 단행해 루블화 시스템을 성공적으로 안정시킬 수 있었다.

     

     

    스탈린의 '빠른 산업화' 발전 모델

    소련은 최종적으로 스탈린의 '빠른 산업화' 발전 모델을 채택했다.

    스탈린은 10년 안에 서방 선진 공업국을 따라잡는다는 목표를 세웠다.

    주목할 점은 완전히 자국의 자원에만 의존해 이뤘다는 사실이 아닐까 싶다.

     

    소련처럼 짧은 기간에 대규모 산업화를 이룩한 국가는 세계 경제사에 유례가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그러나 소련의 놀랄 만큼 빠른 산업화 이면에는 엄청난 우환이 잠재되어 있었다.

     

    경제가 발전하려면 자본 축척이 필요한데, 소련은 외국에서 돈을 빌릴 수 없었다.

    자본 축적의 유일한 경로는 오로지 국가 경제의 주요 부분을 차지하는 농업이었다.

    실제로 빠른 산업화 전략의 필요에 따라 소련 경제 당국은 농민에게서 대량의 노동력과 식량을 빼앗았다.

     

    1923~1927년 공산품 가격이 농산물 가격을 훨씬 초과하자 농민은 국가에 곡식을 파는 것을 거부했다.

    스탈린은 농민의 토지 및 생산 도구와 가축 소유권을 공동화하는 집단농장과 국영농장 방식을 강제 도입하기로 전격 결정했다.

     

    농민의 적극적인 생산의지에 큰 타격을 입힌 소련은 식량수입국으로 전략했다.

    제정러시아 때만해도 식량을 수출하던 나라가 졸지에 식량 수입수입국으로 전락한 것이다.

     

    이러한 식량 위기는 점차 물자 부족을 비롯해 특권 계급 발생, 민중의 불만 초래, 무역 수지 불균형, 경제 붕괴 등 일련의 더욱 심각한 위기로 이어졌다.

     

     

    라팔로 조약

    1922년 제노바에서 경제 회의가 열렸다.

    주류에 끼지 못하고 찬밥 신세가 된 독일과 소련 양국은 회의 기간에 이른바 '라팔로 조약'을 체결했다.

    조약의 내용은 상호 간의 외채와 배상을 상쇄하고, 소련 정부를 정식 승인함으로써 국교를 재개하고, 양국 경제의 동맹을 체결하는 등의 조항도 있었다.

     

    당시 독일은 영국, 프랑스, 폴란드로부터 갖은 억압을 받고 있었다.

    그 때문에 소련과 우호 관계를 수립할 경우, 무역을 통해 상호 이익을 누릴 수 있었다.

    또 폴란드 및 영국과 프랑스의 정치적, 군사적 압박을 크게 약화시킬 수 있었다.

     

    이 독소 간 군사 교류와 산업 협력을 적극 추진해 성사시킨 인물은 후세 사람들이 '독일 국방국의 아버지'로 일컫는 한스 폰 제크트 장군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독일군의 정신적 지도자 역할을 한 인물이다.

    훗날 육군 통수부 장관에 올라 독일 최강 전투력의 상징인 참모 본부의 기능을 회복시킨 인물이기도 하다.

     

    비록 10만 명으로 제한된 병력이었지만 그들 모두에게 간부 교육을 실시해 지휘 및 통솔 능력을 길러주기도 했다.

    향후 전쟁이 터질 경우 이 10만 명 모두가 장군 및 지휘관이 되어 일거에 100만 대군 못지않은 전력을 확중할 수 있도록 인적 기초를 닦아놓은 것이다.

     

     

    루블 제국의 팽창 야심

    소련은 중동 지역의 '파운드 블록'에서도 '루블화 외교'를 적극 추진했다.

    1956년 수에즈 운하 분쟁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이집트 경내에 있던 영국과 프랑스 세력은 미국과 유엔군에 의해 큰 타격을 입었다.

     

    그런데 미국이 영국과 프랑스 세력을 제거하고 이집트에 달러를 투입하기 전에 소련이 재빨리 행동을 개시했다.

    1958년 이집트, 시리아, 예멘에 루블 자금을 성공적으로 침투시킨 것이다.

     

    우선 이집트 사막에 현대적인 시추 시설을 건설해 석유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석유 정제 공장 건설 계획도 적극적으로 밀어붙였다.

    소련은 또 이집트를 루블 블럭에 경제적으로 예속시키기 위해 통큰 조치를 시행했다. 이집트의 주요 수출 품목인 목화를 소련 시장에 마음대로 팔도록 허용한 것이다.

     

    이 무렵 이집트는 서방 각국에 의해 목화 수출을 금지당하고 있었다.

    따라서 소련의 도움이 이집트로선 고맙기 그지 없었다.

    소련의 원조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얼마 후에는 이집트에 절대적으로 부족한 식량과 연류유를 대량 지원했다.

    이집트 입장에서는 전혀 손해 볼 것이 없었다.

    소련으로부터 선진 기술과 부족 물자를 얻고 수출 시장을 확보했을 뿐 아니라 덤으로 정치적, 군사적 보호도 받게 되었으니 말이다.

     

    반면, 미국은 계속 패착을 두고 있었다.

    미국은 1958년 동제품의 수입에 대해 고율의 관세를 부여할 것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결정을 내렸다.

    동은 칠레의 대외 무역에서 생명줄 역할을 하는 중요한 품목이었다.

     

    칠레의 대외 무역은 심각한 위기를 빠져들었다. 바로 이때 소련과 동독이 구세주처럼 나타났다.

    양국은 칠레산 동 제품을 대량 수입하면서 향후 더 큰 거래를 기대해도 좋다는 암시를 주었다.

    이 전략은 아르헨티나에서도 유효했다.

     

    당시 아르헨티나는 1500만 배럴의 석유가 시급히 필요했다.

    그러나 주머니 사정이 너무 빤했다.

    아르헨티나가 쩔쩔매고 있을 때 소련이 '백마 탄 왕자'처럼 나타나 국제 시장보다 낮은 가격에 석유를 제공했다.

     

    더구나 현금이 없으면 원자재로 대금을 지급해도 좋다고 했다.

    원자재 판로를 찾지 못해 고민하던 아르헨티나에 소련은 완전히 '구세주' 같은 존재였다.

     

    이 무렵 아르헨티나의 이웃 우루과이 경제 역시 파산 지경에 이르렀다.

    우루과이의 주요 수출품은 양모인데 최대 수입국 미국이 긴급 수입 제한 조치를 취했다.

    이때 기다렸다는 듯 소련이 등장했다.

     

    소련은 먼저 우루과이 양모를 1,800만 달러어치나 구매했다.

    그것도 루블이 아닌 국제통화 통용 화폐인 파운드로 대금을 지불했다.

    이어 우루과이에 125만 배럴의 원유를 수출해 급한 불을 꺼주었다.

     

    원유 역시 국제시장가보다 훨씬 낮은 가격이었다.

    우루과이 정부 이하 전 국민이 소련을 '대국답게 의리가 강한 국가'라고 찬양하면서 환호한 것은 어쩌며 당연한 일이었다.

     

    이어 브라질에서도 비슷한 일이 연출되었다.

    칠레의 동 제품, 우루과이의 양모와 마찬가지로 커피의 가격 책정 권한 역시 미국이 쥐고 있어 미국은 중남미 국가의 대통령이 자기 말을 듣지 않으면 가차 없이 경제적 수단을 동원해 응징할 수 있었다.

     

    소련은 머뭇거리지 않았다.

    브라질에 즉각 석유를 공급하고, 커피, 코코아, 목화 및 원자재를 수입하면서 브라질 경제를 곤경에서 구해준 것이다.

    이때까지 브라질과 소련은 공식 수교도 맺지 않은 상태였다.

     

    소련은 드디어 경제 원조와 루블 외교를 '대량 살상 무기' 삼아 달러화 제국과 대체 국면을 형성할 수 있게 되었다.

     

     

    소련을 나락으로 몰고 간 피크오일

    소련은 예로부터 석유와 금의 주요 생산국이었다.

    1960년 소련은 우연히 시베리아에서 대형 유전을 발견했다.

     

    1970년대 전반 내내 시베리아에서는 석유가 샘솟듯 솟아나왔다.

    소련의 국고에도 돈이 차곡차곡 쌓였다.

     

    1970년대는 루블과 달러가 마지막으로 막상막하의 대결을 벌인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당시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 등의 산유국을 단단히 장악한 다음, 오일달러를 앞세운 기본 정책을 채택했다.

    이어 고금리 정책을 통해 인플레이션과 달러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1977년 3월 미국 중앙정보국은 정부에 <소련이 석유 고갈 위기에 처했다>라는 제목의 비밀 보고서를 제출했다.

    "소련의 피크오일은 1980년대 초에 다가올 것이다.

    다음 10년 동안 소련의 석유 생산량은 동구권 및 서방 국가에 지금과 같은 규모로 수출할 수 없을 만큼 줄어들 것이다.

    또 석유를 공급하기 위해 석유수출국기구 회원국과 경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소련의 석유 수출이 외환 수입의 40% 이상에 달하는 현재 상황이 역전될 것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피크오일'은 미국의 지질학자 킹 허버트가 1949년 도입한 개념으로, 광물 자원의 생산량이 '종모양의 곡선'을 따라 움직인다고 주장한 데에서 비롯됐다.

     

    허버트는 이 이론을 통해 재생 불능 자원인 석유의 생산량은 기하급수적으로 확대됐다가 특정 시기를 정점으로 불가피하게 줄어들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실제로 1956년 미국의 석유 생산량이 1967~1971년 피크오일에 이르고, 이후부터 감소할 것이라는 대담한 예측을 내놓기도 했다.

     

    이처럼 1970년대 초 미국에 피크오일이 일어나자 중동 산유국들이 실시한 두 차례의 석유 수출 금지 조치는 미국 경제에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어마어마한 타격을 입혔다.

     

    미국이 그 어느 나라보다 탄력적이고 유연한 시장 경제 국가임에도 그랬다.

    따라서 패쇄적이고 경직된 계획 경제 국가인 소련에 석유 부족 사태가 발생하면 그 충격이 엄청날 게 분명했다.

    더구나 소련은 석유를 수출해 식량을 수입하는 상황이었다.

     

    1985년부터 소련의 석유 채굴량이 처음으로 하락하기 시작했다.

    피크오일의 조짐이 보이자 사우디아라비아는 미국과 상의해 석유 생산량을 두 배 늘린다는 폭탄선언을 했다.

    이에 국제 유가는 대폭락했다.

     

    소련의 석유 수출수익이 급감하면서 동구권 국가들이 소련에서 더 이상 석유 원조를 받을 수 없게 되자 직격탄을 맞았다.

    소련 정권은 외채 부담이 가중되고 재정 적자가 악화되자 고립무원의 처지로 전략하는 등 잇따른 내우외환으로 급기야 국가의 존망이 위태한 지경에 빠졌다.

     

    주변 위성국가들은 경쟁적으로 소련의 품을 떠나 서방 국가에 찰싹 달라붙었다.

    이런 경제 위기 속에서 단행한 정치 개혁은 오히려 활활 타는 불에 부채질을 하는 격이 되었다.

     

    소비에트연방의 각 공화국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독립을 주장하고 나섰다.

    그리하여 소비에트 국내 시장은 마비 상태에 빠졌고, 최종적으로 경제 붕괴에 직면하고 말았다.

     

     

    유럽석탄철강공동체

    독일에 대한 프랑스의 악감정은 1870년 이후부터 시작됐다.

    이때부터 70여 년 동안 독일은 세 번이나 프랑스를 침략했다.

    또 그때마다 프랑스는 자국만의 힘으로 독일을 물리치지 못했다.

     

    사실 프랑스는 독일보다 먼저 산업혁명을 시작한 국가였지만, 빈번한 혁명과 전쟁으로 후발 주자 독일이 신흥 산업 대국으로 부상했다.

     

    어쩌면 성격이 치밀하고 기계적인 데다 융통성이 없는 독일인이 로맨틱하고 자유분방한 프랑스인보다 엄밀하고 복잡하면서도 정확한 작업을 요하는 산업을 발전시키는 데 더 적합했는지도 모른다.

     

    프랑스는 '모겐소 플랜'을 절대적으로 지지했다.

    그 계획인 입안되자마다 곧바로 독일 산업을 재기 불능의 상태로 만드는데 힘을 아끼지 않았다.

    심지어 직접 행동을 개시하기도 했다.

    자르와 루르 지역을 점령한 것이다.

     

    그러나 냉전 분위기가 두드러지면서 미국의 전략이 갑자기 바뀌기 시작했다.

    점차 독일을 도와주는 방향으로 선회하는 것이다.

    반면, 프랑스는 점점 미국의 눈 밖에 나기 시작했다.

     

    특히 프랑스 국내에서 성행한 '드골주의'가 영국과 미국의 큰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드골주의'의 핵심은 간단했다.

    "내 운명은 내가 지배한다"는 것이었다.

     

    1950년 5월 9일 프랑스 외무장관 로베트 쉬망은 역사적인 기자회견을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프랑스와 서독의 석탄철강 산업을 초국가적 기구 아래 통합해 공동 관리할 것을 제안했다.

     

    또 자원 공유를 통해 공동 발전을 실현할 것과 초국가주의에 동의하는 모든 유럽 국가들에게 이 기구에 가입할 것을 제안했다.

    이것이 바로 '쉬망 플랜'으로 훗날 유럽석탄철강공동체의 탄생의 배경이다.

     

    한마디로, 중요한 전쟁 물자인 석탄과 철강 산업을 초국가적 기구에 맡겨 관리하게 함으로써 프랑스와 서독이 전쟁을 일으킬 생각도, 능력도 없게 만들자는 것이 쉬망 플랜의 목적이었다.

     

    '쉬망 플랜'은 미국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었다.

    프랑스와 서독이 화해해 소련을 '공공의 적'으로 삼고 유럽에서의 전쟁 재발을 방지하게 된 것이 미국의 마음에 들었다.

     

    유럽석탄철강공동체가 없었다면 아마 오늘날의 유럽연합과 유로화도 없었을 것이다.

    유럽연합이 '쉬망 플랜'을 발표한 5월 9일을 '유러피언 데이'로 지정한 것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사실 '쉬망 플랜'은 쉬망의 작품이 아니라 '유럽 통합의 아버지'라 일컫는 경제학자 장 모네였다.

     

     

    금융의 신대륙, 유로달러

    유로달러는 원래 유럽에 유입되어 어느 나라의 통제도 받지 않고 예금 및 대출이 국경을 넘어 자유롭게 이뤄지던 달러 자금을 지칭하는 용어였다.

     

    나중에는 소련과 중동 국가들이 유럽의 은행에 맡긴 오일달러 역시 유러달러의 꽤 중요한 부분을 구성했다.

    더 나중에는 미국 이외의 은행, 주로 유럽의 은행에 예입한 달러 자금을 모두 통틀러 '유로달러'라고 불렀다.

     

    유럽에서 달러 공급 과잉 현상이 나타나자 지그문트의 머릿속에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유럽 기업이 대체 무엇 때문에 굳이 미국 뉴욕까지 가서 자본을 빌려와야 하는가?

    눈앞에 넘쳐나는 유로달러를 이용하면 되는 것 아닌가?

    내가 이 일을 못할 이유가 없다."

     

    유럽공동체가 유럽통화동맹 결성에 온 신경을 기울일 때 지그문트는 유럽 자본 시장의 통합 방안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지그문트는 잉글랜드은행을 설득하기 위해 회유와 협박을 동원했다.

     

    "이것은 그냥 단순한 달러화 채권일 뿐이다.

    그 어떤 통화 선물 옵션도 포함하지 않는다.

    영국 입장에서는 일종의 외화 채권이다.

    영국인들은 추가 비용을 지불해야 이 채권을 매입할 수 있다.

    따라서 영국 자국민들은 이 채권에 흥미를 갖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채권의 기본 가격은 런던 시장에서 결정되기 때문에 구매자들은 다른 국가의 시장보다 런던 시장을 더 많이 이용할 것이다."

     

    유로달러는 마침내 미국 국채 외에 새로운 거대한 투자 공간을 찾을 수 있었다.

    유로달러채 발행은 유럽이 미국 국채의 저수익 '함정'에 빠지지 않고 미국 재정 적자의 '희생양'도 되지 않으면서 달러 자산을 이용해 자체적인 힘을 키우게 된 좋은 계기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맥아더의 '토지 개혁'과 조지프 도지의 '도지 플랜'

    맥아더가 일본에서 발동한 토지 개혁은 정부가 강제로 지주의 농경지를 인수한 다음 평균 가격에 소작농에게 매각하는 것이 골자였다.

     

    이는 일본 국민이 가장 기대했던 개혁이기도 했다.

    농민은 이제 농산물 시장에서 고가에 곡물을 팔아 부를 축적하는 것이 가능했다.

     

    일본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던 농민은 이후 20년 동안 전체 인구의 3분의 1로 감소했다.

    그러나 농업 생산량은 오히려 두 배로 증가했다.

    이 사실로 미뤄볼 때 토지 개혁이 농업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 알 수 있다.

     

    1948년 말 독일의 '6월 마르크 개혁'에 동참한 경험이 있는 미국 디트로이트은행의 은행장 조지프 도지가 도쿄를 방문했다.

    그는 현장에서 바로 일본의 악성 인플레이션을 체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대장성 관료 이케다 하야토는 도지와 만난 자리에서 침을 튀기며 말했다.

    "산업 생산이 얼마나 빠르게 회복되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도 놀랄 정도입니다."

     

    도지는 이케다가 엉뚱한 자랑을 하자 단도직입적으로 핀잔을 퍼부었다.

    "생산지수 제고와 수출 증대를 과시하는 것은 아둔하기 그지없는 행위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일본이 이룩한 경제 성장은 미국의 원조금과 보조금에 따른 것입니다.

    이는 재정적자의 증가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케다가 머쓱해졌다.

    그러자 도지는 일본 경제의 현주소를 은유적으로 설명하면서 동시에 해결책을 제시했다.

     

    "당면한 일본 경제는 죽마와 흡사합니다.

    이 죽마의 한쪽 다리는 미국의 원조를 의미합니다.

    다른 한쪽 다리는 일본의 자금 보조 기관에 해당합니다.

    죽마의 다리가 너무 길면 쉽게 넘어집니다.

    그뿐만 아니라 목이 부러지는 치명상을 입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 당장 지나치게 긴 죽마의 다리를 잘라야 합니다."

     

    1948년 12월 18일 미 정령군 총사령부는 일본 정부에 사전 통보 없이 자신들 명의로 일본 경제 자립을 위한 '경제 안정 9개 원칙'을 발표했다.

     

    주요 내용은 균형 예산, 신용 대출 규제 강화, 세제 개혁, 단일 환율 제도 실시, 임금 안정, 물가 통제, 수출 증진, 식량 공출 등이었다.

    이것이 바로 '도지 플랜"이다.

     

     

    식량 수출로 인한 미국의 착오

    미국은1993년 '농업조정법'을 출범한 이후부터 농장주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해마다 농가에 정부 보조금을 지급했다.

    고가에 대량의 농산품도 구입했다.

    이 농산품은 대부분 해외 원조에 쓰였다.

     

    소련에 흉작이 들었을 때 마침 미국에서는 농산물 과잉 현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양국은 즉시 농산물 매매 합의를 하기에 이르렀다.

     

    1972년 흉작은 소련 정부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심각했다.

    소련은 그해 여름에만 미국 농산물을 10억 달러어치나 구매했다.

    그중 밀 구매량은 미국 밀 생산량의 4분의 1에 달했다.

     

    미국은 애초부터 얄팍한 속셈을 갖고 있었다.

    외환보유고가 많지 않은 소련이 식량을 대량 수입하려면 1960년대처럼 금을 팔아야만 할 것이라고 지레 생각했던 것이다.

    소련의 금이 시장에 풀리면 국제 금 가격은 필연적으로 폭락할 수밖에 없다.

     

    이럴 경우 미국 달러의 가치가 크게 상승할 개연성이 다분했다.

    따라서 소련이 식량을 많이 수입하면 할수록 미국에서는 이득일 터였다.

     

    그러나 소련의 농산물 수입량은 미국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이에 따라 미국 국내 시장이 큰 충격을 받는 예기치 못한 상황이 벌어졌다.

    미국 국내의 식량 가격이 폭등한 것이다.

     

    물가지수 역시 상승했다.

    전혀 예상 못한 인플레이션이 미국 전역을 휩쓸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것은 약과였다.

     

    미국인들은 곧이어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았다.

    소련이 미국의 기대대로 금을 처분한 게 아니라 유로달러 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했기 때문이다.

     

    이때 유럽은 심각한 달러 유동성 과잉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이런 마당에 소련이 돈을 빌려달라고 하니 이게 웬 떡이냐 싶었다.

     

    대출 조건도 대대적으로 낮췄다.

    1972년 2월 소련은 이탈리아로부터 금리 6%의 7년 만기 차관 6억 달러를 빌릴 수 있었다.

     

    유로달러는 원래 미국이 자국의 인플레이션 압력을 완화하기 위해 외국에 수출한 자본이었다.

    그런데 소련이 유로달러로 식량 구매대금을 지급하면서 다시 미국에 유입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미국에는 식량 부족, 인플레이션 심화, 달러 가치 하락이라는 삼중 악재가 겹치는 황당한 상황이 빚어졌다.

     

     

    환율 안정을 원하는 유립과 변동 환율을 꾀하는 미국의 대립

    1970년대 초 세계적 문제로 대두했던 식량 위기, 인플레이션, 오일 쇼크, 경기 침체, 유럽과 미국 간의 불화 등은 본질적으로 모두 같은 현상이었었다.

     

    요컨대 달러의 평가 절하로 말미암아 촉발된 것이다.

    미국은 금을 '폐위'시킨 후에도 달러가 여전히 금의 보이지 않는 위협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이치를 드디어 깨달았다.

     

    금을 염두에 두는 한 미국 달러화 약세의 실상이 적나라하게 천하에 공개되는 것은 당연했다.

    환율이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고정환율제 아래에서는 달러 약세를 감추기 위해 그 어떤 수작을 부리는 것도 불가능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미국은 달러와 금의 연결 고리를 끊어버린 토대 위에 한술 더 떠서 고정환율제까지 없애버리겠다는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를 통해 세계화폐 시장을 혼란 상태에 빠뜨린다면 자국에 이익이 될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실제로 미국은 고정환율제 대신 변동환율제를 채택하면 복잡한 경제 현상이 사람들이 이목을 가려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유럽은 환율 안정이 절실히 필요했다.

    유럽공동체는 환율의 자유 변동에 따른 각 회원국의 환율 불안정과 무역 경제 발전에 끼친 악영향을 해소하기 위해 1972년 4월 베르너 보고서의 정신에 입각해 '스네이크 체제'를 출범했다.

     

    이 제도는 유럽공동체 가맹국 통화 간의 환율 변동 폭을 강제로 제한한 것이 주요 특징이었다.

    1973년 초 소련에 수출한 식량대금으로 유로달러가 유입되면서 갈수록 심해지는 인플레이션 압력 때문에 미국 달러는 스미소니언 협정의 환율 변동 폭 제한 규정을 더 이상 지킬 수 없게 되었다.

     

    그해 2월 서독 중앙은행은 7.5%에 달하는 인플레이션율을 낮추기 위해 금리 인상을 단행했다.

    이에 급기야 대대적인 달러 자산 매각 붐이 형성되었다.

    1973년 3월 1일 예상대로 스미소니언 체제가 무너졌다.

     

    고정환율제의 한 형태인 브레턴우즈 체제 시대가 공식적으로 막을 내린 것이다.

    이후 국제 통화 시스템은 혼미 상태에 빠져들었다.

    미국으로서는 드디어 고정환율제라는 최대 걸림돌을 제거한 셈이었다.

     

    미국은 자국 국채를 금 대신 세계 핵심 준비 자산으로 삼기 위한 준비에 돌입했다.

    1976년까지 세계 각국 정부가 보유한 미국 국채 규모는 900억 달러에 달했다.

     

    이 거액의 부채를 어떻게 무효화할 것인가?

    미국 앞에 새로운 전략적 과제가 대두했다.

    미국이 생각해낸 방법은 이 부채를 각국의 국제 준비통화로 탈바꿈시키는 것이었다.

     

    1974년 6월 미국은 IMF에 이른바 '대체 계정'을 창설할 것을 제안했다.

    이 대체 계정의 주요 기능은 각국이 보유한 미국 국채를 IMF 특별인출권, 즉 SDR로 바꾸는 것이었다.

    미국은 이 방법을 통해 미국 국채를 국제 준비 자산으로 탈바꿈시킬 생각이었다.

     

    이렇게 되면 각국이 보유한 미국 국채는 미국의 국가 채무에서 주요 국제 준비 자산으로 바뀔 수 있는 터였다.

    또 국제 통화 시스템에 깊숙하게 침투하는 것도 가능했다.

    미국으로서는 이 부분의 채무를 영원히 상환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미국은 달러를 '금'으로부터 영원히 '해방'시키기 위헤 네 단계의 직접적인 행동 방침을 작성했다.

    이에 따라 미국은 우선 IMF 회원국 중앙은행들이 금의 기준 가격을 정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다음에는 금과 SDR의 연결 고리를 끊어버림으로써 금이 각국 중앙은행의 준비 자산 중에서 가치 척도 기능을 행사하지 못하게 했다.

     

    이어서 재무부가 정기적으로 금 경매를 실시하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IMF와 미 재무부가 보조를 맞춰 국제 금 가격을 낮추도록 했다.

     

    이 방안의 취지는 분명했다.

    요컨대 금의 가격을 불안정하게 만들어 금의 가치 저정 수단으로서의 메리트와 국제 준비 자산으로서의 메리트를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IMF 회원국들은 미국의 압력을 이겨내지 못했다.

    금과 SDR의 연동 방식을 버리고 16개국의 복수 통화 가치에 연결시키는 표준 바스켓 제도를 채택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IMF는 또 미국의 요구에 부응해 보유하고 있던 금 자산의 3분의 1을 매각하기로 결정했다.

    이 중 절반은 각 회원국 중앙은행에 돌려주고 나머지 절반은 시장에서 공개 매각하기로 했다.

     

    미국은 고정환율제를 가볍게 폐지시켰다.

    달러와 금의 연결 고리도 끊어버렸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미국에 남은 골칫거리는 별것 없었다.

     

    오일 쇼크 발발 후 유가 폭등으로 거액의 오일달러를 챙긴 중동 국가들을 상대하는 것 정도였다.

    달러 채무 제국은 금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황제'를 칭했다.

    그런 다음 변동환율제 도입, 오일 쇼크, 중동 오일달러의 역류 등 파란만장한 혼란의 과정이 이어졌다.

     

    미국은 드디어 입지를 단단하게 굳혔다.

    이런 혼란의 와중에 유럽통화연맹은 심각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독일의 통일과 유럽통화연맹의 창설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은 콜에게

    "독일 통일의 선결 조건은 독일 마르크를 포기하고 유로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유럽통화연맹의 진척에 박차를 가하는 것이다"

    는 요지의 입장을 암암리에 강력히 전달했다.

     

    콜 총리 역시 어쩔 수 없이 마르크화를 포기하게 된 서독 국민들의 슬픔을 최대한 크게 부각시켰다.

    그러나 가장 뛰어만 안목을 가진 사람은 대처 총리였다.

    1990년 3월 대처는 프랑스 10대 산업 거두들을 런던으로 초청한 자리에서 자신의 일관된 관점을 이렇게 천명했다.

     

    "서독은 이미 유럽 경제 퍠권을 장악했다.

    그리고 통일을 이룬 후에는 정치 패권까지 장악할 것이다.

    유럽 통합은 독일의 독주를 막는 좋은 방법이 아니다.

    프랑스와 영국은 반드시 힘을 합쳐 독일의 위협에 대처해야 한다.

    유럽 통합은 강대해진 유럽을 두 손으로 공손하게 독일에 바치는 것이다.

    이는 독일의 지배적 지위를 더욱 강화하는 꼴이 될 이다."

     

    대처 총리는 출중한 정치가였다.

    그녀는 일찍이 유럽 통합의 결과, 서독의 세력만 갈수록 강대해질 것이라는 예측을 한 바 있었다.

    사실 영국은 독일을 견제하는 면에서는 예로부터 프랑스보다 정치적 통찰력이 뛰어났다.

     

    "프랑스는 독일을 위해 혼수를 장만해 주는 역할만 할 뿐이다.

    최종적으로는 사람이고 재물이고 모든 것을 독일에 넘겨주고 말 것이다."

     

    대처 총리는 또 대단히 냉정한 현실주의자이기도 했다.

    그녀는 서독이 유럽중앙은행을 이용해 영국 경제에 간섭하는 것을 절대 용인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유럽통화제도 아래에서 유럽환율제도,

    즉 ERM의 혜택을 보려는 타산도 없지 않았다.

     

    "영국이 유럽환율제도에 가입하려는 목적은 강세인 마르크를 이용해 금본위제와 비슷한 통화 제도를 구축함으로써 영국의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는 것이었다."

     

    유로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뒤로 물러설 수 없다.

    반드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유로의 지속적인 진화를 추진하는 방법은 유럽 재무부를 출범시키는 길뿐이다.

    현재 유로화가 당면한 위기는 어쩌면 새로운 기회일지도 모른다.

    유로화의 진화 역사를 돌이켜보면 유럽 통합의 필연적이고 필수적인 추세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요컨대 유럽 재무부 출범은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언제 하느냐의 문제다.

    일단 통일된 유럽 재무부만 출범하면 유럽합중국 탄생도 시간 문제가 아닐까 싶다.

     

     

    신자유주의와 폴 볼커의 화학 요법

    밀턴 프리드만은 신자유주의자들의 특사로 레이건 대통령과 대처 영국 총리에게도 통화주의 사상을 깊이 주입시켰다.

    "인플레이션은 언제 어디서나 화폐적 현상이다.",

    "통화 긴축만이 인플레이션을 억제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신자유주의자들에 따르면 달러는 상위 1% 부자들이 세계를 지배하고 부를 분배하는 데 가장 중요한 도구라고 할 수 있다.

    이때 통화주의자들과 의기 통합한 학파가 또 하나 있었다.

     

    바로 조세감면과 복지 삭감을 통해 경제의 총공급 확충을 주장한 이른바 공급학파였다.

    "조세를 대폭 감면하면 미국 경제의 거대한 생산력이 '기적적으로' 폭발할 수 있다.

    또 복지를 삭감할 경우 근로자들의 태만과 불성실성이 줄어들어 생산력이 증가한다."

     

    통화주의와 공급경제학은 정부의 경제 개입을 반대한다.

    민영화를 강력하게 요구한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한다.

     

    미국의 지배 엘리트 그룹은 이 두가지 이론을 토대로 정부의 손에서 소득 분배권을 빼앗기 위해 몇 가지 준비에 착수하기 시작했다.

     

    상위1% 부자들의 계획을 완벽하게 달성하려면 역시 통화 긴축 정책을 실시해 달러화의 지위를 강화하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사람은 바로 FRB 의장 폴 볼커였다.

     

    그는 당시 심상치 않은 조짐을 보이는 인플레이션을 효과적으로 잡기 위해 FRB의 달러 공급 매커니즘을 철저히 개혁하기로 작심했다.

     

    다시 말해, 금리를 이용해 간접적으로 협의통화를 조절하던 방식을 직접 조절 방식으로 바꾸기로 한 것이다.

    직접 조절 방식은 금리를 통제하지 않고 시장 자율에 맡기는 것으로, 협의통화만 직접 조절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암세포를 직접 죽이는 '화학 요법'처럼 강력하면서도 잔혹한 방법이다.

     

    무엇 때문에 전통적인 금리 조절 수단이 번번이 실패했을까?

    그 원인은 다른 데 있지 않다.

    달러화 과잉 발행 때문이다.

     

    FRB는 유로달러로 인해 전통적인 금리 정책이 더 이상 통화량 규제에 효과적이지 않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발견했다.

    그러나 폴 볼커의 1단계 화학 요법이 끝난 다음, 연방기금 금리는 11.5%에서 14%로 상승했다.

     

    투기성 대출도 계속 증가세를 보였다.

    물가상승률은 1980년 1월 무려 17%에 육박했다.

    한마디로 첫 단계 화학 요법은 인플레이션을 억제하지 못하고 경제를 더욱 침체시켰다.

     

    문제의 근원은 여전히 유러달러에 있었다.

    미국 금리 상승은 해외 자본에 거대한 투기 기회를 마련해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급기야 마음이 약해진 폴 볼커는 신용 규제를 완화하기 시작했다.

     

    미국 경제는 빠르게 회복되기 시작했지만 잇따라 인플레이션이 다시 기승을 부렸다.

    물가를 잡으면 경제가 죽고 물가를 잡지 않으면 달러가 죽게 된 것이다.

     

    1980년 가을부터 1982년 여름까지 폴 볼커는 인플레이션 억제를 위해 2차 화학 요법을 시했다.

    2차 화학 요법은 지속적인 금융 긴축을 통해 고금리를 유지하는 것이 키포인트였다.

    우선 통화량 증가율을 목표치 내로 제한하고, 고금리를 유지해 사람들에게 대출 상환을 촉구함으로써 M1을 감소시켰다.

     

    더불어 고금리를 미끼로 대량의 유로달러를 미국에 끌어들여 달러 평가 절상의 기대를 상승시켰다.

    이를 토대로 서독과 일본에 금리 인하 압력을 가했다.

     

    자연스럽게 달러화의 급격한 평가 절상을 유도할 수 있었다.

    그 밖에 통화량이 감소하고 고금리가 유지되는 상황에서 달러의 평가 절상에 따른 물가 하락 효과를 통해 시장의 인플레이션 기대 심리를 대폭 낮추었다.

    모든게 폴 볼커의 뜻대로 된 것이다.

     

     

    금융 시장 최후의 구원자 그린스펀 출처

    시장이 개장하자마자 뉴욕연방준비은행의 외환 딜러들은 즉시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각국 은행에 전화로 매매 문의를 하기 시작했다.

     

    아시아 외환 딜러들은 깜짝 놀랐다.

    여태까지 뉴역연방준비은행 외환 딜러들이 직접 매매 문의를 한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달러 환율 급락에 아랑곳하지 않고 매도 물량을 모두 매수한 사례는 단 한 번도 없었다.

    눈치 빠른 사람들은 각국 중앙은행이 협동 작전을 개시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린스펀이 기대한 것이 바로 이처럼 기선을 잡아 분위기를 압도하는 효과였다.

    FRB의 매수 주문이 외환 선물과 현물 시장에 동시에 홍수처럼 밀려들면서 달러화의 강세를 주도했다.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사실을 눈치챈 매도 세력은 즉시 아시아 시장에서 철수했다.

    영문을 모르는 개미 투자자들 역시 따라서 철수하거나 매수세로 돌아섰다.

     

    훗날 FRB는 그린스펀에게 찬사를 퍼부었다. 심리전, 여론전, 함정, 아시아 시장 공략 전술 등을 총동원한 '창의적' 전략을 사용했기 때문에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면서 말이다.

     

    한마디로 모든 공로를 그린스펀에게 돌렸다.

    실제로 이 '달러 보위전'에 각국 중앙은행이 실제 투입한 자금은 모두 합쳐 40억 달러도 채 되지 않았다.

     

    각국 중앙은행이 외환 시장에 개입하기 시작한 이후 이토록 적은 비용으로 큰 성과를 거두기는 처음이었다.

    그린스펀은 이 '달러 보위전'에서 훌륭한 능력을 남김없이 발휘했다.

    이 때문에 폴 볼커보다 훨씬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린스펀은 폴 볼커처럼 달러 환율을 높이기 위핵 금리를 인상하는 우둔한 방법을 쓰지 않았다.

    대신 '외환 선물'이라는 금융 도구를 전략적으로 잘 이용해 달러 매도 세력의 배후에서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또 외환, 주식, 채권 등 여러 시장에서 협동 작전을 펼치는 방법으로 저비용, 고수익의 혁혁한 전과를 거뒀다.

     

     

    향후 10년 미국 경제에 악영향을 미칠 세 가지 경제 주기

    불행하게도 향후 10년 사이 미국 경제에 악영향을 끼칠 세 가지 경제 주기가 겹칠 것으로 보인다.

     

    첫째, 빚으로 지탱하는 레버리지 경제가 붕괴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적어도 10년은 걸릴 것으로 보인다.

     

    미국이 채무의 거대한 압력에서 벗어나는 과정은 '레버리지 경제의 붕괴'로 풀이할 수 있다.

    1930년대 대공황 시기의 경험을 비춰볼 때 대비 부채 비율 299.8%는 한 나라의 경제가 버터낼 수 있는 한계 '수위'라고 단언해도 좋다.

     

    부채 비율이 이 수위를 넘으면 국가의 경제 엔진이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없다.

    미국의 GDP 대비 부채 비율은 1933년 299.8%에 달했다.

    그러다 약 10년 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는 120~150%의 안전 구간으로 진입했다.

     

    하지만 2008년 미국의 부채 비율은 80년만에 재차 위험 수위(358.2%)를 넘어섰다.

    일각에서는 미국의 경기 부양책이 잘못되었다는 주장을 제기하고 있다.

    미국의 경제 정책은 GDP 대비 부채 비율을 낮추지 못했다.

     

    그뿐만 아니라 미국 국채 규모를 GDP와 비슷한 수준으로 늘리는 데 일조했다.

    '채무 언색호'수위가 위기 발발 전보다 오히려 더 높아진 것이다.

     

    GDP 대비 부채 비율을 150% 미만으로 낮추지 않는 한 미국 경제 엔진은 정상적이었고 지속적인 운행이 불가능하다.

    적어도 10년 이상의 '경제 레버리지 붕괴' 기간을 거쳐야 미국의 총부채 규모도 안정 수위에 도달할 수 있다.

     

    두 번째 주기는 미국 인구의 연령 구조를 살펴보면 알기 쉽다.

     

    향후 10년 넘게 소비 활동 회퇴기가 나타날 것으로 예측된다.

    실제로 1960년대 초에 태어난 7,700만 명의 베이비 붐 세대는 현재 소비 활동의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미국발 서브프라임 금융위기가 터진 2008년은 공교롭게도 미국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 시기와 맞아 떨어졌다.

     

    1960년대 초에 출생한 미국의 베이비붐 세대는 이 무렵 소득 및 소비가 정점에 이르렀다 서서히 하락하는 47세 전후 나이가 되었다.

     

    세 번째 주기는 새로운 생산성 혁명을 완성하는 시간과 기술의 축적의 시간으로 약 20~25년의 간격이다.

     

    1889년부터 2000년까지 111년 동안 미국의 사회적 생산성은 세 차례의 고조기를 맞이했다.

    20~25년이면 한 세대가 다음 세대에 의해 교체되는 기간이기도 하다.

     

    생산성 혁명이 폭발하는 주기와 인구 구조 변화 주기가 겹치는 현상은 절대로 우연이 아니다.

    요컨대 지금은 레버리지 경제의 붕괴 주기, 소비 감소 주기 및 생산성 슬럼프 주기의 세 가지 주기가 겹치고 있다.

    미국 경제는 '잃어버린 10년'에 빠질 개연성이 높다.

     

     

    10년 위험기

    미국 경제의 최대 문제점은 다른 게 아니다.

    국내 저축이 부족한 것이다.

    실질 저축이 없는 상황에서 FRB는 조폐기를 신 나게 돌려 '가상의 부'를 만들어냈다.

     

    급기야 달러 구매력 하락과 신용 실추라는 후폭풍을 초래했다.

    이런 자기 패배적 악순환은 계속됐다.

    미국은 부족한 저축을 보충하기 위해 점점 더 많은 달러를 찍어냈고 달러 유동성 과잉은 자본과 달러 자산의 괴리를 부추겼다.

     

    다른 국가의 저축을 흡수하는 능력을 약화시킨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하버드 대학의 교수 니얼 퍼거슨은 저서 <금융의 지배>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역사 경험으로 알 수 있듯 국가는 재정 수입의 20%를 채무 이자 상환에 사용할 때 심각한 경제 위기에 빠진다.

    또 하이퍼인플레이션을 면치 못한다.

    이 비율이 50%를 넘으면 국가는 몰락할 위험에 처한다."

     

    스페인인의 경우 1557~1696년 심각한 채무 부담 때문에 무려 열네번이라 국채 디폴트를 선언한 경험이 있다.

    이는 스페인 제국을 몰락으로 이끈 계기가 됐다.

     

    프랑스의 경우 1788년 부르주아 혁명이 발발하기 전 국채 원리금 상환에 재정 수입의 62%를 지출했다.

    그 결과 부르봉 왕조의 몰락을 초래했다.

     

    오스만 제국의 경우 1875년 재정 수입의 50%를 국채 원리금 상환에 지출했다.

    그 결과 국가 경제가 거의 붕괴 직전에 이르렀다.

     

    영국의 경우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인 1939년 국채 원리금 상환에 재정 수입의 44%를 지출했다.

    그 결과 나치 독일의 도발에 대항할 힘을 완전히 잃고 말았다.

     

    미국도 국채 이자 지급에 재정 수입의 상당액을 지출하고 있다.

    그런데 이제는 거의 한계 수위에 도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 의회의 예산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2011년 재정 세수의 9%가 국채 이자 상환에 지출되었다.

    지난 30년 동안 미국 국채의 평균 수익률 5.7%를 기준으로 계산해 보면 이 비율은 2020년 20%, 2030년 36%, 2040년에 58%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달러화 중심의 세계 통화 시스템에 치명적 위기가 발발하는 시기는 대략 2020~2030년 사이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