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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거꾸로 읽는 세계사

     

     

     

    드레퓌스사건(20세기의 개막)

    1894.9.24 프랑스 육군참모본부 정보부의 위베르 앙리 소령은

    파리 주재 독일 대사관에서 정보원이 빼낸 익명의 편지를 조사하고 포병 대위 알프레드 드레퓌스를 체포했다.

    드레퓌스 대위는 적국 독일에 군사 기밀을 넘겨줬다는 누명을 썼다.

     

    에밀 졸라가 '나는 고발한다'를 발표한 직후.로로르는

    '1894년 재판의 법률 위반과 에스테라지 의혹에 항의하며 재심을 요구한다.'는 취지의 항의문과

    수백 명의 지지 서명을 실었다.

     

    재심 요구파가 싸움을 시작한 이유는 처음부터 드레퓌스의 결백을 믿었기 때문이 아니라

    군사 법원이 합법적이고 공정한 절차를 위반하면서 유죄를 선고한 것이 발단이었다.

     

    1900년 1월 상원 의원 참패 등 드레퓌스 파는 '전투'에서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은 '전쟁'의 승자가 됐다.

     

    드레퓌스 사건은 지식인과 언론의 시대가 열렸음을 알렸다.

    또한 드레퓌스 사건은 1차 세계대전의 징후를 드러냈다. ​

     

    유럽 기독교 세계는 천 년 넘는 세월 동안 모든 영역에서 유대인을 차별했다.

    프랑스는 1870년 프로이센에 패전해 50억 프랑의 배상금을 물고 접경지 알자스 로렌을 빼앗겼다.

    프랑스 민주주의는 불완전하고 미숙했다.

     

    1789년 대혁명으로 들어선 첫 번째 공화정은 몇 년 만에 무너졌고 나폴레옹 황제 시대를 거쳐 왕정으로 복귀했다.

    1848년 혁명으로 세운 두 번째 공화정은

    루이 보나파르트 대통령의 쿠데타와 나폴레옹 3세의 황제 즉위로 짧은 생애를 마쳤다.

    1870년 다시 혁명을 일으켜 세 번째 공화정을 수립했지만 군부를 비롯한 권력 기관은 예전 그대로였다. ​

     

    어떤 사람을 지식인이라고 해야 할지 명확하게 선을 긋기는 어렵지만

    보통은 고등교육을 받고 학위를 취득해 연구·교육·창작·정보·유통 등의 분야에서 활동하며

    말과 글로 대중의 생각에 영향을 주는 사람을 지식인이라고 한다. ​ ​ ​

     

     

    사라예보사건(광야를 태운 한점의 불씨)

    1914.6.28 19세 세르비아계 프린치프는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부부를 암살했다.

    임자 없는 땅이 사라지자 식민지 쟁탈전은 제로섬 게임이 됐다.

     

    제국주의 국가들은 그때그때 이해관계에 따라 동맹을 맺고 싸움을 벌일 기회를 노렸다.

    사라예보사건은 그런 상황에서 일어났다.

     

    프린치프의 총알이 폭발의 계기였을 뿐 원인은 아니었다.

    그날이 1914.6.28이어야 할 필요도 없고 황태자가 죽어야 했던 것도 아니고 꼭 오스트리아여야 했 던 것도 아니다.

     

    제국주의 강국들이 남의 것을 빼앗지 않고는 식민지를 넓힐 방법이 없었다는 점을

    전쟁의 원인으로 보는 견해는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과학기술은 발전했지만 인간 정신은 진보하지 않았다.'

    독일 역사가 레오폴트 폰 랑케의 말은 진리가 아니어도 경청할 가치가 있다. ​

     

     

    러시아혁명(아름다운 이상의 무모한 폭주)

    데카브리스트(12월) 반란

    러시아혁명의 첫 기운은 19세기 초에 일어났다.

    차르 니콜라이 1세가 즉위한 1825년 12월 자유주의 사상에 심취한 청년 장교들이 궁정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했다. ​

     

    알렉산드르 2세

    1861년 농노제도를 폐지하고 사법제도를 개혁했지만 1881년 나로드니키의 사회혁명당의 폭탄 테러로 끝났다. ​

     

    피의 일요일과 포템킨호 반란

    1905.1.22 러시아 정교회의 젊은 신부 조지가 폰은 차르의 초상화를 들고 찬송가를 부르며 군중을 이끌었지만

    차르의 군대에 짓밟히는 피의 일요일 사건이 발생했다.

    1905.5 러시아 발트 함대가 일본 해군에 전멸하면서 차르의 위신은 땅에 떨어졌고

    6월에는 노동자들이 군대와 경찰을 상대로 전국적인 무장 투쟁을 벌이던 포템킨호 반란 사건이 터졌다.

    1905.10 전국적인 총파업이 벌어졌다.

    페테르부르크 공장노동자들은 100명에 한 명 꼴로 '소비에트(평의회)'를 만들고, 이즈베스티야(뉴스)를 제작했다.

    니콜라이 2세는 '10월 선언'에서 입헌군주제 헌법을 제정해 의회를 만들고 자유를 보장하겠다고 하였으나

    이는 속임수였다. ​

     

    건전한 독재에서 국정 농단과 혁명으로

    1906년 두마(입법의회) 선거에서 전제정치에 반대하는 정당들이 압승했다.

    그러자 니콜라이 2세는 두마의 권한을 크게 축소하고 표트르 스톨리핀을 수상에 앉혔다.

    유능한 독재자 스톨리핀은 건전한 독재를 했으나 1911. 9월 테러로 사망했다.

    스톨리핀이 죽은 후 수도사 라스푸틴은 황후의 도움으로 온갖 기행을 저질렀다.

    1971.3 제정 러시아는 썩은 나무처럼 쓰러졌다.

     

    레닌(싸우는 사람)

    1916년 '제국주의(자본주의의 최고 단계)'라는 책을 탈고했는데 홉슨의 '제국주의론'을 주의 깊게 활용했다고 밝혔으나

    실제는 홉슨의 이론을 비틀어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논거로 사용했다.

    제국주의는 국가 재정을 투입해 극소수 투자자와 기업의 이익을 지켜주는 정책이어서

    사회적으로 불필요하고 국민경제에 해롭다는 것이 홉슨의 견해였지만 필연적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그러나 레닌은 제국주의는 본국의 프롤레타리아 상층을 매수하고 포섭해 혁명을 예방하므로

    사회주의 혁명은 선진 자본주의 사회가 아니라 러시아 같은 자본주의 세계 체제의 약한 고리에서 일어난다는 법칙이었다.

    레닌은 1870년 태어나 법과대학 졸업 후 평생 노선이 다른 혁명가와 싸웠다.

    시베리아 유배에서 풀려난 뒤 '이스크라(불꽃)'정치신문을 만들었다.

    1902년 '페라(펜)'이라는 필명으로 이스크라에 빼어난 글을 보냈던 트로츠키가 찾아왔다.

     

    볼셰비키 혁명

    레닌은 혁명을 혼자 하려는 사람 같았다.

    4월 테제를 개인 이름으로 발표했다.

    트로츠키는 1879년 우크라이나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볼셰비키와 멘셰비키 진영을 오갔지만 중요한 갈림길에서는 매번 레닌 편에 섰다.

    레닌이 케렌스키를 피해 핀란드로 도망가 있는 동안 볼셰비키를 다수파로 키웠다.

    1917.11.7 소비에트의 붉은 군대와 페트로그라드 수비대가 수도를 장악했다. ​

     

    이카로스의 추락

    16세기 영국인 토머스 모어는 유토피아에서 이상적인 사회를 그렸다.

    레닌과 볼셰비키는 유토피아를 실현하려 했지만 소련은 그렇지 못했다.

    사회 혁명은 구체제가 스스로 무너진 뒤 일어난 것일 뿐 기존 권력보다 강력한 힘이 혁명을 일으킨 것이 아니었다.

    사회 혁명은 구체제보다 더 강력한 중앙집권적 체제를 낳았다.

    그러나 소련의 중앙통제 계획은 너무나 비효율적이었다.

    크레타섬의 미노타우로스를 가둘 미궁을 만든 다이달로스는 아들 이카로스의 등에 밀랍으로 날개를 붙여 주면서

    적당한 높이로 날아야 바다의 습기와 태양의 열기를 피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비상의 쾌락에 취한 이카로스는 너무 높이 올랐다가 밀랍이 녹아 바다에 빠져 죽고 말았다.

    밀랍이 태양열을 견디지 못한 것처럼 볼셰비키의 이상주의는 권력의 쾌락을 이겨내지 못했다. ​

     

     

    대공황(자유방임 시장경제의 파산)

    세의 가설

    19세기 초 프랑스 경제학자 장바티스트세가 제출한 가설을 절대 진리로 여겼다.

    그러나 세의 가설에도 약점이 있었다.

    민간이 소득의 일부를 소비하지 않고 저축하면 총수요가 총공급에 미치지 못한다.

    노동자가 항구적으로 최저임금을 받는다고 본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주목하지 못한 문제였다.

    주류경제학자들은 우아한 방법으로 해결했다.

    총수요는 기업의 투자지출도 있는데 여기에도 가격 시스템이 작동한다.

    저축이 투자보다 많으면 이자율 하락으로 투자가 증가해 균형을 찾는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

     

    케인즈 혁명

    자본주의 체제와 주류 경제학은 파산했다.

    루스벨트와 히틀러는 대중요법으로 효과를 냈다.

    케인즈는1936년 '고용 이자와 화폐의 일반이론'에서 '공급이 같은 크기의 수요를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수요가 같은 크기의 공급을 유발한다'라고 주장했다

    세의 가설을 뒤집은 것이다.

    기업의 투자지출이 이자율의 함수라는 데는 이견이 없지만

    케인즈는 민간 가계의 소비지출을 이자율이 아니라 소득의 함수로 본 것이다.

    '소비지출이 소득의 함수이면 저축도 소득의 함수가 되므로

    이자율 등락이 저축과 투자를 균형으로 이끈다'는  주류경제학의 이론은 무너진다.

    사회적 총수요 부족 때문에 공황이 발생할 수 있다.

     

     

    대장정(중화 인민공화국 탄생의 신화)

    홍 군은 국민 정부군을 꺾었다. 장제스와 국민정부의 패인은 실패한 정치였다.

    마오쩌둥의 지략과 홍군의 전술이 아무리 뛰어났다 해도

    국민정부가 그토록 무능하고 부패하지 않았다면 이기기 어려웠을 것이다. ​

     

     

    히틀러(모든 악의 연대)

    1889년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히틀러는 1차 대전이 터지자 독일 제국 군대에서 병영의 안정감과 전우애를 체험했다.

    두 번이나 훈장을 받은 히틀러 상등병은 군대의 조직과 운영방식을 최상의 사회 규칙이라 확신했다.

     

    바이에른 주의 정치 동향을 살피던 군부는 1919. 9월 히틀러 상등병을 정당에 파견했다.

    히틀러는 뛰어난 연설 솜씨로 당의 주도권을 장악한 후 1921년 당명을 민족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으로 바뀌었다.

     

    1933.1.30 아돌프 히틀러는 독일 총리로 지명됐다.

    1934. 8월 대통령이 사망하자 총통이 됐다.

    히틀러는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수단을 동원했다.

     

    도로 건설과 토지개량, 대규모 병영과 비행장 건설 등의 토목건설 사업에 중장비 대신 인력을 쓰게 했다.

    독일 국민은 나치와 맞서 싸우지 않았다.

    소수의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학생, 성직자, 지식인이 투쟁했을 뿐이다.

     

    독일 국민은 비정상 상태를 끝내겠다는 히틀러의 약속을 믿고 적극 지지하거나 소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사회적 관계가 해체된 상태에서

    시민들은 사회적 행위 능력을 잃고 모든 것이 어떻게든 끝나기만 기다리는 무감각한 인간이 됐다.

     

    게슈타포 간부였던 아돌프 아이히드만은

    이스라엘 법정에서 시종일관 '국가의 명령에 따라 합법적인 업무를 성실하게 수행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정치학자 아렌트는 아이히만을 타인의 처지에서 생각하는 능력이 없어서 어떠한 소통도 할 수 없는 사람으로 봤다.

    아렌트는 그런 상태를 '악의 비속함'이라고 했다.

     

     

    베트남(마지막 민족해방 전쟁) ​

    1964.8.4 린든 존슨 미 대통령은 하노이 통킹만 군사충돌을 공개했다.

    1969. 1월 닉슨은 패배를 인정하고 1973년 철수했다.

    호찌민은 1890년 태어나 초등학교 교사가 됐다.

    중국 신해혁명이 일어난 1911년 자취를 감추었다가 1919년 프랑스 사회 당에서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베트남 전쟁은 명백한 제국주의 침략 전쟁이었다.

    전쟁비용을 충당하려 너무 많은 달러를 발행한 탓에 연방 준비은행은 금태환을 중지해야 했다.

    1973년을 기점으로 미국 경제는 활력을 잃고 저성장의 늪에 빠졌다.

     

    대한민국은 1992년 베트남과 외교관계를 맺었고 2015년 자유무역협정을 발효했다.

    한국이 베트남 전쟁으로 입힌 피해를 덮어두고 우호관계를 말하는 것은 기만하는 것이다.

    정당화할 수 없는 침략전쟁은 없다. ​

     

     

    맬컴 엑스(검은 프로메테우스)

    맬컴은 1925년 네브래스카 주에서 목사님 아들로 태어났다.

    맬컴은 통합이 아니라 분리를 미국 인종 문제의 해결책으로 여겼다.

     

    격리는 강자가 약자에게 강제하는 것이지만 분리는 평등한 둘이 서로의 이익을 위해 자발적으로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맬컴은 소수의 흑인 동조자를 제외한 모든 미국인에게 비난과 저주를 받았다.

     

    그는 일라이자 무함마드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이슬람 민족의 2인자였다.

    그렇지만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한 흑인 대중의 언어를 썼고 폭넓은 지식을 동원해 날카로운 논쟁을 벌였기 때문에

    일인자보다 더 큰 대중적 관심을 받았다.

     

    그런데 빈민가 흑인들은 맬컴에게 열광하면서도 이슬람 민족에 가입하지는 않았다.

    지나치게 엄격한 규율 탓이었다.

     

    거짓말, 도둑질, 가정폭력, 흡연, 음주, 마약금지는 그래도 이해가 되지만

    혼전 성관계 금지, 돼지고기, 춤, 도박, 데이트 금지, 영화 스포츠 관람 금지는 지나쳤다.

     

    게다가 규칙을 어기면 이슬람 율법을 적용해 회원 자격을 박탈하고 내쫓았다.

    이슬람 민족은 맬컴에게 너무 작은 세계였다.

     

    맬컴은 OAAU를 통해 미국 흑인이 정치적 공동체와 경제네트워크를 형성해

    마약과 범죄를 끊고 자주적이고 인간적인 삶을 찾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1965.2.21 OAAU 행사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괴한의 총탄을 맞고 숨졌다. ​

    킹 목사는 1968.4.4 백인 암살자의 총에 맞고 숨졌다.

     

    미국 사회는 킹 목사를 위대한 지도자로 추앙하고 1월 셋째 주 월요일을 연방 공휴일로 지정했다.

    킹목사는 미국 정치와 사회를 크게 바꿨다.

     

    연방의회의 민권법 제정을 끌어냄으로써 흑인의 참정권을 실현했다.

    흑인 민권운동은 짐 크로 법 시대를 끝냈다. ​

     

    맬컴은 악역이었다.

    그러나 흑인의 자주적 사고방식을 일깨우고 북돋운 점은 킹 목사를 능가했다.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준 죄로 바위에 묶인 채 독수리에게 간을 쪼인 프로메테우스처럼

    죽은 뒤에도 그로 인해 자신이 비난받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핵무기(에너지의 역습)

    독일 과학자 뢴트겐은 1895년 진공관 방전을 연구하다 정체불명의 광선을 발견하고 엑스선이라고 이름 붙였다.

    이듬해 프랑스의 앙리 베크렐은 엑스선이 방전 실험에 쓴 우라늄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2년 뒤 베크렐의 제자인 퀴리 부부는 우라늄 보다 훨씬 강한 방사선을 내뿜는 라듐을 우라늄 광석에서 분리했다.

    과학자들은 라돈, 폴로늄, 악티늄 등 새로운 방사성 원소를 발견해 물리학을 원자의 세계로 이끌었다.

     

    우라늄은 특이하게도 원자핵이 두 개로 쪼개질 때 중성자를 충돌시킬 때 들어간 것과 견줄 수 없는 큰 에너지를 방출했다.

    1938년 미국으로 망명한 페르미는

    우라늄 235의 원자핵이 중성자와 충돌해 분열할 때 둘 이상의 중성자가 튀어나온다는 사실을 발견함으로써

    연쇄 핵분열을 일으킬 수 있게 되었다.

     

     

    앨런 튜링

    20세기 가장 큰 정치적 사건은 볼셰비키 혁명이었고 가장 중요한 기술적 사건은 핵폭탄 개발이라고 했다.

    20세기 가장 큰 혁명적 사건은 범용 디지털 컴퓨터의 발명이라고 생각한다.

     

    튜링은 2차 대전 독일군 암호시스템 '에니그마'를 해독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함으로써 연합군의 승리를 앞당겼다.

    그 일을 하기 위해 전기로 작동하는 기계식 컴퓨터를 제작했다.

     

    전후에는 다목적 디지털 컴퓨터로 발전하게 될 만능 기계를 고안했으며 인공 지능을 만드는 방법을 제안했다.

    2011년 오바마 대통령은 그를 뉴턴, 다윈과 함께 영국을 대표하는 과학자로 거명했다.

     

    튜링은 1948년 영국 국립 물리학 연구소에 제출한 '지능을 가진 기계'에 이렇게 썼다.

    기계가 인간을 대체할 수 없다는 고정 관념을 파괴한 혁명 선언이었다.

     

    '생각하는 기계를 만들 수 있다고 믿는 확실한 이유는

    사람의 어떤 부위에 대해서든 흉내 내는 기계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우리의 주관심사는 신경계다.

    전자 계산 기계에 쓰는 전기회로는 신경의 본질적 속성을 가진 듯하다.

    전기회로는 정보를 전송하고 저장할 수 있다.

    신경은 매우 작고 닳지 않으며 에너지 소비량이 매우 적다.

    전자회로가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매력은 속도인데 그 이점이 하도 커서 신경의 이점을 덮고도 남을 것이다.'

     

    생각하는 기계를 만들기 위해 뇌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탐구할 것을 제안한다.

    기계가 능력을 발휘하기에 알맞은 분야로는 체스나 포커 같은 게임, 언어학습, 언어 번역, 암호학, 수학 등이 유망하다. ​

     

    토플러는 컴퓨터 혁명이 산업의 변화뿐만 아니라

    미디어 혁명, 정보화 혁명, 다품종 소량생산, 재택근무, 가족의 다양화,

    거대 조직의 종말, 생산과 소비의 융합, 글로벌기업 체제, 국민국가의 약화, 윤리와 도덕의 급진적 변화 등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을 현실로 만들 것이라고 전망했다.

     

    디지털 혁명의 속도와 충격은 토플러의 예측을 뛰어넘고 혁명의 최전선은 결국 튜링의 생각하는 기계로 이동했다.

    자본주의 체제가 내부 모순으로 무너지고 공산주의 사회가 오리라고 한 마르크스의 주장은 오류로 드러났다.

     

    그러나 생산력 발전이 사회 조직과 사상과 문화의 변화를 가져오는 동력이라는 견해는

    하나의 이론으로 존재할 자격이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