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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화폐전쟁5

     

     

     

    달러화를 배제하기 위한 각국의 화폐 '반란'

    유로화의 출범은 미국으로부터 온갖 탄압을 받고 있던 사담 후세인에게 가뭄에 단비 같은 소식이었다.

    2000년 11월, 이라크 중앙은행은 이라크 원유 결제 통화를 달러화에서 유로화로 전환하고 100억 달러의 외화준비금을 유로화로 교체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 소식을 듣고 유로존이 출범하자마자 횡재한 유럽인들은 크게 기뻐했다.

    그러나 미국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중동 원유 수출국들이 모두 사담 후세인을 따라 배운다면 달러화는 '강산의 절반'을 잃게 될 수도 있었다.

     

    더구나 달러화로 원유조차 사지 못한다면 누가 약세 달러를 보유하려 하겠는가?

    2003년 3월, 이라크는 유로화를 결제 통화로 도입한 지 1년 만에 미국의 무자비한 침공이라는 재앙을 맞이했다.

     

    달러화의 패권에 무모하게 도전했다가 파국을 재촉한 사람은 또 있었다.

    바로 리비아의 최고 통치자 무아마르 카다피였다.

     

    카다피는 1970년대부터 아프리카연합 창설의 꿈을 품었다.

    아프리카연합의 꿈을 현실로 만들려면 당연히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카다피는 전략의 중점을 화폐에 두고 마하티르 말레이시아 총리 및 기타 이슬람 국가들과 손잡고 이슬람권 공용 화폐인 디나르 금화 발행을 추진했다.

     

    2003년 디나르 금화가 정식으로 발행됐다.

    비록 화폐의 역사에 획기적인 돌풍을 일으킬 정도로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으나 미국과 IMF에게는 엄청난 충격을 가져다줬다.

     

    금의 '화폐화'를 시도한다는 것 자체가 IMF의 규정에 위배되었을 뿐 아니라 더욱이 IMF를 무시하고 완전히 새로운 통화 시스템을 시도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카다피의 계획은 달러화와 유로화라는 양대 강적의 벽에 부딪혔고, 카다피 역시 사담 후세인처럼 강대국을 든든한 배경으로 두지 못했다.

    카디피의 웅장한 청사진은 결국 양대 강권 세력의 무자비한 연합 공격에 스러지고 말았다.

     

     

    모든 법정 통화의 '천적' 금

    혹자는 금이 화폐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상품의 일종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니다.

     

    법적으로 봐도 금은 1970년대 초에 이미 IMF에 의해 강제적으로 '비화폐화'의 운명을 맞았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다.

     

    바로 법은 반드시 민심에 순응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민심을 얻지 못하는 법은 쓸모없는 종잇조각에 불과하다.

     

    금은 법적으로 화폐가 아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의 마음속에서는 화폐로 인식돼 있다.

    이는 법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세계 각국 중앙은행도 금을 준비금으로 비축하지 철강이나 다이아몬드를 비축하지 않는다.

    이를 두고 '야만 시대의 흔적'이라고 비난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황금은 영원히 모든 재산을 대표하는 궁극적인 '화폐'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가지 실험을 해보자.

    눈부시게 번쩍이는 1kg짜리 금괴와 시커먼 쇳덩어리 1kg을 번화한 거리에 나란히 놓고 행인들의 반응을 살피면 어떤 결과가 나타날까?

    두말할 나위 없이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듯 모두 금괴 쪽으로 달려갈 것이다.

     

     

    환매조건부채권

    일반인이 국채를 매입하면 만기일까지 기다리거나 중도에 매각하는 것 외에 다른 거래 방법은 없다.

    이와 달리 금융기관은 보유하고 있는 '죽은 국채'를 '산 현금'으로 바꿀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환매조건부채권 매매의 매력이다.

     

    금융기관은 여윳돈이 있는 사람에게 국채를 저당 잡히고 돈을 빌릴 수 있다.

    돈을 빌리면서 일정 기간 이후에 더 높은 가격으로 국채를 재매입하기로 약속하는데, 이때 발생하는 차액을 바로 'RP 금리'라고 한다.

     

    투자자는 이 차익을 노리고 돈을 빌려주며, 수요자가 투자자에게 담보로 제공하는 증서가 바로 환매조건부채권이다.

    국채는 국가 신용을 담보로 발행한 채권이기 때문에 시장에서 쉽게 현금화할 수 있다.

     

    또한 상환 기간이 길지 않아 짧게는 하루, 길어야 수십 일에 불과하다.

    여유 자금이 많은 금융기관과 개인의 경우 은행의 정기 예금은 입출금이 자유롭지 못해 불편하고 당좌예금은 금리가 너무 낮아 매력이지 못하다.

     

    이때 유연한 자금 회전과 비교적 높은 수익 및 안전한 투자, 이 세 가지를 모두 만족시켜주는 것이 바로 RP시장이다.

    RP 시장에서는 국채가 본원통화 역할을 한다.

     

    본질적으로는 금융 시스템의 '그림자통화' 창조에 필요한 '준비금'이 국채라는 얘기가 된다.

    그렇다면 은행의 예금 부채에 상당하는 RP 부채도 시장 거래에서 지불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을까?

     

    또 대차대조표 상의 국채 자산은 이전이 가능할까?

    대답은 물론 'Yes'이다.

     

    이것이 바로 RP 시장에서의 '재담보' 거래이다.

    반복적으로 '재담보'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할인율이 하락함에 따라 화폐 창조 에너지는 점점 줄어든다.

     

    이 같은 방식의 재담보 화폐 창조 사슬에서 국채는 고성능 화폐(본원통화)에 해당하고, 재담보 횟수, 다시 말행 담보 사슬의 길이는 화폐 승수에 상당하며, 담보자산의 할인율은 준비율과 같다.

     

    전통적인 은행 시스템은 '부분지급준비제도'를 통해 화폐를 창조하나 그림자금융은 '부분 담보자산'을 이용해 그림자통화를 창조하는 것이다.

     

     

    재담보, 뚜껑 하나로 여러 개의 병을 막는 묘기

    전통 은행 시스템의 부분지급준비제도 혹은 새로 등장한 그림자금융의 RP 담보 사슬을 막론하고, 그 본질은 뚜껑 하나로 병 여러 개를 돌려막는 게임에 불과하다.

     

    금융 곡예사들은 묘기를 부리면 부릴수록 더욱 대담해지고, 옆에서 구경하던 사람들까지 덩달아 끼어들면서 도박판의 판돈은 점점 더 커진다.

     

    결국 만들어놓은 병의 개수는 대단히 많은데 하나밖에 없는 병뚜껑이 땅에 떨어지면서 이에 연관된 사람들은 모두 쪽박을 차게 된다.

    2008년 실제로 이런 상황이 발생했다.

     

    미국의 금융감독자들은 당연히 금융기관이 부리는 묘기의 본질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1급 거래상의 재담보 설정 규모에 대한 제한 정책을 내놓고, 고객 부채 총액의 최대 140%까지 재담보로 설정하도록 규정했다.

    즉 그림자통화의 승수를 최대 1.4배까지만 허용한 것이다.

     

    이에 반해 영국은 상당히 관대했다.

    그들은 유럽연합과 더불어 금융시장에서 더 많은 쿼터를 차지하기 위해 환매채의 재담보 회수에 법적인 제한을 가하지 않았다.

     

    월스트리트의 도박꾼들은 미국에서 맘껏 수완을 펼칠 수 없게 되자 영국으로 몰려갔다.

    영국은 자연스럽게 베테랑 도박꾼들이 마음껏 환매체 재담보를 설정할 수 있는 '천국'이 됐다.

     

    펀드 매니저들은 RP 융자를 받기 위해 속속 월스트리트 1급 마켓메이커들에게 몰려들었다.

    1급 마켓메이커 중에서 가장 공격적인 곳은 리먼 브라더스였다.

     

    리먼 브라더스가 어떤 기업인가?

    월스트리트의 최대 '전당포'이자 전통 있는 가문이 아니던가.

    신용은 두말할 필요도 없고 병뚜껑 하나로 병 30개를 막는 고난도 금융 묘기를 실수 없이 선보였던 금융 마술사 아니던가.

     

    이 세상 모든 기업이 망해도 리먼 브라더스만은 파산할 일이 없을 것이라고 믿었던 도박꾼들은 경쟁적으로 가지고 있던 채권 자산을 리먼 브라더스에 맡겼다.

     

    얼마 뒤 리먼 브라더스는 이 채권 자산을 모두 런던 지점으로 옮겼다.

    그런데 2008년 리먼 브라더스가 파산을 선고했다!

     

    그 누구도 리먼 브라더스가 파산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도박꾼들은 리먼 브라더스에 담보로 맡긴 채권 자산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리자 애가 달아 안절부절 못했다.

     

    리먼 브라더스가 청산 절차를 밟는 동안 도박꾼들은 본인의 자산이 대체 누구 손에 들어갔는지 알아내야만 했다.

    그러나 이는 말처럼 쉽지 않았다.

     

    자산이 미국에 위탁 관리돼 있다면 문제는 아주 간단했다.

    미국 법상 위탁 관리 중인 자산은 보호를 받기 때문에 되찾는 일도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약삭빠른 리먼 브라더스는 이미 고객들의 자산을 런던에 있는 자회사로 이전한 상태였다.

    불행히도 영국의 자산 위탁 관리 보호법은 미국과 완전히 달랐다.

     

    도박꾼들은 후회막급이었다.

    애초에 RP 금리를 조금이라도 더 낮추기 위해 리먼 브라더스의 말을 경솔하게 믿고 해외 이전 자산의 소유권을 스스로 포기한 결과 미국 법률의 보호를 받을 수 없게 되었으니 말이다.

     

    도박꾼들은 이번 사태를 겪고 나서 1급 마켓메이커의 명성을 함부로 믿어서는 안된다는 큰 교훈을 얻었다.

    이후부터 도박꾼들은 거래상과 계약을 체결할 때 재담보 상한선을 규정한다거나 고객 자산 관리 전용 계좌를 개설하라고 요구하는 등 조건을 깐깐히 따져가면서 결정을 내렸다.

     

    그런데 전용 계좌가 있다고 고객 자산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을까?

    사람들은 금융 마술사들의 특기가 남의 돈을 자신의 주머니로 '옮겨 넣는' 것임을 잠시 망각했던 것이다.

     

     

    RP(환매조건부채권) 빙산에 부딪힌 QE(양적완화) 타이타닉호

    2013년 5월, Fed(연방준비제도)가 곧 QE(양적완화)를 종료하겠다고 강력하게 시사하자 글로벌 시장은 큰 충격에 빠졌다.

    이 충격은 당장 미국 국채 수익률의 급격한 상승으로 이어졌다.

     

    QE3 정책을 시행한 지 겨우 반년여 만에 미국의 주식시장과 채권시장, 부동산시장에서는 오랜만에 호황이 찾아왔고, 자산 리플레이션 효과가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Fed는 왜 황급히 QE를 종료하려고 했을까?

    그 이를 캐보려고 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주류 매체는 이 문제에 대해 거의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뉴욕연방준비은행과 BIS, IMF의 연구원과 소소의 학자들이 연구 보고서 및 인터넷 발표를 통해 관련 화제에 대해 토론했을 뿐이다.

     

    2013년 5월 말이 돼서야 일부 매체들이 꿈에서 깨어난 듯 미국의 일반 대중들이 들어본 적도 없는 '곤경에 빠진 RP시장'에 대해 언급하기 시작했다.

     

    우선 5월 23일자 <월스트리트 저널>에서 Fed가 그림자은행을 지나치게 압박했다고 크게 떠들었다.

    "중앙은행이 국채를 대량 매입하면서 그림자금융의 핵심 고리인 RP 시장에 담보물 부족 현상이 나타났다.

    지난 30년 사이에 화폐와 신용 창조 방식에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우리가 지금까지 배워왔던 교과서를 무용지물로 만들 정도로 말이다."

     

    <월스트리트 저널>의 보도는 '재담보'의 개념을 잘못 이해하는 실수를 범했다.

    그러나 양적완화 정책의 자가당착 문제는 정확하게 짚어냈다.

     

    "Fed 계좌에 방치돼 있던 1조 8,000억 달러의 국채 자산 때문에 RP 시장에서는 안전한 담보물이 기근에 빠졌다.

    이는 재담보의 (통화)승수 효과를 감안하면 약 5조 달러의 신용이 적게 창조됐음을 의미한다.

    양적완화 정책이 이런 뜻밖의 결과를 초래한 것은 정말 예상 밖의 결과이다.

    벤 버냉키를 수장으로 둔 Fed는 (지폐를 과다하게 찍어내) 미국 정부의 재정적자폭을 확대시킨 것만으로도 지탄받아 마땅하다.

    그런데 한술 더 떠 경제의 혈액을 함부로 다루고 있으니 더욱 큰일이다."

     

    이 이치는 아주 간단하다.

    RP 시장에는 담보물이 필요하고, 국채는 가장 중요한 담보물이다.

    그런데 QE 정책으로 인해 Fed가 RP 시장과 국채 매입 쟁탈전을 벌이는 모순이 나타났다.

     

    한마디로 QE 정책의 시행 기간이 길어질수록 RP 시장의 그림자통화 창조 능력이 점점 더 취약해질 수 밖에 없다.

    사실 Fed 계좌에는 국채를 제외하고도 약 1조 1,000억 달러 규모의 MBS도 방치돼 있었다.

     

    패니메이와 프레디맥에서 발행한 이 채권은 정부급 신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국채와 마찬가지로 RP 시장에서 '안전한' 담보자산으로 인정받는다.

     

    만약 국채와 MBS를 모두 그림자통화의 본원 통화라고 할 경우 그림자금융 시스템은 QE 정책으로 말미암아 약 7~9조 달러의 그림자통화 확장에 브레이크가 걸린 셈이다.

     

    그렇다면 QE 정책의 RP 담보물 압박 문제는 현재 얼마나 심각한 상태일까?

    Fed가 QE 정책의 일환으로 매입하는 국채는 단기 국채에서 장기 국채까지 매우 다양하다.

     

    물론 중장기 채권이 주를 이루지만 유사 10년 만기 국채를 대체 변수로 삼아 계산하면, 2013년 8월까지 Fed가 시중 유통 국채의 30%를 보유했다는 결과가 나온다.

     

    계속 이 속도로 국채를 매입할 경우 Fed의 시중 국채 보유 비율은 2014년에 45%, 2015년에는 60%, 2017년에 90%에 이를 전망이며, 2018년 말에는 시중의 국채를 전부 흡수할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 전에 RP 시장은 붕괴할 것이다.

    아마 버냉키 보인도 QE 정책이 RP 시장을 심각한 곤경에 빠뜨릴 줄은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RP 시장에서 '요절'하는 그림자통화 규모는 앞에서도 언급했듯 대략 7~9조 달러에 이른다.

    이는 Fed의 QE 정책에 의해 증가한 유동성 규모에 상당하다.

     

    게다가 매달 850억 달러 규모로 국채와 MBS를 지속적으로 매입할 경우 RP 시장의 자체 붕괴 위험도 갈수록 커질 수 밖에 없다.

    이것이 벤 버냉키 Fed 의장이 2014년에 서둘러 QE를 종료하려 한 진짜 이유였다.

     

     

    BIS의 규제로 담보자산 부족 사태가 악화되다.

    <월스트리트 저널>이 RP 시장의 담보물 부족 문제에 대해 보도할 무렵이었다.

    오래전부터 이 문제에 대해 고도의 관심을 가지고 관련 조사를 벌여왔던 국제결제은행(BIS)도 5월에 '우량 담보물 부족 사태에 대한 보고서를 발표했다.

     

    유럽, 미국과 일본의 양적완화 정책에 줄곧 못마땅한 태도를 보이던 BIS는 일찌감치 새로운 게임 룰을 제정했다.

    그것이 바로 '바젤Ⅲ(은행자본건전화 방안)'이다.

     

    BIS는 대체 어떤 기관이기에 전 세계 금융기관들은 BIS가 제정한 협약을 반드시 준수해야 하는가?

    BIS는 어떻게 '세계 은행감독관리위원회' 자격을 얻었을까?

     

    BIS의 출범 배경은 간단치 않다.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은사이자 조지아 주립대의 유명한 역사학자인 캐럴 퀴글리는 BIS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한 바 있다.

     

    "금융자본 세력은 지극히 원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금융 시스템을 건립해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다.

    극소수에 의해 통제되고, 세계 정치 및 경제 시스템을 주재할 수 있는 시스템 말이다.

    이 시스템은 봉건 독재 방식으로 중앙 은행가들에 의해 통제된다.

    은행가들은 빈번한 회의를 통해 도출된 비밀 협의로 시스템을 조정한다.

    이 시스템의 핵심인 스위스 바젤의 국제결제은행은 민간 은행이다.

    또 이를 통제하는 중앙은행들도 마찬가지로 민간 은행이다.

    각 중앙은행은 재정 대출 통제, 외환 거래 조작, 국가 경제 활동에 개입, 상업 분야에서 협력을 유지하는 정치가의 이익 돌보기 등의 방식으로 각자의 정부를 통제한다."

     

    BIS의 최종 목표는 당연히 국제 은행가들의 전체 이익을 보호하는 것이다.

    아울러 국경을 초월해 전 세계 은행 시스템을 자체 관할 범위에 편입시키고 금융의 힘으로 정부를 통제하며 화폐 수단으로 세계를 관리하는 것이다.

     

    이 '웅대한'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금융 분야의 근시안적이고 탐욕스러우면서도 기만적이고 무책임한 모험 행위를 단호하게 근절할 필요가 있었다.

     

    국제 은행가들의 자율성은 BIS가 '위대한 목표'를 성공적으로 실현하는 전제조건이다.

    따라서 바젤Ⅲ는 자율성 확대에 관한 구체적인 요구를 제시했다.

     

     

    Libor의 유래

    '런던은행간기준금리'인 Libor의 기원은 19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는 유로 달러가 막강한 기세로 흥기하던 시대였다.

    그러면서 유럽은 달러화 공급 과잉과 하나로 통일되지 못한 금융시장이라는 큰 문제에 직면했다.

     

    당시에 국경을 넘어선 대출과 투자는 거의 불가능했고, 외환과 자금 이동에도 많은 제약이 뒤따라 기업의 금융 업무 일체는 통상적으로 자국 은행이 처리했다.

     

    그렇다면 왜 유로 달러는 왜 미국으로 환류하지 못했을까?

    미국은 금융 규제가 유럽보다 더 엄격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새로운 금융 중심지로의 부상을 꿈꾸던 런던은 유로 달러의 자유로운 이동에 대해 방임하는 태도를 취했다.

    지크문트 바르부르크가 런던에서 세계 최초로 유로 달러채 개념을 확립한 뒤 사방에 방치돼 있던 유로 달러는 '금융 자유의 도시' 런던으로 대거 몰려들었다.

     

    그런데 달러화 표시 채권은 한꺼번에 거액의 자금을 조달하기 어려운 단점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1회 조달 규모가 2,000만 달러를 넘지 못한데다 투자은행에 무려 2.5%의 위탁판매 수수료를 지급해야 했다.

     

    이유는 유럽 대륙의 달러 자금이 런던까지 오기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분할 상태의 금융시장과 외화 규제가 달러의 대규모 이동을 방해했다.

     

    이 문제는 당시의 한 금융 고수의 큰 관심을 끌었다.

    그가 바로 'Libor의 아버지'로 불리는 미노스 좀바나키스였다.

     

    미노스의 계획은 대형 은행 신디케이트를 만들어 '유로 달러채'와 유사한 '유로 달러 대출'을 공급하는 것이었다.

    우선 해결해야 할 문제는 대출 기간을 늘리는 것이었다.

    두 번째 문제는 대출 규모를 늘리는 것이었다.

     

    미노스는 대출 기간이 너무 길어지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은행 신디케이트 회원들에게 일정 기간마다 금리가 변경되는 단기 대출을 새로 제안했다.

     

    3개월 혹은 6개월에 한 번씩 금리를 조정하면서 단기 대출을 같은 기간의 단기 예금에 연동시키는 방안이었다.

    미노스는 구체적인 실행 방법도 제정했다.

     

    신디케이트 회원 은행이 단기 대출 만기 2일 전에 연합회에 현재의 융자 비용을 보고하면 8분의 1%p까지 정확하게 가중 평균을 구한 다음 여기에 은행의 이윤 포인트를 합해 다음 단기 대출 금리를 산출하는 방법이었다.

     

    이것이 Libor의 유래이다.

    미노스의 혁신적 사고는 큰 성공을 거뒀다.

     

    몇 달 사이에 수억 달러의 유로 달러 대출이 공급됐고, 다른 은행들도 경쟁적으로 이 방법을 본받았다.

    이에 1970년대 초 유로 달러 대출 규모는 연간 수십억 달러에 달했고, 수백 개 은행이 이 새로운 대출시장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미노스의 단기 금리 산출 방법은 순식간에 전 세계로 널리 전파됐다.

    이 방법을 활용해 도쿄는 Tibor, 유럽은 Euribor, 싱가포르는 Sibor, 상하이는 Shibor를 탄생시켰다.

     

    런던에 본부를 둔 영국은행가협회는 1980년대에 Libor라는 명칭을 정식으로 사용했다.

    이때부터 Libor는 세계 각국의 금융 간 거래에서 기준 금리로 활용되기 시작했다.

     

    미노스로서는 단순히 은행 신디케이트를 잘 관리하기 위해 제시한 금리 기준이 은행 간 단기 대출을 포함해 전 세계적으로 다양한 금융 거래에 영향을 미치게 되리란 사실을 아마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수십조 달러 규모의 주택담보부 대출, 각종 채권, 상업어음, 신용카드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석유, 금, 식량 등 벌크스톡(대량 상품) 거래에서도 Libor는 활발하게 이용되고 있다.

    이밖에 수백조 달러 규모의 금리 스와프 시장도 Libor와 밀접하게 연동돼 있다.

     

    Libor는 선천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다.

    우선 18개 은행의 호가는 자체적인 '추산'에 의한 것이지, 상호 간 실제 거래를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문제가 생길 경우 추궁할 만한 '증거'가 없다.

    5대 금 거래업자가 고객들의 상호 간 거래를 기준으로 금 가격을 산정하는 런던의 '금값 책정 체계'가 Libor 산출 메커니즘보다 더 합리적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Libor는 실제 시장 금리가 아니다.

    18개 은행이 한자리에 모여서 만들어 낸 '상상' 금리일 뿐이다.

     

    따라서 모든 참여 은행은 허위 금리를 제시할 만한 강렬한 동기를 가지고 있다.

    매일 발표되는 Libor는 이들 은행의 손익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뿐 아니라 심지어 치명적인 신용 의혹을 불러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QE 종료냐 유지냐, 그것이 문제로다

    2013년 5월, 벤 버냉키 Fed 의장은 글로벌 시장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 양적완화 축소 가능성이라는 위험한 발언을 했다.

    물론 결과는 끔찍한 금리 폭등으로 나타나 국채 수익률이 통제 불능 상태로 치솟았다.

     

    채권 가격이 급격하게 하락하고 주가지수가 폭락했으며, RP 시장은 자금난에 시달리고 그림자통화 가뭄 사태가 벌어졌다.

    신흥시장 역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QE 정책의 최대 장점은 바로 초저금리 금융 환경의 조성이다.

    그러나 QE 정책을 무모하게 유지할 경우 RP 빙산에 부딪힐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QE 종료 후 발생 가능한 상황을 예측해보면 금리 폭등에 따른 세 차례 충격파가 Fed를 덮칠 것으로 예상된다.

    첫 번째 충격파는 Fed가 장기 국채와 MBS 매입액을 축소하면서부터 시작되는데, 우선 장기 금리가 폭등할 것이다.

    두 번째 충격파의 기폭제는 단기 금리의 폭등이다.

    세 번째 충격파는 가뜩이나 위태위태한 달러화가 완전히 신용을 잃으면서 시작될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더 심각한 경제위기의 발발이냐 아니면 국부 전쟁이나 사회적 혼란의 발생이냐 두 가지 외에는 없다.

    물론 이 두가지가 다 발생하는 최악의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지난 역사를 돌이켜보면 경제위기와 금융위기가 구제불능의 상태로 악화될 때마다 항상 전쟁이 위기의 최종 해결 수단으로 등장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탐욕에 의한 짓밟힌 꿈

    1933년,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3차 양적완화를 전격적으로 단행해 금 1온스당 20.67달러의 법정 교환 비율을 35달러로 조정했다.

    그러자 달러 가치는 무려 70% 하락하고 본원통화 공급량은 70% 증가했다.

     

    벤 버냉키가 QE3을 통해 Fed 대차대조표상의 통화 공급량을 '배로 늘린 것'과 같은 수법이었다.

    그러나 양적완화 정책은 미국 경제를 살리지 못했다.

     

    케인즈의 재정적자 정책도 효과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1937년, 미국 경제는 더블딥에 빠져들었다.

     

    1933년, 루스벨트 대통령 취임 당시 미국 실업자 수는 1,300만 명이었다.

    1941년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할 때에도 실업자 수는 여전히 1,000만 명을 넘었다.

     

    1930년대에 8년 동안의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실업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던 것처럼 2008년 금융위기 발생 후 6년이 지난 지금도 취업시장은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런 미국 경제를 곤경에서 벗어나게 만든 계기는 아이러니하게도 2차 세계대전의 발발이었다.

    수많은 노동력이 전쟁 기계로 전장에 파견되면서 미국의 실업 문제는 근본적으로 해결되었다.

     

    전쟁은 부의 재분배 도구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1940년대 초부터 상외 10% 부자 집단의 국민소득 점유율은 대록 하락했다.

    1927년의 50%에서 1942년에 35%로 하락했고, 1942년부터 1982년까지 미국 90%의 중하층은 국민소득의 약 67%를 차지했다.

     

    상위 10%의 부자들이 국민소득의 33%밖에 차지하지 못한 이 시기가 바로 미국 경제가 최고의 안정과 호황을 누렸던 '40면 황금시대'였다.

     

    하지만 이와 같은 부의 분배 매커니즘은 부자 집단의 불만을 샀다.

    특히 미국 인구의 0.1%를 차지하는 최상위 부자의 불만은 최고조에 달했다. 1927년에 국민소득의 10%까지 점유했던 이들이 1975년에 이르러 국부의 2.6% 밖에 차지하지 못하자, 급기야 부자 집단의 불만은 분노로 이어졌다.

     

    툭 까놓고 말해서 정부의 사회적 부의 재분배와 공공복지에 대한 지원은 부자들이 국부를 자유로이 지배하는 데 있어서 큰 걸림돌이었다.

     

    부자 집단은 1976년부터 '제2의 혁명'에 본격적으로 돌입했다.

    록펠러의 금전적 지원 아래 엘리트들이 설립한 '삼각위원회'는 거의 무명이나 다름없는 지미 카터 조지아주 주지사를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다.

     

    지미 카터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 삼각위원회의 핵심 멤버 26명은 대통령 측근으로 포진했다.

    이들 중 대부분은 카터 대통령과 일면식도 없던 사람들이었다.

     

    카터 대통령 집권 이후부터 금융 규제도 서서히 완화되기 시작했다.

    이후 레이건 대통령은 탈규제와 사유화에 중점을 둔 정책을 밀어붙였고, 조지 부시 행정부도 레이건 정부의 정책을 이어받아 더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클린턴 행정부 시절에 도입한 '금융서비스 현대화법'은 금융 탈규제 정책의 완결판이었다.

    이 법안으로 인해 정부는 금융업의 핵심 지대에서 철저하게 밀려났다.

     

    이후의 조지 부시 대통령은 한 술 더 떠 정부 권력을 울타리에 가둬넣을 것이라고 호언했다.

    버락 오바마 역시 부자 집단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빈부 격차를 미국 건국 이래 최고 수준으로 심화시켰다.

     

     

    소득 불균형보다 더 심각한 자산 불균형

    부자들이 1976년 발기한 '부의 재분배 혁명'은 가장 먼저 화폐정책을 타깃으로 삼았다.

    통화주의 사상의 발상지인 시카고대학은 록펠러재단의 기부금으로 설립된 학교로 유명하다.

     

    이 통화주의 사상은 부자들이 사회적 부를 탈취하는데 큰 공로를 세웠다.

    통화주의 사상의 대표자인 밀턴 프리드먼은 지배집단의 요구에 따라 직접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마거릿 대처 영국 수장에게 통화주의 통치철학을 설파했다.

     

    통화정책은 이들에 의해 모든 경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만병통치약'으로 신격화됐다.

    앨런 그린스펀은 1987년 증시 악재에 대처하기 위해 출범한 통화완화정책은 슈퍼 리치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Fed는 월스트리트에서 위기가 발생하면 먼저 돈을 마구 찍어내는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유동성 공급과 금리 인하는 그린스펀의 가장 뛰어난 장기였다.

     

    그린스펀의 후임으로 Fed 의장이 된 벤 버냉키는 한술 더 떠 은행에 대한 구제금융 규모를 역대 최고 수준으로 확대해버렸다.

    '대공황 전문가'인 그는 Fed가 1929~1933년 사이에 필요한 만큼 돈을 풀어 은행을 구제하지 않은 것이 최대 실책이라고 지적했다.

     

    Fed의 정성어린 보살핌 아래 월스트리트 큰손들은 걱정의 씨앗을 싹 잘라버리고 돈벌이에만 매진했다.

    1980년대까지 겨우 수백억 달러의 자산을 보유했던 월스트리트 투자은행들은 초단기 융자 수단인 환매채와 상업어음 거래에 손을 대기 시작한 후, 잇따른 '채권 굴리기'를 통해 자산 규모를 끊임없이 확대했다.

     

    2008년 금융위기 발생 전 투자은행들의 보유 자산 규모는 수조 달러에 달해 1980년대 대비 수백 배나 증가했다.

    1976년은 부의 분배 불균형이 시작된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다.

     

    금융위기 발생 이후 미국의 부채 규모는 서시히 증가한 것이 아니라 순식간에 늘어났다.

    2008년과 2009년 2년 사이에만 5조 달러의 부채가 새로 증가했다.

    이는 1976년까지 350년 동안 축적한 부채 규모에 맞먹는 액수였다.

     

    혹자는 화폐 가치 하락이 재정적자의 결과라고 말한다.

    그런데 재정적자는 부의 50% 이상을 차지한 부자들의 세금 회피 때문에 생긴 것이다.

    따라서 화폐가치 하락의 근본 원인은 부자들의 탐욕과 부의 집중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라쿠스 형제의 토지개혁

    카르타고와의 전쟁에서 용맹을 떨치며 크게 이름을 날린 그라쿠스는 이후 파격적으로 로마 제사단의 점술관에 임명됐다.

    그는 이탈리아 중부의 에트루리아를 지나갈 때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했다.

     

    사방이 온통 황량하게 버려진 토지와 폐허가 된 농장으로 가득한데다 농민들은 막중한 채무와 농산물 가격 하락의 이중고를 견디지 못하고 잇달라 파산해버린 것이다.

     

    로마 귀족과 대상인들은 이 틈을 타서 토지를 대거 겸병했고, 땅을 잃은 수많은 농민들은 살길을 찾아 유랑하는 신세가 돼 버렸다.

    로마가 제2차 포에니 전쟁을 통해 약탈한 토지는 무려 400만 유겔론(약 200만 헥타르)에 달했다.

     

    여기에 수차례의 영토 확장을 통해 편입한 땅까지 합치면 그 면적이 어마어마했다.

    이 토지들은 이름만 '국유지'일 뿐 이미 오래전부터 귀족과 대상인들이 나눠 가졌다.

     

    그라쿠스는 호민관에 당선된 후 제정한 토지개혁 법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공유지의 점유 면적을 1인당 최대 500유겔론으로 정하고 전체 가족이 1000유겔론을 넘지 못한다.

    1,000유겔론이 넘는 부분은 국가에서 몰수해 땅이 없는 농민에게 한 사람당 30유겔론씩 나눠준다.

    다른 사람의 땅을 빼앗지 못하고 남에게 양도해서도 안 되나 자식에게는 물려줄 수는 있다.

    농지 분배 3인 위원에게 우선 사유지와 공유지를 구분한 후 법정한도를 초과한 공유지를 몰수하고 분배토록 하는 독자적인 사법권을 부여한다."

     

    그라쿠스의 신법이 감히 귀족과 대상인의 민감한 신경을 건드렸으니 그를 살려둘 리 있겠는가.

    귀족 출신인 그라쿠스가 귀족 집단의 이익을 배신하자 원로원은 그를 '계급의 이단아'로 치부해 폭력이라는 극단적은 수단으로 제거한 것이다.

     

    그라쿠스의 동생인 가이우스 그라쿠스도 122년 호민관에 당선되어, 형의 유지를 이어 받아 개혁 정책을 토대로 토지의 점유 제한 범위를 한층 더 확대했지만, 원로원 귀족들은 군사들을 보내 가이우스의 목을 베고 토지개혁을 지지한 3,000여 명의 추종자를 학살해 티베르강 전체가 붉은 피로 물들었다.

     

    로마의 역사학자 아피아누스는 일찍이 이렇게 말했다.

    "대상인과 귀족들은 채 분배하지 않은 토지를 대거 점유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은 더욱 대담해져 자신들이 보유한 토지를 빼앗기는 일은 영원히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들은 인근 지역 가난한 사람들의 농지를 병탄했는데, 좋은 말로 설득해서 매입한 것도 있으나 폭력을 동원해 강제로 빼앗은 땅도 많았다.

    나중에는 농지 점유 면적이 점점 커지면서 소규모의 전답이 아닌 농업과 목축업을 병행한 대농장 경영 형태를 취했다.

    주요 노동력은 노예들이었다."

     

    <세계사>를 쓴 스타브리아노스는 다음과 같이 개탄했다.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와 가이우스 그라쿠스 형제는 용감하게 개혁을 단행했다.

    두 사람은 경선으로 선출된 호민관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온화한 방식으로 토지 분배 제도를 개혁하려고 했다.

    그러나 과두 세력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고, 반대파들은 심지어 폭력적 수단도 서슴지 않았다.

    ... 그라쿠스 형제의 비극으로부터 온화하고 질서 있는 개혁은 절대 성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0%의 부자가 국민소득의 50%를 차지하는 현실의 의미

    북송 시대 인종 말년에 6%의 귀족과 부자 집단은 전국 토지의 60~70%를 차지해 국민소득의 절반 이상을 석권했다.

    북송 정부는 부의 양극화가 갈수록 심해져 사회위기로 이어질 조짐을 보이자 토지 겸병을 억제하기 위해 왕안석 신법을 도입했다.

     

    이 시기가 바로 인종의 성세가 갓 끝났을 무렵이었다.

    북송의 사회경제는 왕안석 개혁 실패 후 약 30년 동안 정체기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다가 부자 집단의 토지 겸병이 절정으로 치달으면서 이후 20년 사이에 빠르게 붕괴했다.

     

    미국에서도 북송 때와 똑같은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2008년 이후 미국의 상위 10% 부자의 국민소득 점유율은 이미 50% 한계점을 돌파했다.

     

    큰 전쟁이나 혁명이 발발하지 않는 한, 제도적 힘에 의해 현 상태를 변화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얘기가 된다.

    오바마의 금융개혁과 의료개혁이 모두 실패한 것이 바로 그 증거이다.

    빈부 격차가 이토록 심한 상황에서는 경기 회복에 기대를 걸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