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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이기적 유전자
이 책의 제목은 '이기적 시스트론'도 '이기적 염색체'도 아닌, '약간 이기적인 염색체의 큰 토막의 더 이기적인 염색체의 작은 토막'이라고 붙여야 마땅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은 매력적인 제목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유전자를 여러 세대에 걸쳐 존속할 가능성이 있는 염색체의 작은 토막이라 정의하고, 이 책의 제목을 '이기적 유전자'라고 한 것이다.
DNA는 무슨 일을 하는가?
단백질을 만드는 것은 몸을 만드는 것과 무관하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사실은 그 방향으로 가는 작은 첫걸음이다.
단백질은 몸을 구성하는 물리적 재료일 뿐만 아니라, 세포 내의 화학적 과정 전반을 섬세하게 제어하여 정확한 시간, 정확한 장소에서 화학적 과정의 스위치를 선택적으로 켰다 껐다 한다.
노화 이론
'우리는 왜 늙어서 죽는가'라는 의문은 복잡한 문제일 뿐만 아니라 그 내용을 상세히 기술하는 것은 이 책의 영역을 넘어선다.
우리가 왜 늙어서 죽는지에 대해 경우마다 다르게 적용되는 이유뿐만 아니라 더 일반적인 이유도 몇 가지 제시되어 있다.
예를 들면 노쇠는 개체의 생애 동안 일어나는 복제 과정의 유해한 오류와 유전자 손상이 축적되어 생기는 것이라는 이론이 있다.
피터 메더워경이 주장한 또 다른 이론은 진화를 유전자 선택에 근거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고방식의 좋은 예가 된다.
"늙은 개체가 죽는 것은 그 종의 나머지 개체에 대한 이타적 행위다.
왜냐하면 번식할 수 없을 정도로 늙어서도 살아 있는 개체는 세상을 어지럽히기만 할 뿐이기 때문이다."
라는 종래의 설은, 메더워가 지적하고 있듯이 순환 논리다.
이것은 그 가설이 증명하려고 하는 것, 즉 개체가 너무 늙어서 번식할 수 없다는 것을 처음부터 가정하기 때문이다.
이 가설은 또한 순진한 집단선택 내지는 종 선택의 설명 법과 다를 바가 없다.
비록 그 일부분은 말을 근사하게 바꿀 수도 있지만 말이다.
메더워의 이론은 훌륭한 논리를 담고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다.
'좋은 유전자'의 가장 일반적인 특성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했다.
그리고 우리는 '이기성'이 그 특성 중 하나라고 결정했다.
그러나 성공한 유전자가 가지는 또 하나의 일반적인 특성은, 자기 생존 기계의 죽음을 적어도 번식한 뒤로 미루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이다.
당신의 사촌과 증조부 중에는 어려서 죽은 자가 반드시 있을 테지만, 당신의 조상 중에는 단 한 사람도 어려서 죽은 자가 없다.
어려서 죽었다면 당신의 조상이 되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치사 유전자'란 자신을 지니고 있는 개체를 죽이는 유전자다.
반치사 유전자는 개체가 쇠약해지도록 하여 다른 원인에 의해서 죽을 가능성이 높아지도록 한다.
모든 유전자는 생애 중 특정 단계에서만 몸에 최대 영향을 미치는데, 치사 유전자와 반치사 유전자도 예외는 아니다.
대부분의 유전자는 배아기에 영향을 미치지만 어떤 유전자는 유아기에, 어떤 유전자는 청년기에, 또 어떤 것은 중년기에, 그리고 어떤 것은 노년기에 영향을 미친다(나비 애벌레와 그것이 변태한 나비 성충은 똑같은 유전자 세트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기억하기 바란다).
분명히 치사 유전자는 유전자 풀에서 제거될 것이다.
그러나 후기에 작용하는 치사 유전자는 초기에 작용하는 치사 유전자에 비해 유전자 풀 내에서 더 안정하게 유지된다는 사실 또한 확실하다.
늙은 몸에서 치사 효과를 내는 유전자는 개체가 번식을 어느 정도 하고 나서 그 치사 효과를 나타낸다면 유전자 풀 내에서 성공적일 수 있다.
이를테면 늙은 몸에 암을 유발하는 유전자는 개체가 암이 발현되기 전에 번식하기 때문에 수많은 자손에게 전해질 수 있다.
한편 젊은 성인에게서 암을 일으키는 유전자는 그다지 많은 자손에게 전해지지 않을 것이며, 어린아이에게서 치명적인 암을 일으키는 유전자는 자손에게 전혀 전해지지 않을 것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노쇠 현상은 후기에 작용하는 치사 유전자와 반치사 유전자가 유전자 풀에 축적되기 때문에 나타나는 부산물일 뿐이다.
이들 치사 및 반치사 유전자는 단지 후기에 작용한다는 이유만으로 자연선택의 그물 구멍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유성생식과 교차
유성생식과 교차가 존재한다는 가정은 입증하기가 어렵다.
교차가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것은 아니다.
초파리 수컷에게서는 교차가 일어나지 않는다.
암컷에게도 교차를 억제하는 유전자가 있다.
만약 이 유전자가 널리 퍼져 있는 초파리의 개체군이 번식한다면 '염색체 풀'내의 염색체가 자연선택의 최소 기본 단위가 된다.
사실 우리의 정의에 따라 논리적으로 생각해 보면 한 개의 염색체 전체를 하나의 '유전자'라고 생각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유성생식의 대안도 존재한다.
진딧물 암컷은 수컷 없이 새끼를 낳을 수 있으며, 그 암컷들은 모두 어미의 유전자를 그대로 이어받는다.
많은 식물은 흡근을 뻗어서 무성생식을 한다.
이럴 경우에는 생식이라기보다는 생장이라고 해야 적합할 것 같으나, 생장과 무성생식은 단순히 체세포 분열로 되는 것이기 때문에 양자 간에는 구별이 거의 없다.
때로는 무성생식으로 번식한 식물이 '부모'로부터 떨어지는 일도 있다.
또 어떤 경우에는, 예컨대 느릅나무에서처럼 부모와 자손을 잇는 흡근이 그대로 남아 있다. 느릅나무 삼림 전체를 한 개체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진딧물과 느릅나무는 유전자를 섞지 않는데 우리는 왜 아이를 만들려면 자기의 유전자와 남의 유전자를 섞어야 하는 귀찮은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이 과정이 기묘해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간단한 복제 과정이 성이라는 기묘하고 번거로운 방식을 취하게 된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성이 있으면 무엇이 좋을까?
진화적으로 안정한 전략(ESS)
evolutionarily stable strategy
메이너스 스미스가 소개하는 중요한 개념은 진화적으로 안정한 전략인데, 그는 이 개념을 해밀턴과 맥아더에게서 따왔다고 한다.
'전략'이라는 것은 미리 프로그램된 행동 방침이다.
전략의 일례를 들어 보면, "상대를 공격하라. 그가 도망치면 쫓아가고, 그가 보복해 오면 도망쳐라"같은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개체가 전략을 의식적으로 고안해 냈다고 생각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현재 동물을, 근육을 제어하는 미리 프로그램된 컴퓨터가 조종하는 로봇 생존 기계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점을 상기하기 바란다.
편의상 이 전략을 일종의 지시처럼 말로 쉽게 표현하는 것뿐이다.
어떤 불분명한 메커니즘에 의해 동물은 마치 이러한 지시를 따르는 것처럼 행동한다.
진화적으로 안정한 전략, 즉 ESS는 개체군에 있는 대부분의 구성원이 일단 그 전략을 채택하면 다른 대체 전략이 그 전략을 능가할 수 없는 전략이라고 정의된다.
이것은 미묘하고도 중요한 개념이다. 바꿔 말하면, 어떤 개체에게 가장 좋은 전략은 개체군 대부분이 무엇을 하고 있느냐에 따라 좌우된다는 것이다.
그 개체를 제외한 나머지 개체들도 각각 자기의 성공을 최대화하려는 개체들이므로, 장기간 지속될 수 있는 유일한 전략은 일단 그 전략이 진화하면 다른 어떤 전략도 그 전략보다 더 많은 이득을 볼 수 없는 그런 전략이다.
환경에 어떤 큰 변화가 일어나면 잠시 동안 진화적으로 불안정한 기간이 올 수 있으며, 개체군 내에서 변동이 생기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어떤 전략이 일단 ESS가 되면 그것은 계속 ESS로 남는다.
자연선택은 이 전략에서 벗어나는 전략을 벌할 것이다.
보복자와 불량배
보복자는 모든 싸움에서 처음에는 비둘기파처럼 행동한다.
즉 매파처럼 철저하게 심한 공격을 하지 않고 전통적인 위협 행동을 한다.
그러나 상대가 공격해 오면 보복한다.
바꿔 말하면 보복자는 매파에게 공격당했을 때는 매파처럼 행동하고 비둘기파를 만났을 때는 비둘기파처럼 행동한다.
또 다른 보복자를 만났을 때는 비둘기파처럼 행동한다.
보복자는 조건부 전략자다.
그의 행동은 상대의 행동에 따라 정해진다.
또 하나의 조건부 전략은 불량배다.
불량배는 누군가가 반격해 올 때까지는 누구에게나 매파처럼 행동하지만, 반격당하면 즉시 도망친다.
또 다른 조건부 전략은 시험 보복자다.
시험 보복자는 기본적으로는 보복자와 같으나 가끔 시험 삼아 싸움의 강도를 높인다.
상대가 반격하지 않으면 계속 매파처럼 행동하지만, 상대방이 반격하면 다시 비둘기파의 전통적인 위협 행동으로 되돌아간다.
공격을 받은 경우에는 보통의 보복자와 똑같이 보복한다.
컴퓨터 시뮬레이션상에서 지금까지 말한 다섯 개의 전략 모두를 자유롭게 행동하도록 놔두면 보복자만이 진화적으로 안정한 전략이 된다.
시험 보복자는 안정한 전략에 가깝다.
비둘기파는 그 개체군 내에 매파나 불량배가 생겨나면 무너져 버리므로, 즉 이들의 침입을 허락하므로 안정한 전략이 아니다.
매파도 그 개체군이 비둘기파와 불량배의 침 입을 허용할 것이므로 안정한 전략이 아니다.
불량배도 그 개체군이 매파의 침입을 허락하므로 안정한 전략이 못 된다.
보복자의 개체군에서는 보복자 자신보다 더 성적이 좋은 전략이 없기 때문에 어느 전략도 침입할 수 없다.
그러나 비둘기파는 보복자의 개체군 내에서 보복자와 비슷한 정도로 성적이 좋다.
이는 다른 조건이 같다면 비둘기파의 수가 서서히 늘어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비둘기파의 수가 어느 정도까지 늘어나면 시험 보복자가 유리해지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이들이 비둘기파와 마주쳤을 때의 성적은 보복자가 비둘기파와 마주쳤을 때보다 낫기 때문이다.
시험 보복자는 매파와 불량배와 달리 ESS에 가깝다.
시험 보복자의 개체군 내에서 그들보다 잘할 수 있는 것은 보복자 뿐이고 그 차이도 미미하다. 따라서 보복자와 시험 보복자 사이에서 약간씩 왔다 갔다 하는 혼합 전략이 개체분 내에서 우세할 것이며, 그 변동에 따라 소수인 비둘기파도 수적 변동을 보일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경우 개체들이 항상 고정된 전략을 택한다는 다형성을 상정할 필요는 없다.
각 개체는 보복자, 시험 보복자, 비둘기파가 복잡하게 뒤섞인 혼합 전략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현시 행동
아마도 윈-에드워즈의 착상 중에서 가장 놀랄 만한 것은 현시 행동일 것이다.
이 용어는 그가 갖다 붙인 말이다.
많은 동물은 많은 시간을 큰 무리 속에서 지낸다.
이러한 무리 짓기 행동이 자연선택된 것은 어째서일까?
윈-에드워즈의 주장에 의하면 저녁때 찌르레기가 큰 무리를 이루거나 날벌레들이 여름날의 하늘을 윙윙거릴 때 그들은 스스로 자기 개체군의 밀도 조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윈-에드워즈는 개체가 집단 전체의 이익을 위해 출생률을 자제하고, 개체군 밀도가 높을 때는 출생률을 감소시킨다고 주장하는 것이므로, 이를 위해 그들이 개체군의 밀도를 추정하는 어떤 수단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는 생각이다.
이것은 마치 항온 장치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그 장치 속에 온도계가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것과 같은 이유다.
윈-에드워즈에게 현시 행동이란 개체군 밀도의 추정을 보다 쉽게 하기 위해서 동물이 의도적으로 모여 무리를 짓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개체 수 추정이 의식적으로 행해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개체가 인지한 개체군 밀도에 관한 감각 자극을 생식 시스템에 결부시키는 자동적인 신경, 또는 호르몬 메커니즘을 제안하고 있다.
이제까지 나는 간략하게나마 윈-에드워즈의 이론을 올바르게 평가하려고 노력했다.
만약 내가 이것에 성공했다면 독자는 지금 그의 이론이 표면적으로는 그럴듯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의 이 부분까지 읽은 독자는 의심하고 덤빌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
언뜻 보면 그럴싸할지라도 그의 이론에 대한 증거가 타당해야 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 증거는 별로 타당하지 않다.
그의 이론에 대한 증거 중 상당수는 그의 말대로 해석이 가능하지만, 더 정통적인 '이기적 유전자'의 관점에 의해서도 똑같이 설명될 수 있다.
양육 투자(P.I.)
parental investment
부모가 투자할 수 있는 이들 자원 모두를 측정하는 공통의 통화를 생각해 내기는 어렵다.
인간 사회에서는 음식물, 토지, 노동 시간 등 어느 것과도 변환 가능한 보편적인 통화로서 화폐가 사용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개개의 생존 기계가 다른 개체, 특히 새끼의 생명에 투자하는 여러 자원을 측정하는 하나의 통화가 필요하다.
칼로리와 같은 에너지의 척도가 적절하다고 생각한 일부 생태학자들은 야생에서의 에너지 비용을 계산하는 데 몰두해 왔다.
그러나 이 척도는 부적절한다.
에너지의 일부만이 실제로 가장 중요한 통화, 즉 진화의 '금 본위 제도'인 유전자의 생존으로 변환 가능하기 때문이다.
트리버스는 1972년에 양육 투자라는 개념을 이용하여 이 문제를 멋지게 해결했다.
양육 투자는 '자손 하나에 대한 투자로서, 다른 자손에 대한 양육 투자 능력을 희생시키면서 그 자손의 생존 확률을 증가시키는 것'으로 정의된다.
트리버스의 양육 투자라는 사고방식의 장점은 실제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 척도에 가장 가까운 단위로 평가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한 아이가 젖을 먹을 때 이 아이의 젖 소비량은 리터나 칼로리가 아닌, 이로 인해 다른 형제가 입은 손해의 단위로 측정된다.
지금 어떤 어머니가 X와 Y라는 두 아이를 키우는데, X가 젖 1리터를 먹었다고 하면 이 젖에 상응하는 P.I.의 대부분은 젖을 먹지 못한 Y의 사망률의 증가량으로 측정된다.
P.I.는 이미 출생했거나 앞으로 출생할 다른 아이들의 기대 수명의 감소치로 측정된다.
가정적인 수컷을 선택하는 전략
가정의 행복을 우선시하는 수컷을 선택하는 전략의 가장 단순한 예를 생각해 보자.
암컷이 수컷을 훑어보며 성실함과 가정적인 성격을 미리 따져 보는 것이다.
수컷 개체군 내에서는 성실성 면에서 틀림없이 변이가 존재할 것이다.
이러한 성질을 사전에 식별하는 능력이 암컷에게 있다면 이런 성질을 가진 수컷을 고르는 것이 암컷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암컷이 이것을 달성하는 하나의 방법은 오랫동안 접촉을 거부하고 수줍어하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암컷이 최종적으로 교미에 동의하기까지 기다리지 못한 수컷은 성실한 남편이 될 가망이 없다. 긴 약혼 기간을 강요함으로써 암컷은 변덕스러운 구혼자를 솎아 내고 성실함과 인내를 인정받은 수컷과만 최종적으로 교미한다.
연약한 여자의 수줍어하는 성질은 사실 동물들 사이에서는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일이며, 긴 구애 행동 또는 약혼 기간도 마찬가지이다.
이미 이야기한 대로 수컷이 속아서 다른 수컷의 자식을 양육하게 될 위험이 있을 경우 긴 약혼 기간은 수컷에게도 유리하다.
가정의 행복을 위한 암컷의 방법
암컷이 가정의 행복을 위한 전략을 실제로 구현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앞서 제시한 대로 집을 완성하지 못했거나 최소한 둥지 짓기도 돕지 않은 수컷과의 교미를 거부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실제로 일부일처제의 조류에서는 둥지가 완성될 때까지 교미하지 않는다.
그 결과 수컷은 수정하는 순간 자신의 값싼 정자보다 더 많은 투자를 이미 자식에게 한다.
장래의 짝에게 둥지 짓기를 요구하는 것은 수컷을 붙잡아 두기 위한 암컷의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다.
수컷에게 많은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은 어떤 것이라도 이론적으로 같은 효과를 발휘할지 모른다.
설령 그 대가가 아직 낳지 않은 자식에게 직접적으로 이익이 되지는 않더라도 말이다.
개체군 내 모든 암컷이 수컷과의 교미에 동의하기에 앞서, 예를 들어 용을 죽이라든가 산에 오르라든가 하는 식으로 어렵고 대가 높은 행위를 요구한다면, 수컷이 교미 후에 암컷을 버리려는 유혹에 빠지는 것을 이론적으로는 억제할 수 있을 것이다.
짝을 버리고 다른 암컷을 찾아 유전자를 더 퍼뜨리려는 수컷은 누구라도 용을 또 한 마리 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단념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구혼자에게 용의 머리나 성배 찾기 같은 것을 마구잡이로 요구하는 암컷은 없다.
그 이유는 수컷에게 무의미한 사랑의 노력을 요구하는 로맨틱한 암컷보다는 조금 덜 어렵더라도 자신과 자식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요구하는 암컷이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용 잡기나 헬레스폰트 해협을 수영해서 건너는 것에 비하면 둥지 짓기는 확실히 로맨틱하지는 않으나 훨씬 유용하다.
암컷이 취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방법은 구애 시 수컷으로부터 먹이를 받는 것이다.
새의 경우 이 행동은 암컷이 일종의 퇴보를 일으켜 새끼 때의 행동을 나타낸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암컷은 새끼와 비슷한 제스처를 취해 수컷에게 먹이를 요구한다.
이와 같은 제스처는 성인 여성의 유아적인 말투나 입술을 삐죽거리는 것을 남성이 귀엽게 봐주는 것처럼 수컷에게 매력적으로 보일 것이라 생각되어 왔다.
이 시기의 암컷은 거대한 알을 만들기에 필요한 영양소를 모으기 때문에 먹을 수 있는 음식이라면 모두 필요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구애 급식은 아마도 수컷이 알 자체에 직접 투자한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따라서 구애 급식은 암컷과 수컷이 초기에 자식에게 주는 투자량의 격차를 좁히는 효과가 있다.
곤충과 거미 중에도 구애 급식의 현상을 보이는 종이 있다.
이들 중에는 때때로 분명히 다르게 해석해야 할 것이 있다.
예컨대 사마귀의 경우, 수컷이 큰 암컷에게 먹힐 위험이 있기 때문에 암컷의 식욕을 줄이는 것은 무엇이든 수컷에게 유리할 것이다.
섬뜩하기는 하지만 불운한 수컷 사마귀는 몸으로 자식에게 투자한다고 할 수 있다.
수컷의 몸은 먹이가 되어 난자의 생산을 도우며, 이렇게 생산된 난자는 자신이 죽은 후 암컷의 체내에 저장되어 있는 자신의 정자에 의해 수정되기 때문이다.
'밈'(meme)과 그 진화
새로이 등장한 수프는 인간의 문화라는 수프다.
새로이 등장한 자기 복제자에게도 이름이 필요한데, 그 이름으로는 문화 전달의 단위 또는 모방의 단위라는 개념을 담고 있는 명사가 적당할 것이다.
밈의 예에는 곡조, 사상, 표어, 의복의 유행, 단지 만드는 법, 아치 건조법 등이 있다.
유전자가 유전자 풀 내에서 퍼져 나갈 때 정자나 난자를 운반자로 하여 이 몸에서 저 몸으로 뛰어다니는 것과 같이, 밈도 밈 풀 내에서 퍼져 나갈 때에는 넓은 의미로 모방이라 할 수 있는 과정을 거쳐 뇌에서 뇌로 건너다닌다.
어떤 과학자가 반짝이는 아이디어에 대해 듣거나 읽거나 하면 그는 이를 동료나 학생에게 전달할 것이다.
그는 논문이나 강연에서도 그것을 언급할 것이다.
이 아이디어가 인기를 얻게 되면 이 뇌에서 저 뇌로 퍼져 가면서 그 수가 늘어난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동료인 험리는 이 장의 초고를 깔끔하게 요약하여 다음과 같이 적었다.
"(...) 밈은 비유로서가 아니라 실제로 살아 있는 구조로 간주해야 한다.
당신이 내 머리에 번식력 있는 밈을 심어 놓는다는 것은 말 그대로 당신이 내 뇌에 기생하는 것이다.
바이러스가 숙주 세포에 기생하면서 그 유전 기구를 이용하는 것과 같이 나의 뇌는 그 밈의 번식을 위한 운반자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예컨대 '사후 세계에 대한 믿음'이라는 밈은 수백만 전 세계 사람들의 신경계 속에 하나의 구조로서 존재하고 있지 않은가."
기생자와 숙주
내가 보기에 기생자에 대한 질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다음의 질문이다.
그 유전자가 숙주의 유전자와 같은 운반체를 거쳐 다음 세대로 전해지는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어떤 형태로든 숙주에게 해를 끼친다고 예측할 수 있다.
그리고 만일 그렇다면 기생자는 숙주가 단순히 생존뿐만 아니라 번식도 할 수 있도록 전력을 다해 도울 것이다.
긴 진화의 시간을 거쳐 오면서 그것은 더 이상 기생자가 아니라 숙주와 협력하여 종국에는 숙주의 조직에 합체될 것이며 기생자로서의 흔적은 찾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앞에서 시사한 바와 같이 우리 몸의 세포도 이 진화의 스펙트럼을 지나쳐 온 것인지 모른다.
우리 모두가 태고의 기생자들이 합체한 것의 유물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유전자들이 서로 협력하는 이유는 그들이 우리 자신의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미래로의 출구-알이나 정자-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가령 인간과 같은 한 생물체에 들어 있는 어떤 유전자가 만일 정자 또는 난자라고 하는 종전의 경로에 의존하지 않고도 자신을 퍼뜨리는 방법을 발견한다면, 그 유전자는 새로운 방법을 택하여 비협조적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몸속의 다른 유전자들과는 다른 종류의 결과에서 이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감수 분열을 왜곡하는 유전자의 실례를 이미 보았다.
정자 내지 난자라는 '적절한 경로'를 완전히 부수고 샛길을 개척한 유전자가 있을지 모른다.
반란 유전자 절편
염색체로부터 끊겨 나와 세포 내를 자유로이 떠다니며, 증식하여 복사본을 많이 만들고 나서 다른 염색체에 끼어 들어갈 수 있는 인간 DNA의 반란 파편을 생각해 보자.
이와 같은 반란 복제자가 이용할 수 있는, 미래를 향한 비정통적인 대체 통로에는 무엇이 있을까?
우리는 피부에서 끊임없이 세포를 잃는다.
우리 집 안 먼지의 대부분은 우리가 벗어 버린 세포다.
우리는 분명히 서로의 세포를 항상 들이마실 것이다.
입속을 손톱으로 긁어 보면 수백 개의 살아 있는 세포가 나올 것이다.
연인들은 키스나 애무를 통해서 서로 다수의 세포를 주고받을 것이다.
반란 DNA의 파편은 이 같은 세포들 중 어떤 것에도 올라탈 수 있다.
만일 유전자가 다른 몸으로 통하는 비정통적인 통로에서 틈을 발견할 수 있다면, 자연선택은 그 유전자의 기회 편승을 선호하고 그것을 개선할 것이라고 우리는 예측할 수 있다.
그 DNA 파편들이 쓰는 정확한 방법에 관해서 말하자면, 그 방법이 바이러스의 모략과 다를 이유는 아무것도 없다.
사람의 반역 DNA와 침입하는 기생 바이러스를 비교하는 것의 요점은 양자 사이에 어떠한 차이도 현실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상 바이러스가 이탈 유전자 집단에서 생겼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만일 어떤 식으로든 구분 짓고 싶다면, 그것은 정자나 난자라는 정통적인 경로를 따라 몸에서 몸으로 옮겨 다니는 유전자와, 비정통적인 '샛길'을 따라 이동하는 유전자의 구분일 것이다.
양쪽 모두 '자신의' 염색체 유전자에서 유래한 유전자를 포함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또 양쪽 모두 외부에서 침입한 기생자에게서 유래한 유전자를 포함하고 있을지 모른다.
또는 내가 추측했던 것처럼, 우리 '자신의' 염색체 유전자 모두는 서로에게 기생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지도 모른다.
이 두 가지 부류의 유전자 사이에 존재하는 중요한 차이는 이들이 장래에 이익을 보게 되는 상황에 있다.
감기 바이러스의 유전자와 염색체에서 이탈한 인간의 유전자는 자신들의 숙주가 재채기하기를 '바란다'점에서 일치한다.
정통적인 염색체 유전자와 성교에 의해 전해지는 바이러스는 자신들의 숙주가 성교하기를 바란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양쪽 모두 숙주가 성적 매력을 갖기를 바랄 것이라는 생각은 매우 흥미롭다.
또 정통적인 염색체 유전자와 숙주의 난자 속에 들어가 다음 세대에 전해지는 바이러스는, 숙주가 단순히 구애에 성공할 뿐만 아니라, 자식을 맹목적으로 사랑하는 성실한 부모, 더 나아가 조부모가 되는 것을 포함하여 인생의 모든 측면에서 성공하기를 바란다는 점에서 일치할 것이다.
개미 '뻐꾸기'
윌슨의 '곤충의 사회' 중에서 내 마음에 드는 출연자는 꼬마 개미의 일종인 모노모리움 산치다.
이 종은 긴 진화의 과정에서 일개미라는 계급이 완전히 소실되었다.
숙주의 일개미가 기생자를 위해 모든 것을 하고 심지어 가장 끔찍한 일까지도 한다.
침입한 기생자 여왕의 요청에 따라 일개미들은 자기 자신의 어미를 살해한다.
왕위 찬탈자는 자기의 턱을 쓸 필요가 없다.
마인드 컨트롤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 여왕이 어떻게 그렇게 하는지는 아직까지 수수께끼다.
아마도 여왕은 화학 물질을 사용할 것이다.
왜냐하면 개미의 신경계는 보통 화학 물질에 매우 잘 반응하기 때문이다.
만약 여왕의 무기가 정말로 화학 물질이라면 그것은 과학적으로 알려져 있는 어떤 마약만큼이나 교활한 것이다.
그것이 하는 일을 생각해 보자.
그것은 일개미의 뇌를 뒤덮고 근육의 고삐를 잡아당겨 정해진 의무를 포기하도록 강요하며 그 자신의 어미를 적대시하게 한다.
개미에게 어미 살해는 유전적 광기의 행위이며, 일개미를 그렇게 하도록 유인하는 마약은 그야말로 무서운 것이다.
확장된 표현형의 세계에서는 동물의 행동이 어떻게 해서 그 유전자에게 이익을 주는가 묻지 말고 그 행동이 이익을 주는 것은 누구의 유전자인가를 질문해야 한다.
확장된 표현형의 중심 정리
지금까지는 극단적인 예들을 골라서 설명했으나, 자연에는 같은 종 또는 다른 종의 다른 개체를 좀 더 적당히 조종하는 동식물이 많이 있다.
조종하는 유전자가 자연선택되는 모든 경우에서 유전자가 조종당하는 생물체의 몸(확장된 표현형)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이치에 맞다.
유전자가 물리적으로 어디에 위치하는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조종의 표적은 같은 몸일 수도 있고, 다른 몸일 수도 있다.
자연선택은 자신이 잘 증식할 수 있도록 세상을 조종하는 유전자를 선호한다.
이로부터 내가 '확장된 표현형의 중심 정리'라고 하는 것을 이끌어 낼 수 있다.
즉 동물의 행동은, 그 행동을 담당하는 유전자가 그 행동을 하는 동물의 몸 내부에 있거나 없거나에 상관없이, 그 행동을 담당하는 유전자의 생존을 극대화하는 경향을 가진다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동물의 행동'에 대해 썼지만 이 정리는 색깔, 크기, 형상 등 어떤 것에나 적용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