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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안에 잠든 거인을 깨워라

     

     

     

    단기적인 것에 집착해서 국민을 폭포 아래로 떨어뜨린 1990년대 초 미국 금융위기

    그것은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초에 걸쳐 이미 발생하기 시작한 예금과 대출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은행과 종합금융회사들은 기업금융과 소비자 금융에 치중하고 있었다.

     

    은행은 이익을 발생시키려면 돈을 대출해 주어야 한다.

    이때 대출금 이자는 예금주들에게 지급하는 이자보다 더 높아야 한다.

     

    이 기본적인 문제의 첫 단계에서 은행들은 여러 가지 문제에 부닥치게 되었다.

    기업이 은행의 고유 영역이었던 대출 사업에 뛰어든 것이다.

    은행은 물론 큰 타격을 입었다.

     

    대기업은 서로에게 돈을 빌려주면서 소위 '상업어음'이라 불리는 상품을 개발해 상당한 이자를 절약했다.

    이 상품이 대단한 성공을 거두자, 은행의 수익 원천이 무너졌다. ​

     

    그러는 가운데 미국의 소비자들에게도 새로운 발전이 있었다.

    전통적으로 소비자는 자동차나 가전제품을 사려고 대출 신청할 때, 은행 대출 담당자를 만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나도 은행 직원이 고객의 재정 상태를 면밀히 검토하는 것을 별로 즐겁게 생각하지 않는다.

    고객들은 대부분 은행에서 '우수 고객'이란 느낌을 받지 못했다.

     

    자동차 회사들은 이런 사실을 알아차렸다.

    자동차 회사는 고객에게 직접 대출을 해주면서 또 다른 수익을 창출하기 시작했다. ​

     

    자동차 회사들은 대출을 통해 자동차를 팔면 수익 이외에 또 다른 이익을 남길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고객들에게 많은 편의를 제공하면서 은행보다 낮은 이자율을 적용했다.

     

    그들이 고객을 대하는 태도는 은행 직원들과는 현저하게 달랐다.

    또한 대출을 원하는 고객을 만나는 데도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소비자들은 편리함과 융통성, 낮은 이자율 등의 장점을 즐기면서, 전통적인 은행 대출 방법보다 물품을 살 때 그곳에서 직접 대출받는 것을 선호하게 되었다.

     

    정중한 태도로 서비스하는 직원으로부터 구매와 대출을 한꺼번에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제너럴 모터스 대출회사는 미국에서 가장 큰 자동차 대출 전문 회사가 되었다. ​

     

    은행 대출의 핵심사업 가운에 하나는 부동산 시장이었다.

    인플레이션으로 말미암아 이자율이 연 18퍼센트까지 치솟게 되자 아무도 그 이자율을 감당할 수 없었다.

     

    누구나 예상할 수 있듯이 부동산 담보 대출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

    그때 은행들은 무더기로 기업고객을 잃었다. 자동차 대출 시장도 잃었다.

     

    게다가 은행이 치명타를 입은 것은, 대출이자보다 더 높은 예금이자였다.

    은행은 하루하루 큰 적자를 보고 있었다.

     

    생존의 문제가 경각에 달렸으므로 두 가지 결단을 내렸다.

    첫 번째는 은행이 대출 자격 조건을 낮춘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대출할 손님이 없기 때문이었다.

    대출을 해주지 못하면 수익을 낼 수 없다.

     

    그것은 대단히 큰 고통이었다.

    대출금 상환이 확실한 사람에게만 대출해 줄 수 있다면 좋다.

     

    그러면 위험부담이 별로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만일 사람들이 대출을 받고 갚지 않으면 납세자들이 해결해야 할 몫이 된다.

     

    따라서 은행으로서는 별로 고통스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자본금을 잠식할 수도 있는 위험한 일임에도 큰 유혹을 느끼게 된 것이다. ​

     

    이런 은행과 종합금융회사가 국회에 압력을 가해서 파산을 막아달라고 요청함으로써 또 다른 변화가 일어났다.

    대형은행은 절실하게 돈이 필요한 외국에 돈을 빌려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한 국가에 간단하게 5천만 달러가 넘는 큰 금액을 빌려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국내에서 같은 금액의 돈을 대출해 주려면 수백만 명의 고객을 상대해야 한다.

     

    그러나 외국에 돈을 빌려줄 때는 그럴 필요가 없는 데다 수익도 대단했다.

    은행 관리자들과 대출 담당 간부들은 대출 실적에 따라 자주 보너스를 받곤 했다.

     

    은행은 대출의 질에 대해서 더 이상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들은 브라질 같은 나라가 대출금 상환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는 별 관심이 없었다.

     

    왜 그랬을까?

    잘하면 큰 이익이 생기고 실패하면 국민이 손실을 떠맡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이 되니 은행 사람들은 거의 고통을 느낄 필요가 없었다. ​

    외국에 대출할 능력이 없는 소규모 은행은 차선책으로 건설업자에게 대출해 주는 것을 선택했다.

     

    건설업자의 대출 기준을 낮춰 주었다.

    건설업자는 전통적으로 20퍼센트 정도의 착수금이 있어야 하는데, 이제 돈 한 푼 없이도 건축할 수 있게 되었다.

     

    건설업자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그들은 돈 한 푼 없이 은행 자금을 이용할 수 있는 데다 국회에서 상업용 건물에 주는 많은 세금 혜택까지 받았다.

     

    건설업자는 정말 손해 볼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은 수익성이 있는지, 건물이 적당한 규모로 들어서는 것인지 분석할 필요가 없어졌다.

     

    게다가 엄청난 세금공제까지 받게 되었으니 말이다. ​

    건설업자들은 신나게 건물을 지었다.

     

    곧 시장은 공급 과잉이 되었고 공급이 수요를 훨씬 초과하게 되자 시장은 붕괴했다.

    건설업자는 은행에 가서 "이제 상환 능력이 없습니다" 하고 말하게 되었다.

     

    불행하게도 국민은 그 짐을 떠맡길 곳이 없었다. ​

    더 큰 문제는 이 나라에서 부패를 목격하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부자를 보면 다른 사람을 이용해서 부정축재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국민은 사업하는 이들에게 부정적인 태도를 갖게 되었다.

     

    사업가야말로 아메리칸드림을 성취하도록 많은 사람에게 일자를 만들어주는 사람인데도 말이다.

    이런 모든 혼란은 고통과 즐거움의 역할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일시적인 해결책으로 장기적은 문제를 해결하려 한 무능함 때문이었다. ​ ​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말, 즉 삶의 감정을 묘사하려고 빈번히 사용하는 그 말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생각하는 방식, 느끼는 방식, 심지어는 살아가는 방식을 변화시킬 수 있다.

    나는 이 사실을 몇 년 전 상담에 참석했을 때 처음으로 깨달았다.

    그때 나는 다른 두 명과 함께 있었다.

     

    한 명은 당시 내 회사의 CEO였고, 다른 한 명은 내 친구이자 동업자였다.

    회의 도중 우리는 좋지 않은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우리가 협상을 진행하고 있는 상대 중 한 명이 '불공정한 이익을 노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가 계약을 위반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보다 유리한 위치에서 협상을 하고 있다고 했다.

     

    소식을 들은 나는 화가 치밀고 불쾌했다.

    그 상황에서도 옆에 있는 두 사람이 같은 이야기에 각각 얼마나 다르게 반응하는가를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다.

     

    ​ CEO는 분노가 치미는 것을 주체하지 못했다.

    반면에 내 친구는 좀처럼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우리 셋 모두가 똑같이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는데 어쩌면 그렇게 다른 반응을 보일 수 있을까?

    솔직히 내가 보기에도 그 CEO의 격렬한 반응이 너무 지나쳐 보였다.

     

    그는 얼굴이 새빨개지더니 이마와 목에 핏대가 설 정도였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화가 치밀고' '분개했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투덜거렸다. ​ 분명히 그는 자신의 분모를 다스리기 위해 고통을 줄이고 줄거움을 얻을 수 있는 방향으로 행동했다.

     

    화가 난다는 것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이 일에 대해 왜 그렇게 격렬한 반응을 보이는지 내가 물어보자,

    그는 여전히 화가 나 이를 악문 채 대답했다.

     

    "분노가 치밀면 사람은 더 강해져요.

    더 강해지면 무슨 일이든지 바꿔놓을 수가 있습니다.

    주변의 어떤 일이든지 말입니다!"

     

    그는 분노의 감정이 고통에서 빠져나와 사업을 제대로 통제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게 해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

    나는 마음에 있던 다음 질문을 했다.

     

    왜 내 친구는 같은 상황에서도 별로 마음이 동요하지 않았을까?

    나는 친구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일에 별로 언짢은 기색이 없군. 화도 안 나나?"

    CEO도 한마디 거들었다.

    "이 꼴을 보고도 화가 치밀지 않습니까?"

     

    하지만, 친구의 대답은 뜻밖에 간단했다.

    "그래, 화낼 가치도 없는 일이지." ​

     

    이 말을 듣고나서 나는 그를 알고 지낸 몇 년 동안 그가 무슨 일에든 심하게 화내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화가 난다는 것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물어보자 친구는 이렇게 대답했다.

    "화가 나면 자제력을 상실하게 되지."

     

    "재미있군."

    나는 그의 말에 흥미를 느꼈다.

     

    "자제력을 상실하면 어떻게 되지?"

    이번 대답 역시 간단했다.

     

    "그러면 상대방이 이기는 걸세."

     내가 정말로 관심을 두었던 부분은 같은 일을 겪으면서 사용하는 말의 차이였다.

     

    나는 '화가 나고' '불쾌하다'는 표현을 사용했고, CEO는 '격노했고' '분개했다'라고 말했으며, 친구는 '좀 성가시다'라고 했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소리였다.

     

    성가시다고?

    나는 몸을 돌려 친구에게 말했다.

     

    "겨우 좀 성가신 게 전부란 말이야? 가끔은 정말로 화를 내거나 불쾌해 할 줄도 알아야 되는 거 아닌가?"

    "그렇지 않네. 그러려면 도저히 화를 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만한 일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일이란 거의 없거든." ​

     

    "국세청이 자기들 잘못 때문에 자네 돈 250만 달러를 삼켜버렸던 때를 기억하나? 그 손실을 만회하는 데 자그마치 2년 반이란 세월이 걸렸어. 그 일에도 화가 나지 않는다고?"

     

    CEO가 끼어들었다.

    "노발대발하지 않았습니까?"

     

    친구가 대답했다.

    "아니, 화나진 않았네. 약이 좀 오르긴 하더군." ​

     

    약이 좀 올랐다고?

    말도 안 되는 바보 같은 소리였다.

     

    친구는 마치 내가 들었으면 돌아버렸을 만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즐기는 듯했다.

    나는 궁금해졌다.

     

    "내 감정을 표현하는 데 '약 오른다'는 단어를 사용했다면 기분이 어땠을까?

    평소의 나라면 스트레스를 받아 녹초가 되었을 텐데......

    나도 저 친구처럼 웃을 수 있을까? 한번 생각해 볼 만한 일이군." ​

     

    그 일이 있은 후 며칠 동안 나는 친구의 언어 사용 방식과 그것이 내 감정의 강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흥미롭게 관찰했다.

     

    내가 정말로 화가 나 있을 때 누군가에게 "이 일 때문에 약이 꽤 오르는걸"이라고 말한다면 어떨까?

    하도 뚱딴지같은 생각이라 상상만 해도 웃음이 절로 나왔다.

     

    나는 순전히 재미 삼아 그 말을 한번 사용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

    이것을 실습할 기회가 왔다.

     

    비행기를 타고 밤새도록 날아 겨우 호텔에 도착했을 때였다.

    우리 회사 직원이 미리 예약해 놓지 않은 탓에, 나는 몹시 지쳐 서 있기도 힘든 상태에서 거의 20분 동안 프런트 앞에 우두커니 서서 기다려야 했다. ​

     

    마지못해 체크인 카운터에 나온 호텔 직원은 달팽이처럼 느릿느릿 컴퓨터에 내 이름을 처넣기 시작했다.

    '화가 조금' 나기 시작한 나는 직원에게 말했다.

     

    "당신 탓이 아니라는 것 알지만, 지금 몹시 지쳐 있는 상태입니다. 빨리 방에 가서 쉬고 싶군요.

    여기에 더 서 있어야 한다면 약이 좀 오를 것 같네요." ​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던 직원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함께 웃었다.

     

    나는 평소에는 결코 해 본 적이 없는 행동을 했다.

    속에서 끓어오르던 화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그리고 의외의 일이 두 가지 벌어졌다.

    나는 호텔 직원과 함께 있는 그 몇 분을 즐겁게 기다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아까보다 빨리 일을 처리해 주었다.

    똑같은 감정에 단지 다른 이름을 붙이기만 한 것인데 행동 패턴뿐만 아니라 경험까지 바뀔 수 있다니!

     

    이렇게 쉬울 수가 있나?

    얼마나 기발한 발상인가! ​ ​

     

     

    '변형 어휘'를 사용하여 사람들을 변화시켜라

    단지 말 한마디를 바꿈으로써 어떤 변화가 가능한지를 보여주는 훌륭한 예가 있다.

    수년 전 전국 트럭 화물 서비스 회사인 PIE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 회사의 고위 간부들은 운송계약의 60퍼센트가 잘못되어 있는 바람에 매년 25만 달러에 달하는 손실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PIE는 그 이유를 밝혀내려고 W. 에드워드 데밍 박사를 고용했다.

    집중적인 연구 끝에, 이 실수들의 56퍼센트는 회사 일꾼들이 컨테이너를 제대로 식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데밍 박사의 조언에 따라 PIE 간부들은 회사 전반에 걸쳐 업무의 질적 개선을 실행하기로 했다.

    그 결과 최선책은 작업자들이 자신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는 방식을 바꾸는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작업자'나 '트럭 운전사' 대신에 그들 자신을 '장인'이라고 부르게 했다. ​

    처음에는 모두 장인이란 호칭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직업에 대해 호칭 하나를 바꾼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사실상 호칭 이외에는 바뀐 것이 없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말을 일상적으로 사용한 결과 작업자들은 자신을 '장인'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PIE 사의 56퍼센트에 달하던 배송 관련 실수는 10퍼센트로 줄어들었다.

    결국, 연간 25만 달러에 달하는 비용 절감 효과를 얻게 되었다. ​ ​

     

     

    나는 지금 우리는 언제 어느 때라도 원하는 감정을 자유자재로 느낄 수 있다는 점을 말해주고 싶다.

    내가 사는 캘리포니아 델 마르 근처에서 열린 세미나에서 있었던 일이다.

    나는 자기감정의 진정한 책임자가 누구인지 스스로 알 수 있게 하는 재미있는 앵커링(특정 반응과 자극을 연결하는 작업)을 하나 고안했다.

     

    이 세미나는 바닷가에 있는 고급 호텔에서 열렸는데 기찻길 근처라서 하루 네 번 정도 요란한 기적소리가 들려왔다.

    세미나에 참석한 사람 가운데 몇몇이 이 기적소리에 짜증 냈다.

     

    나는 짜증 난 감정을 유쾌한 감정으로 바꿀 수 있는 더할 나위 없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

    나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부터 시끄러운 기적소리가 들릴 때마다 축하하도록 하겠습니다.

    기적소리가 들릴 때마다 기분이 얼마나 좋아질 수 있는지 지켜보겠습니다.

    우리는 늘 기분이 좋아지려면 어떤 사람을 만나거나 어떤 상황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게 기분 좋아지기 위한 적당한 조건인지는 대체 누가 결정하는 걸까요?

    기분이 좋다면, 그렇게 만드는 건 누구일까요?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기분이 좋아지려면 이러저러한 일이 순서대로 일어나야 한다는 규칙을 정해놓고 있습니다.

    왜 마냥 기다려야 합니까?

    왜 기적소리를 들을 때마다 기분이 좋아진다는 규칙을 만들면 안 됩니까?

    기분이 좋아지기 위해서 만나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비하면,

    적어도 기적소리는 일관성이 있고 예측하기도 쉬운데 말입니다." ​

     

    그러고 나서, 우리는 기차의 굉음을 들을 때마다 환호하기로 했다.

    사람들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춤추고 소리를 지르며 정신 나간 사람들처럼 굴었다.

     

    그중에는 의사나 변호사, 대기업 사장같이 이곳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지적이라고 대접받던 사람들도 있었다.

    사람들이 모두 자리에 앉고 나면 으레 박장대소를 하곤 했다.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일까?

    기분이 좋아지려면 특별한 일이 벌어지거나 특별한 사람이 나타나기를 기다려야 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기분이 좋아지는 데에는 어떤 특별한 이유도 필요 없다.

    다만, 자신이 살아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리고 그렇게 하고 싶다는 이유만으로도 지금 당장 기분이 좋아지겠다고 결심할 수 있다. ​ ​

     

     

    화가 나는 것은 규칙의 혼란 때문이다

    이것은 베키와 내가 처음 사귀기 시작했을 때 일어났던 일이다.

    우리는 서로 상대를 어떤 식으로 존중할 것인지에 대해 극단적으로 상반되는 규칙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정직하지 않으면 힘들어하는 환경에서 성장했다.

    누군가 나와 대화하다가 중간에 일어나 나가버리면 큰 실례라고 알고 있었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규칙은 솔직하게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었고,

    다만 내가 틀렸을 수도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어야 하며,

    모든 일이 결정될 때까지는 자리를 뜨지 말고 계속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

     

    베키는 이 규칙과는 매우 대조적이면서도 분명한 규칙이 있는 가정에서 자랐다.

    그 규칙은 "좋은 말을 해줄 게 없으면 아무 말도 하지 마라, 상대를 존중한다면 절대 언성을 높이지 마라, 상대방이 언성을 높이거든, 자신의 긍지를 지키는 유일한 방법은 말없이 일어나 나가는 것이다"였다. ​

     

    존중을 표현하는 방식에 대한 규칙이 이토록 서로 달랐다.

    그래서 베키와 나는 서로 미칠 지경이었다.

     

    우리는 이 문제 때문에 잘못하면 결혼하지 못할 뻔했다.

    우리가 어디로 갈지, 무엇일 입을지, 우리가 누구인지, 용납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은 무엇인지, 어떤 사람들을 친구로 사귀는지, 우리는 슬픈지 기쁜지 등 모든 것은 규칙이 결정한다. ​

     

    어떤 사람은 화가 났을 때 이런 규칙을 갖고 대처한다.

    "당신이 나를 배려한다면, 내가 알아서 화를 풀 테니 혼자 있게 내버려둬요."

     

    다른 사람의 규칙은 이럴 수도 있다.

    "누군가 화가 나 있을 때, 내가 그를 배려한다면 도와줄 방법을 찾아야 해."

    이 두 규칙은 대단한 갈등을 유발한다.

     

    두 사람 모두 상대를 존중하고 관심을 기울인다는 같은 목적을 이루려 한다.

    그러나 그들의 규칙은 서로 다른 행동을 유발하고, 상대방의 행동은 각자의 규칙에 따라 해석해 볼 때 원래 의도와는 정반대로 보이게 된다. ​

     

    그러므로 우리가 누군가에게 분노를 느끼거나 화를 낸다면, 우리를 화나게 하는 것은 그들의 행동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규칙이라는 점을 명심하라. ​ ​

     

     

    극심한 고통은 정체성의 위기를 부른다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핵심적인 신념을 깨는 일은 누구에게나 극심한 고통을 안겨준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신념을 지키려고 자살까지도 불사한다.

     

    빅토르 위고의 명작 '레 미제라블'에 이런 상황이 잘 나타나 있다.

    교도소에서 석방된 주인공 장 발장은 외로움 때문에 좌절한다.

     

    그는 굶고 있는 가족을 위해 빵 하나를 훔쳤을 뿐인데, 여러 해 동안의 고된 징역형을 언도받는다.

    교도소에서 보낸 여러 해 동안 그는 '죄수'라는 이름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석방된 후 아무 곳에서도 직장을 구할 수가 없었다.

    단지 전과자라는 이유 때문에 가는 곳마다 조롱과 거절을 당해야 했던 것이다. ​

     

    마침내 그는 자신에게 씌워진 '죄수'라는 이름을 정체성으로 받아들이고 만다.

    그 후부터 그는 자신의 정체성에 맞게 행동한다.

     

    자신을 보살펴 준 신부의 은 수저를 훔쳐 달아나던 그는 결국 경찰에 체포된다.

    평생을 고된 징역형으로 보내게 될 그 순간, 은 수저의 주인인 신부는 경찰에게 거짓 증언을 한다.

     

    그 은 수저는 자기가 선물로 준 것이고, 은촛대도 주었는데, 장 발장이 가져가는 것을 잊었다고 말이다.

    경찰이 장 발장을 풀어주자 신부는 은 수저를 주면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라고 말한다. ​

     

    장 발장은 신부의 행동에 고심하기 시작한다.

    왜 자신을 믿어준 것일까?

    왜 자기를 고발해서 교도소로 보내지 않을 것일까?

     

    신부는 장 발장에게 '형제'라고 부르며 그가 악에 속하지 않은 진실한 사람이 되었으며,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강력한 패턴 깨기가 장 발장의 정체성을 바꾸어놓았다.

     

    장 발장은 수감 증명서를 찢어버리고 다른 도시로 가서 새로운 정체성을 받아들인다.

    이제 그의 모든 행동이 바뀌었다.

     

    그는 사회 지도자가 되어 다른 사람들을 도왔다. ​

    그러나 자베르 경감은 장 발장을 다시 체포하려고 나선다.

     

    그는 장 발장이 악마라고 '알고'있다.

    그는 악마를 체포해서 정의의 심판대에 세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끊임없이 그를 뒤쫓으며 괴롭히던 자베르는 결국 그와 맞닥뜨리게 되지만, 상황은 자베르에게 몹시 불리했다.

    장 발장은 그동안 자베르에게 당해온 고통에 복수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

     

    그러나 장 발장은 그를 그대로 보내준다.

    오랫동안 뒤쫓아 왔던 장 발장과 마주친 그 순간, 자베르는 그가 좋은 사람이며 어쩌면 자신보다 더 나은 사람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자신이 그토록 증오했던 사람보다 자신이 더 사악한 사람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자베르는 센 강에 몸을 던지고 만다. ​ ​

     

     

    유산소 운동과 무산소 운동

    우리의 건강을 바람직한 상태로 만들려면 우선 유산소 운동과 무산소 운동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

    유산소 운동이란 글자 그대로 '산소가 있어야 하는'운동으로, 일정 시간 동안 지속하기에 적당한 운동이다.

     

    산소가 필요한 조직은 지구력과 관련된 조직으로 심장·폐·혈관·유산소 근육이 이에 해당한다.

    적당한 다이어트와 운동으로 유산소 조직을 활성화하면 1차 연료로 지방을 태운다. ​

     

    무산소 운동은 '산소가 필요 없는' 운동으로, 단시간에 힘을 집중하는 운동을 말한다.

    무산소 운동은 1차 연료로 글리코겐을 태우지만, 지방은 건드리지 않고 그냥 몸속에 쌓아 놓는다.

     

    유전적으로 지방을 태우는 능력이 사람마다 조금씩 차이가 나기도 한다.

    실제로 매우 좋은 유산소 조직을 갖추고 태어난 사람도 있다.

     

    아무리 먹어도 몸무게가 전혀 늘어나지 않는, 우리가 부러워하는 사람들이다. ​

    무산소 운동은 우리 몸이 다른 용도로 사용해야 하는 혈당을 빼앗아 가기 때문에 바로 안 좋은 느낌이 찾아온다.

     

    우리 신경시스템은 혈당량의 3분의 2 정도를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무산소 운동으로 혈당이 결핍되면 두통이나 방향감각 상실 같은 신경근육 계통의 문제를 일으킨다.

     

    산소결핍으로 생기는 증상은 피로감, 운동 중 빈번한 부상, 낮은 혈당치, 의기소침과 불안 증세, 지방 대사 문제, 월경 전 증후군, 순환계 문제, 관절 경직 등이다. ​

     

    우리는 지금 무산소 운동은 과도하게 많고, 유산소 운동은 매우 부족한 사회에 살고 있다.

    이 때문에 국민 건강의 질이 떨어지고 있다. ​

     

    운동하는 중에 산소를 감소시키지 말아야 한다.

    유산소 운동에서 무산소 운동으로 넘어갔는지 알고 싶으면 간단한 방법이 있다.

     

    운동할 때, 말할 수 있는가?

    그러면 유산소 운동이다.

     

    숨이 차서 괴로운가?

    그렇다면, 무산소 운동이다.

     

    숨쉬기가 일정하고, 숨 쉬는 소리가 들리더라도 힘들지 않아야 한다.

    운동할 때 어떤 느낌인가?

     

    유산소 운동을 하고 있으면 피곤하더라도 유쾌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