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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자유로부터의 도피

     

     

     

    자유_심리학적 문제인가

    파시즘이 세력을 장악하게 되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론적으로나 실제적으로 아무런 준비도 갖추지 못했다.

    준비를 갖추기는커녕 인간이 그와 같이 악에 대한 성향을 지니고,

    권력에의 갈망, 약자의 권리에 대한 무시,

    그리고 강자에 대한 복종의 열망을 가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오직 소수의 인간들만이 이윽고 폭발할 화산의 울림을 인지하고 있었다.

     

    니체는 19세기의 자기만족적인 낙관주의를 경고했다.

    마르크스 또한 다른 방법으로 세상에 대하여 경고했다.

    그리고 이보다 약간 뒤늦게 또 다른 경고가 프로이트로부터 나왔다.

     

    확실히 프로이트와 대부분의 그의 제자들은 사회 현상에 대하여 대단히 소박한 관념만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사회 문제에 대하여 적용한 그의 심리학은 대체로 잘못 해석된 것이었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개인의 감정적·정신적 불안 현상에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우리를 화산 꼭대기로 끌로 올라가 끓고 있는 분화구를 들여다보게 했다.

     

     

    발자크의 '발명가의 고통'중에서 한 가지 사실은 명심하라.

    인간이란 고독에 대하여 공포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직은 유연한 그대의 마음에 굳게 아로새겨라.

    모든 고독 중에서도 정신적인 고독이 가장 무서운 것이다.

     

    최초의 은둔자들은 신과 더불어 살았고, 가장 인구가 많은 세상, 영혼들의 세상에서 살았다.

    인간의 최초의 생각은, 그가 문둥병 환자이건 죄수이건, 또는 악한 사람이건 병자이건 간에,

    자기 운명의 동반자가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삶 자체와도 같은 이 충동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인간은 자신의 모든 힘, 능력, 전 생애의 에너지를 쏟는다.

    인간에게 이렇듯 저항할 수 없는 열망이 없었다면, 사탄은 과연 자신의 동지를 찾을 수 있었을까?

    이를 주제로 하여 사람들은 일대 서사시를 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실락원’의 서사가 되었으리라,

    왜냐하면 ‘실락원’이란 반역을 변명하는 글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

     

     

    개성의 출현과 자유의 다양성

    휴즈는 ‘자메이카의 강풍’에서 열 산 된 아이가 갑작스럽게 자신의 개체성을 인식하는 과정을 날카롭게 묘사하고 있다.

    그때 에밀리의 신변에 대단히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녀는 문득 자기가 어떠한 존재인지를 깨달았다.

     

    그런데 생각해 보았지만, 사건이 어째서 5년 전에 일어나지 않았는지, 또는 5년 후에 일어나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사건이 어찌하여 바로 그날 오후에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닻을 감아올리는 기계 뒤편의 뱃머리 오른쪽 구석에서 소꿉장난을 하고 있었다.

    그러고는 소꿉장난에도 싫증이 나 고물 쪽으로 별다른 뜻도 없이 꿀벌과 아름다운 여왕의 이야기를 생각하면서 걸어갔다.

     

    바로 그때 그녀의 머릿속에 자기는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라는 생각이 번쩍 떠올랐다.

    그녀는 우뚝 걸음을 멈추고 눈길이 닿는 만큼 자기의 몸 전체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녀는 원근법에 따라 실제보다 짧아 보이는 자기의 겉옷 앞자락과, 시험 삼아 올려본 두 손 이외에는 더 많은 것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갑자기 자기의 것으로서 깨달은 작은 몸에 대한 거친 개념을 갖는 데에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중세적 배경과 르네상스

    근대사회에 대비한 중세 사회의 특징은 개인적 자유의 결여이다.

    중세 초기의 인간은 누구나 사회적 질서 속에서 자기의 맡은 바 역할에 얽매여 있었다.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한 계급에서 다른 계급으로 옮길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었으며, 심지어는 한 거리나 마을에서 다른 장소로 옮아가는 지리적인 이동조차 거의 불가능했다.

     

    약간의 예외를 제외하고, 사람들은 그가 태어난 고장에서 평생을 지내야 했다.

    또한 자기가 좋아하는 의복이나 음식을 취할 수 있는 자유도 갖지 못했다.

     

    생산자는 자신의 제품을 일정한 가격으로 팔아야 했으며, 또한 농민도 시장이라는 일정한 장소에서 매매를 해야 했다.

    동업조합 구성원은 다른 조합의 구성원에게 생산의 기술적 비밀을 일절 누설하지 못했으며, 같은 조합의 구성원들에게는 원료를 구입하는 데 가능한 모든 편의를 제공해야 했다.

     

    개인적 생활은 물론, 경제적 및 사회적 생활에서도 한결같은 규칙과 의무에 속박되어 실제로 각 개인의 자유롭게 활동할 여지는 거의 없었다.

    사회의 구조와 더불어 인간의 성격은 중세 말기에 변화했다.

     

    중세 사회의 통일과 중앙집권은 점차 약화되어 갔고, 이에 비해 자본과 개인의 경제적 창출과 경쟁이 중요성을 더해 갔으며, 새로운 유산계급이 출현했다.

    모든 사회 계급 가운데서 ‘개인주의’가 현저하게 성장했는데, 이는 취미·유행·예술·철학 등 인간 활동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주었다.

     

    내가 여기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러한 과정 전체가, 한편으로는 부유하고 번영해 가는 자본가들의 소집단에 대하여, 다른 한편으로는 농민이라는 대중-특히 도시의 중산 자본가들의 소집단에 대하여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 새로운 발달 과정은 도시의 중산계급에게는 어느 정도의 부와 함께 개인적인 창의성을 발휘할 기회를 주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전통적인 생활양식을 위협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들 집단이 심리적으로나 이념적으로 어떻게 반응해 가느냐 하는 것은 바로 이들 차이에 의하므로, 무엇보다도 이 차이점에 유의해야 한다.

     

    자본이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은 경제가 초인간적인 힘에 의해 결정되고, 그로 말미암아 인간의 운명마저 결정됨을 의미했다.

     

    자본은 ‘하인의 지위를 벗어나 주인이 되었다.

    자본은 분리와 독립으로 가장하고서 자신의 가혹한 요구에 따라 경제조직을 지령할 수 있는 지배자의 권리를 요구했다.’

     

     

    종교개혁 시대의 자유

    자기 노력으로는 어떠한 선도 행할 수 없는 인간 본성의 사악함과 무력함을 확신하는 일이야말로 신의 은총에 대한 본질적인 조건이다.

     

    자기 자신을 비하하여 개인적인 의지와 자부심을 타파할 때 비로소 신의 은총은 내리게 된다.

    사람이란 신의 수중에 들어 있는 하나의 무력한 도구이며, 근본적으로 약한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의 유일한 직무는 신의 의사에 전적으로 자기를 위임하는 일뿐이다.

     

    그러면 신은 무한한 정의의 힘으로 그를 구원할 수 있다는 교의는, 루터와 같이 절망과 불안과 회의에 사로잡혀 있을 뿐만 아니라 열렬히 확실성을 추구하고 있던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명확한 해답이 아니었다.

     

    루터는 마침내 그의 의혹에 대한 해답을 발견했다.

    1518년, 그는 갑자기 계시를 받았다.

     

    인간은 스스로의 공적 여하로 구원될 수는 없다.

    인간은 자기가 하는 일이 과연 신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가 아닌가를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신앙심만 가지고 있다면, 인간은 능히 구제를 확신할 수 있다. 신앙이란 신에 의해 인간에게 부여된다.

    따라서 인간이 신앙에 대하여 의심할 수 없는 주관적인 경험을 가지게 된다면 구원을 확신할 수 있다.

     

    개인은 본질적으로 신과 이러한 관계를 맺는 데 예민하다.

    인간은 신앙의 체험을 통해 신의 은총을 받으면 본성이 변하게 된다.

    신앙의 행위 속에서 그는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며, 그리스도의 정의가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상실된 그의 정의를 회복시켜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일생을 통해 결코 완전하게 도덕적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래적인 악은 완전히 사라질 수 없기 때문이다. ​

     

    우리가 루터에게서 발견하는 것과 같은 ‘확실성에 대한 강렬한 추구는 순수한 신앙의 표현이 아니라 도저히 참을 수 없는 회의를 극복하고자 하는 요구에 뿌리박고 있다.

     

    루터식의 해결 방법은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그들은 단지 신학적인 말을 사용하지 않을 뿐이다.

    즉, 그들은 고립된 자아를 개방시킴으로써, 또한 개인의 외부에 있는 압도적으로 강력한 힘의 도구가 됨으로써 확실성을 찾아내고 있다.

     

    루터에게 이 힘은 신이었는데, 그들은 절대적은 복종을 함으로써 확실성을 찾았다.

    칼뱅과 루터의 교의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가 많지만, 여기서는 오직 두 가지 차이점만을 강조하려 한다.

     

    그 하나는 칼뱅의 예정설이다.

    아우구스티누스나 아퀴나스, 또는 루터 등에게서 볼 수 있는 예정설에 비해 칼뱅의 예정설은 그의 사상체계의 주석 중의 하나로 되어 있다.

     

    그는, 신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은총을 예정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천벌을 결정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예정설에 새로운 면을 부여했다.

     

    칼뱅의 교의가 루터의 교의와 다른 또 하나의 대단히 중요한 점은 도덕적인 노력과 고결한 삶의 중요성을 한층 더 강조하고 있는 점이다.

     

    개인은 그 자신의 어떠한 행위로도 ‘운명을 변경’시킬 수 없으나, 능히 노력할 수 있다는 바로 그 사실이 구원을 받은 사람에 속하는 증거이며, 인간으로서 반드시 획득해야 할 미덕은 겸손과 중용, 모든 사람이 자기의 정당한 몫을 가지는 의미에서의 정의, 그리고 인간을 신과 연결시키는 경건함이라고 한다.

     

    칼뱅주의가 더 발전하면 고결한 삶과 끊임없는 노력의 의의를 강조하는 일도 중요성을 갖게 되며, 특히 그러한 노력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세속적인 삶에서의 성공도 구원의 표시라는 생각이 중요성을 갖게 된다.

     

    프로테스탄티즘은 위협당하고 추방되어 고립된 인간이 새로운 세계에 대하여 스스로의 방향을 정함으로써 그것과 관계를 맺으려 한 인간적 요구에 대한 응답이었다.

     

    경제적 및 사회적 변화로부터 유래하여 종교적 원리에 의해 강화된 새로운 성격구조가 이번에는 도리어 사회적 및 경제적 발달을 추진시키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근대인을 위한 자유의 양면성

    한마디로 말해, 자본주의는 단지 인간을 전통적인 속박으로부터 해방시켰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적극적인 자유를 증대시켜 능동적이며 비판적인, 그리고 책임질 수 있는 자아를 성장시키는 데 막대한 공헌을 했다.

     

    그러나 ‘...으로부터의 자유’가 진전함으로써, 이 원칙은 개인 상호 간의 유대를 끊음으로써 개인은 동료로부터 분리되어 고립되었다.

     

    이 발전은 종교개혁의 교리에 의해 준비되어 있었다.

    가톨릭교회에서 개인의 신에 대한 관계는 교회의 일원이라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었다. 교회는 개인과 신을 결부시키는 매개체로, 한편으로는 인간의 개체성을 제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개인을 집단의 구성부분으로서 신 앞에 서게 했다.

     

    그런데 프로테스탄티즘은 개인에게 오직 혼자 신 앞에 서게 했다. ​

    오늘날 개인의 상태에 대해서는 이미 19세기의 선견지명이 있는 사상가들에 의해 예견되고 있었다.

    키에르케고르는 회의로 인해 괴로워하고 고독과 하찮음의 감정에 압도된 무력한 개인을 그리고 있다.

     

    니체는 뒷날 나치즘에 노출된 것과 같은 허무주의를 예견하고, 그가 현실에서 본 무의하고, 목표도 지니지 않은 개인의 부정으로서 ‘초인’을 그리고 있다.

     

    인간의 하찮음이라는 주제는 카프카의 작품에서 가장 정확하게 표현되고 있다.

    그는 작품 ‘성(城)’에서, 신비한 성의 주민들과 사귀고자 하는 인간을 그린다.

    그 성의 주민들은 그에게 무엇을 할 것인가를 이야기해 주고, 세상에서의 그의 위치를 가르쳐 줄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의 삶은 성의 주민들과 사귀고자 하는 광기 어린 노력으로 점철되지만, 그는 결코 성공하지 못한 채 헛되고 안타까운 감정에 사로잡혀 외톨이로 남겨진다.

     

     

    도피의 메카니즘

    이를테면, 어떤 남자가 자기 아내를 몹시 거칠게 대하여, 언제든 집을 나가도 좋다, 아니 그렇게 하는 편이 오히려 고마운 일이라고 되풀이해 말하고 있다.

     

    그의 아내는 겁에 질려 감히 집을 나갈 생각 같은 것은 하지 못한다.

    그러한 관계가 지속되는 동안 두 사람 모두 그 말이 사실이라고 믿게 된다.

    그러나 만일 아내가 용기를 내어 집을 나가겠다고 선언하면, 그 두 사람에게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 일어날 것이다.

     

    남자는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제발 나가지 말라고, 당신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고,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 줄 아느냐고 절체절명에 빠진 사람처럼 애원할 것이다.

     

    이러한 경우 일반적으로 여자들은 계속 자기주장을 내세우지 못한다.

    슬그머니 남편의 말을 믿어버리면서 결심을 번복하여 그대로 집에 머문다.

    그러면 다시 같은 일이 시작된다.

     

    남자는 지난날과 같은 행동을 그대로 되풀이하고, 참고 살다가 여자가 폭발하면 남자는 절망하여 애원하며 붙들고, 여자는 다시 흔들려 집을 지키며 아내의 역할을 감당한다. ​

     

    수천수만에 달하는 결혼과 그 밖의 인간관계가 이 순환을 되풀이하고 있다.

    그리고 이 마술적인 순환은 중단되는 일이 없다.

    그녀 없이는 살 수 없다고 했을 때, 남자는 거짓말을 한 것일까? 사랑에 대해 말하자면, 모든 것은 그 사랑이란 무엇을 뜻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는 말, 문자대로는 아니라 할지라도 이 말은 어디까지나 진심이다.

    그는 그녀 없이는, 또는 적어도 그의 수중에 들어 무력한 존재로 느껴지며 만만한 어떤 사람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단지 이 관계가 깨어질 우려가 발생할 때만 사랑의 감정, 그것도 아주 절실한 사랑의 감정이 나타난다.

     

    다른 경우, 사디즘적 인간은 그가 지배하고 있다고 느끼는 인간만은 극히 명백하게 ‘사랑’한다.

    아내이건, 자식이건, 조수이건, 급사이건, 길을 가는 거지이건, 아무튼 지배의 대상에 대해 그는 사랑의 감정뿐 아니라, 감사의 감정까지 가지고 있다.

     

    그는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들의 삶을 지배하는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사실 그가 그들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사랑하는 것이다.’ ​

     

     

    나치즘의 심리

    나치즘은 진정으로 정치적 및 경제적인 원리라고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나치즘의 원리는 바로 극단적인 기회주의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문제는 일반적인 발전과정에서는 돈이나 힘을 획득할 기회가 거의 없는 몇 십만의 소시민들이 나치 관료기구의 구성원으로서 상류계급으로부터 강제로 그 상당한 부와 위신을 나누어 받았다는 데 있었다.

     

    나치 기구 구성원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는 유대인이나 정적으로부터 빼앗은 일자리가 부여되었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비록 보다 많은 빵을 획득하지는 못했으나 여러 가기 구경거리를 얻었다.

    이러한 사디즘적인 광경과 다른 인류에 대한 우월감을 부여하는 이데올로기에 의한 감정적 만족은 적어도 한참 동안은 그들의 삶이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빈곤하다는 사실을 보상할 수 있었다.

     

     

    자유와 민주주의

    근대인에게 자유는 이중적인 의미를 가진다는 것, 그것이 이 책의 주제였다.

    근대인은 전통적 권에서 해방되어 ‘개인’이 되었지만, 동시에 고립되고 무력해졌으며, 자기 자신이나 타인으로부터 분리되어 외재적인 목적의 도구가 되었다.

     

    더욱이 이러한 상태는 그의 자아를 뿌리에서부터 위태롭게 하고, 그의 존재를 약화시키고 위협하여 새로운 속박에 기꺼이 예속하도록 만든다.

     

    이에 반해 적극적인 자유는 능동적이고 자발적으로 생존하는 능력을 포함하여 개인에게 내재되어 있는 잠재력의 완전한 실현과도 일치한다.

     

    자유는 그 자체의 역동성의 논리에 따라 자유와 상반되는 것으로 전환될 우려가 있는 위험한 지점에 이르렀다.

    민주주의의 미래는 르네상스 시대 이후 근대사상의 이념적 목표였던 개인주의 실현의 정도에 달려 있다.

     

    오늘날의 문화적이고 정치적인 위기는 개인주의의 범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주의가 빈 껍데기가 되고 말았다는 데 그 원인이 있다.

     

    자유의 승리는 개인의 성장과 행복이 문화의 목표인 동시에 목적인 사회, 삶이 성공이나 그 밖의 어떠한 것으로 정당화될 필요가 없는 사회, 개인이 국가 또는 경제기구와 같은 자기 외부에 있는 어떤 힘에도 종속되지 않고 조종되지 않는 사회, 마지막으로 개인의 양심이나 이상이 외부 요구에 내재화가 아니라, 진정으로 그의 것이며 그의 자아의 특성에서 생겨나는 목표를 표현하는 그런 사회로 발달할 경우에만 가능하다.

     

    이러한 목표는 근대사에서 이전의 어떠한 시기에도 충분히 실현될 수 없었다.

    그러한 것들의 대부분은 순수한 개인주의의 발전을 약속하는 물질적 기반이 없었기 때문에 이념적인 목표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