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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소유냐 존재냐

     

     

     

    루트 난다 안젠의 후기

    이 책은 여러 다른 분야에서 책임 있는 동시대사상가들의 단편적 저술들을 알리는 것을 과제로 삼은 ‘세계관들’을 하나로 묶은 것이다.

     

    그 의도는 현재 문명의 기조를 이루는 새로운 방향들을 제시하고, 동서양을 막론하고 일고 있는 창조적 힘들을 해석하며, 나아가서 인간과 우주, 개인과 사회 간의 상호 관계와 아울러 모든 민족들이 공유하는 가치에 대한 이해를 한층 깊게 하는 새로운 의식을 밝히는 것이다.

     

    이 ‘세계관들’은 일종의 우주적인 대화 속에서 이념들의 세계 공동체를 대표한다.

    그리고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인류는 하나라는 원칙과 변화 속에서의 존속의 원칙이다. ​

     

     

    위대한 약속은 왜 실현될 수 없었는가?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1954년 11월 4일 노벨 평화상을 받으러 오슬로에 왔을 때 온 세계인을 향해서 다음과 같이 호소했다.

    ‘과감히 지금의 상황을 보십시오.

    인간이 초인이 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

    이 초인은 초인적 힘을 지닐만 한 이성적 수준에는 올라서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이전에는 온전히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던 사실,

    이 초인은 자신의 힘이 커짐과 동시에 점점 더 초라한 인간이 되어간다는 사실이 이제는 명명백백해졌습니다. ...

    그러나 근본적으로 우리가 의식해야 할 점은, 이미 오래전에 의식해야만 했던 점은 초인으로서의 우리는 비인간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

     

    위대한 약속이 실현되지 못한 근거는 산업주의 체계에 내재한 경제적 모순들 이외에도 그 체계 자체가 지녔던 두 가지 중요한 심리학적 전제들에서 찾을 수 있다.

     

    첫째, 삶의 목적은 행복이라는 다시 말하면 최대치의 쾌락이라는 전제이다.

    행복이라는 것을 인간이 품을 수 있는, 모든 소망 또는 주관적 욕구의 충족으로 이해한 점이다.(궁극적 쾌락주의)

    둘째, 자기중심주의, 이기심, 탐욕이 조화와 평화로 통하리라는 전제이다. ​

     

     

    인간의 변화를 위한 경제적 필연성

    지금까지 나는 우리의 사회경제적 체계, 즉 우리의 생활방식의 특성들이 병적 요소를 품고 있으며, 따라서 그것이 병든 인간과 병든 사회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이 책의 중심 주제는 인간의 두 가지 실존 양식, 즉 소유 양식과 존재양식을 분석하는 것이다.

    첫째 장에서는 일반적으로 눈에 띄는 두 실존 양식의 차이에 대해서 몇 가지 고찰하기로 한다.

    둘째 장에서는 독자도 쉽게 자신의 경험과 끼워 맞출 수 있는 일상생활에서의 실례들을 통해서 두 양식의 차이를 제시할 것이다.

    셋째 장은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그리고 에크하르트 수사의 저술에서 발견되는 소유와 존재에 관한 견해들을 내포하고 있다.

     

    그 이후의 장들에서 제시한 것은 나로서도 가장 어려운 과제들이다.

    그것은 소유 양식과 존재양식의 차이를 분석하는 작업으로, 작업과정에서 나는 경험적 자료들을 토대로 이론적 결론을 끌어내는 시도를 하기도 한다.

     

    여기까지 이 책은 인간의 두 가지 기본적 실존 양식을 주로 개인의 측면에서 다루었다.

    이와는 달리 마지막 장에서는 새로운 인간과 새로운 사회를 태동시키는 데에서의 두 실존 양식의 중요성을 고찰하고, 파국에 맞서서, 소모적인 개인의 병든 상태와 파멸을 향해 가는 전 세계의 사회 경제적 발전에 맞서서, 그것에 대처할 선택의 가능성들을 구명하고자 한다. ​

     

     

    언어 관용

    뒤 마레가 동사를 명사로 대치하는 현상을 주목한 1세기 후에, 마르크스와 엥겔스도 같은 문제를 다루었다.

    물론 이들의 방식은 뒤 마레의 경우보다 훨씬 더 근본적이었다.

     

    에드가 바우어의 ‘비판적 비평’에 대한 그들의 비판에는 간략하되 사랑에 관한 아주 중요한 에세이가 포함되어 있는데, 거기서 그들은 바우어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하고 있다.

     

    ‘사랑은 ... 잔인한 여신이다.

    모든 신이 그러하듯 이 여신은 인간의 모든 것을 소유하려고 한다.

    인간이 자신의 영혼뿐 아니라 육체적 자아까지 모두 바칠 때까지 만족할 줄을 모른다.

    이 여신을 섬기는 일은 고통이며, 그 절정은 자기희생이요, 자살이다.’ ​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것에 대해서 답한다.

    ‘에드가 선생은 사랑하는 인간,

    그리고 인간의 사랑을 사랑에 속한 인간으로 만듦으로써,

    사랑을 인간에게서 격리시켜 그 자체로 독립된 실체로 만듦으로써 ’사랑‘을 ’여신‘으로 그것도 ’잔인한 여신‘으로 변모시키고 있다.

     

    여기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동사 대신 명사를 사용하는 어법의 결정적 요체를 건드린다.

    사랑이라는 행위와 추상화에 불과한 명사 ‘사랑’이 인간에게서 분리된다.

    사랑하는 인간은 사랑에 속한 인간이 된다.

    사랑은 여신으로, 인간의 사랑을 투영한 우상으로 변한다.

     

    이와 같은 소외 과정에서 인간은 사랑을 체험하기를 중단하고,

    다만 사랑의 여신에게 굴종하는 것에 의해서 자신의 사랑하는 능력과 묶여 있게 된다.

     

    그는 스스로 감정을 지닌 인간이기를 멈추었고,

    소외된 우상 숭배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정신과 의사와 상담에 임한 한 부인이 다음과 같이 말문을 열었다고 하자.

    ‘박사님, 나는 문제를 하나 가지고 있습니다.’

    몇십 년 전이라면 이 환자는 ‘나는 문제를 하나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대신

    분명히 ‘나는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이런 현대의 언어 양식은 오늘날의 소외 현상의 한 증거이다.

    ‘나는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라고 말 대신에

    ‘나는 문제를 하나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주체적 경험은 배제된다.

     

    경험적 자아가 그가 소유한 그것으로 대치되는 것이다.

    나는 나의 감정들을 내가 소유한 무엇으로, 즉 문제로 변형시키고 있다.

    ‘문제’란 모든 종류의 어려움에 대한 추상적인 표현이다.

     

    나는 문제를 소유할 수는 없다.

    그것은 소유할 수 있는 성질의 물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문제 편에서 나를 소유할 수는 있다.

     

    좀 더 엄밀히 말하자면 나는 나 자신을 하나의 ‘문제’로 변화시켰고,

    내가 만들어낸 그것이 나를 사로잡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방식의 어법은 감추어진 무의식적 소외를 드러낸다.

     

     

    존재에 관한 에크하르트의 개념

    에크하르트는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은 내가 무엇을 행할 것인가이기보다는, 나는 과연 어떤 존재인가'이다.

     

    무엇을 얼마나 많이 행하느냐보다 선하게 존재하는 것에 비중을 두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행위를 받치고 있는 근본이다.

    우리의 존재는 실재이며, 우리를 움직이는 정신이요, 우리의 행동을 규정하는 성격이다.

     

    반면, 각종 행위와 확신은 우리의 역동적 핵심과는 동떨어진 것으로, 실재가 아니다.

    에크하트르가 말하는 존재의 두 번째 의미는 한결 더 포괄적이고 근본적인 것이다.

     

    존재는 삶이며 활동이요, 탄생이며 재생이고, 흘러나와서 흘러가는 것이며, 생산활동이다.

    이런 의미에서 존재는 소유, 아집, 아욕의 반대개념이다.

     

     

    소유적 실존 양식과 항문애적 특성

    프로이트 자신이 의도하지는 않았으되, 돈=똥이라는 등식은 부르조아 사회의 기능성과 그 소유욕에 대한 비판을 함축하고 있고, 마르크스가 ‘경제학-철학 초고’에서 말한 돈의 역할 해설과 비견될 수 있다.

     

    프로이트 자신이 리비도 발달의 특정 단계를 1차적인 것으로 보고 성격 형성을 2차적인 것으로 보았다는 사실은 지금의 논의에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소유 지향의 지배적 특성은 완전한 성숙기 이전에 나타나며, 그 특성이 이후의 삶에도 계속 두드러지면 그것은 병적인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프로이트의 견해이다.

     

    달리 말하면, 프로이트의 시각에서는 소유와 점유에 전적으로 몰입하는 사람은 정신적으로 병든 사람이고 신경증 환자이다.

     

    따라서 항문애적 성격이 우세한 사회는 병든 사회라는 추론이 나온다.

     

     

    베풀고, 나누고, 희생하려는 의지

    이 고찰들은 인간의 내부에는 두 가지 성향이 있다는 결론을 허용한다.

    그 하나는 소유하고자 하는, 자기 것으로 하려는 성향으로서 궁극적으로 살아남고자 하는 생물학적 소망에서 뻗어 나온 힘이다.

     

    다른 하나는 존재하고자 하는, 나누어 가지고 베풀고 희생하려는 성향으로서 인간 실존의 특유의 조건에서, 특히 타자와 하나가 됨으로써 자신이 고립을 극복하려는 타고난 욕구에서 나온 성향이다.

     

    모든 인간의 내부에는 이 두 가지 상반된 성향이 있으므로 사회의 구조와 가치, 그리고 규범은 두 가능성 중에서 어느 한쪽을 우세한 것으로 보는 입장을 취하게 된다.

     

    소유 지향, 즉 소유적 실존 양식을 조장하는 사회는 인간의 전자의 잠재성을 근거하며, 존재와 나눔을 장려하는 사회는 인간의 후자의 잠재성에 근거한다.

     

    우리는 이 두 잠재성 가운데 어느 것을 개발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며, 아울러 우리의 결정은 그 어느 한쪽 성향으로의 해결을 조장하는 우리 사회의 사회경제적 구조에 상당 부분 달려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

     

     

    소유와 존재의 그 밖의 측면

    소유는 사용에 따라서 감소하는 반면, 존재는 실천을 통해서 증대한다.

    (타들어가지 않는 ‘떨기나무 불꽃’은 이 역설을 말해주는 성서의 상징이다)

     

    이성의 힘, 사랑의 힘, 예술적 및 지적 창조력 등- 이 모든 본질적 힘은 그것을 사용함으로써 불어난다.

    베푸는 것은 상실되지 않으며, 반대로 붙잡고 있는 것은 잃기 마련이다.

    존재적 실존 양식에서 나의 안정에 대한 유일한 위협은 나 자신의 내분에 있다.

     

    삶에 대한 믿음과 나의 생산적 힘에 대한 신념의 결여에, 퇴보적 성향에, 내면적 게으름에, 나의 삶에 대한 결정을 타인에게 떠맡기려는 것에 등, 그러나 이러한 위험들은 존재에 반드시 내재하는 것은 아니다.

    반면 상실의 위험은 소유에 항상 내재한다.

     

     

    죄와 용서

    신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창 2:18 )라고 여기어 짝을 창조했다.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이 되도록 한 것이다.

    그들은 둘 다 알몸이었지만 ‘부끄러워 아니하니라’(창 2:25 )

     

    이 구절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다음과 같을 수 있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 알몸으로 마주하고 있었지만 서로 부끄러워하지 않았을뿐더러 그럴 수도 없었다.

    그들은 서로를 타인으로서, 서로 분리된 개체로서가 아니라, ’한 몸‘으로 경험했기 때문이다. ​

     

    이와 같은 상황은 아담과 이브의 타락 이후 근본적으로 변한다.

    그들은 완전한 의미에서 인간이 된다.

    다시 말하면 이성을 갖추게 되고, 선과 악을 인식하게 되며, 그들 자신이 서로 분리된 존재임을, 원래의 한 몸이 쪼개지고 각자 낯선 존재가 되었음을 알게 된다.

     

    그들은 가까이 있으면서도 멀리 떨어져 있다고 느낀다.

    ‘알몸으로’ 마주 대하고 있음에 마음 깊이 수치심을 느끼며, 아울러 서로의 소외감을, 자신들을 갈라놓고 있는 깊은 단애를 의식한다.

     

    그들은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창 3: 7)

    그리고 그런 식으로 완전한 인간적인 만남을, 적나라한 가운데 서로를 알아보는 것을 피하려고 했다.

    그러나 죄나 수치심은 가려서 제거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들은 사랑으로 접근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어쩌면 육체적으로는 서로를 갈망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육체적 결합이 인간의 소외감을 치유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들 남녀가 서로 사랑하지 않았다는 점은 서로를 대하는 입장에서 드러난다.

    하와는 아담을 보호하려고 하지 않으며, 아담은 하와를 옹호하는 대신에 그녀를 죄인으로 몰아세움으로써 자신의 벌만 면하려고 든다. ​

     

    어떤 죄가 그들을 죄인으로 만들었는가?

    그 원인은 그들이 서로 분리되고 고립된 이기적 인간으로, 사랑의 결합 행위로 소외를 극복할 수 없는 인간으로 맞서 있었다는 데에 있다.

     

    이러한 죄는 인간의 실존 자체에 뿌리를 두고 있다.

    자연과의 근원적인 조화를 상실한 까닭에, 인간은 모든 타인과의 총 제적 소외감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

     

    가톨릭 신학에서는 이와 같은 실존 행위를-사랑의 가교 없이 완전히 고립되고 소외된 상태를-‘지옥’이라고 정의한다. ​

    성서의 인간의 타락에 관한 이야기는 권위주의적 요소와 해방적 요소를 모두 함축하고 있어서, 사실상 그 어느 식으로든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자체로 볼 때, 죄를 불복종으로 보는 견해와 소외로 보는 견해는 완전히 대립되는 견해이다.

     

    구양 성서에 나오는 바벨 탑 이야기도 같은 사상을 내포하고 있는 것 같다.

    바벨 탑의 경우에는 인간은 온 인류가 하나의 언어를 쓴다는 사실로 상징화된 조화의 상태에 이르렀다.

    그러나 권력욕과 거대한 탑을 소유하려는 욕망으로 인해서, 인간은 합일의 상태를 파괴하고 다시 분열된다.

     

    어떤 의미에서 바벨 탑은 제2의 ‘인간의 타락’, 곧 역사적 인간이 저지른 죄이다.

    이 이야기는 인간의 합일과 그로 인해서 생성될 인간의 힘을 신 편에서 두려워한다는 사실 때문에 한층 더 복잡해진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으리로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창 11:16~),

     

    이와 똑같은 문제는 물론 최초의 타락 이야기에도 내포되어 있다.

    그때에도 신은 두 그루의 나무, 즉 인식의 나무와 생명의 나무 열매를 따 먹을 경우, 인간이 얻을 힘에 대해서 두려워하고 있다. ​

     

     

    죽음에 대한 두려움-삶에의 긍정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는 길은 단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석가모니와 예수, 에크하르트 수사가 가르쳐 준 길로서 삶에 집착하지 않는 것, 삶을 소유물로 간주하지 않는 것이다. ​

     

    근대사회는 진보의 지상 도시라는 비전이 인간에게 활기를 주었기 때문에 번영했다.

    그러나 금세기에 이르러서 이 비전은 바벨 탑의 양상을 취했다.

    이제 이 탑은 무너지기 시작하고 있으며, 결국 모든 인간을 그 폐허 속에 묻어버리고 말 것이다.

     

    만약 신의 도시와 지상의 도시가 정과 반이라면, 새로운 합, 중세 후기의 종교적 핵심과 르네상스 이후의 과학적 사고 및 개인주의의 발달의 합은 바벨 탑의 혼란에 맞서는 유일한 대안일 것이다.

    이 합이 바로 존재의 도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