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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흙속에 저 바람속에

     

     

     

    울음에 대하여

    울음과 눈물을 빼놓고서는 한국을 말할 수 없다.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주위의 모든 것까지를 '울음'으로 들었다.

     

    '운다'는 말부터가 그렇다.

    우리는 절로 소리나는 것이면 무엇이나 다 '운다'고 했다.

     

    'birds sing'이라는 영어도 우리말로 번역하면 '새들이 운다'가 된다.

    'sing'은 노래 부른다는 뜻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반대로 '운다'고 표현했던 것이다.

     

    똑같은 새소리였지만 서양인들은 그것을 즐거운 노랫소리로 들었고 우리는 슬픈 울음소리로 들었던 까닭이다. ​ ​

     

     

    식구

    가족을 '식구'라고 하는 것도 따져보면 우스운 일이다.

    영어의 가족(family)은 '봉사자'란 뜻에서 나온 것이지만 '식구'는 밥을 먹는 입이란 뜻이다.

    즉, '식구가 많다'란 말은 곧 먹는 입이 많다는 의미가 된다.

    우리는 가족도 단순히 먹는 입으로 따졌던 것이라 할 수 있다. ​ ​

     

     

    괜찮다 ​

    괜찮다는 '관계하지 않는다'라는 긴 말이 줄어서 된 것이다.

    현실에 관계하기만 하면, 나라 일에 관계하기만 하면 목숨을 잃었다.

    죄 없는 처자식까지도 억울한 형벌을 받아야 했다.

     

    혹은 쓸쓸한 귀양살이에서 눈물을 거문고로나 달래야 했다.

    즉, 관계하지 않는 것이 좋은 일이다.

    자연을 사랑했기에 그들이 반드시 풍월을 읊은 것이 아니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 ​

     

     

    달맞이꽃과 도둑놈꽃 ​

    으스름한 저녁이 되면 냇가에나 혹은 둑길에 외로이 피어나는 한 송이 꽃이 있다.

    달빛처럼 때로는 노랗기도 하고 때로는 창백하기도 한 꽃이다.

     

    그 많은 '낮'을 두고 그것은 어째서 밤에만 피는 것일까?

    그리하여 사람들은 이 꽃에 애틋한 로맨스(전설)와 아름다운 꽃 이름을 달아주었다.

     

    그것은 달을 사랑하는 님프(요정)의 넋이라고 했다.

    달을 너무도 그리워한 까닭에 별을 '시기하게 되고 끝내는 그 때문에 제우스 신의 노여움을 샀다.

    그리하여 달도 별도 없는 곳으로 쫓겨나게 되고 달님은 그 님프를 불쌍히 여겨 그를 찾아다녔다.

    제우스 신은 그것을 눈치 채고 구름과 비를 보내어 그들의 사랑을 방해했다.

    연연한 그리움을 안고 나날이 야위어가던 님프는 드디어 숨을 거두게 되고 그 넋은 어느 언덕에 묻히고 말았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풀 하나가 생겨나고 어두운 밤에 홀로 달을 기다리는 외로운 꽃이 피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달맞이꽃이다. ​

     

    그런에 우리는 토속어로는 그것을 '도둑놈꽃'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물론 요즈음은 그 꽃을 '달맞이꽃'이라고 하나, 그것은 월견초를 우리말로 그냥 옮긴 데에 불과하다.

     

    생활에 여유가 없었던 이 백성들은 밤에 피는 그 꽃의 자태에서 달을 기다리는 여인의 모습이 아니라

    쓰라린 현실의 일면을 보았다.

     

    다른 꽃들은 모두 어둠 속에 고이 잠들어 있는데 홀로 깨어 피어나는 꽃이 있다면 아무래도 좀 수상하다는 생각이다.

    즉, '도둑놈'이 아니냐는 것이다. ​

     

    꽃과 풀은 서민들의 신화다. 길가에 아무렇게나 피어 있는 그 꽃,

    그 잡초는, 더구나 요사스럽고 꾸민 데가 없어 한결 사랑을 받는다.

     

    그래서 어느 나라에서나 꽃과 푸나무에는 으레 아름다운 전설, 아름다운 이름들이 따라다니게 마련이다.

    그 속에는 흙의 마음과 민족의 시가 얽혀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꽃과 풀 이름 가운데는 '도둑놈꽃'의 경우처럼,

    아름다운 것보다는 천한 것이, 시적인 것보다는 산문적인 것이 너무나도 많은 편이다. ​ ​

     

     

    임진왜란과 눈치

    천민에서 상감에 이르기까지 눈치 없이는 하루도 살지 못했다.

    그리하여 논리보다는 직관이, 이성보다는 기미를 파악하는 감성이 더 발달하게 된 것이다.

     

    바늘 끝처럼 눈치 보는 그 감각만이 예민해져 간 것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날 때만 해도 우리는 오직 일본의 침략 여부를 눈치로만 살피려 했다. ​

     

    일본을 정탐하러 간 사신들은 반년이나 그곳에 머물러 있었으면서도 기껏 보고 온 것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눈뿐이었다.

    그야말로 눈치만 보고 온 것이다.

     

    임금 앞에서 국가의 존망을 판가름하는 그 정보를 아뢰는 자리에서

    황윤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눈이 광채가 있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우리나라로 쳐들어올 것 같다'라고 말했고,

    김성일은 반대로 '그의 눈이 쥐새끼처럼 생겼으니 결코 쳐들어올 인물이 못 된다'라고 했다. ​

     

    일본 사신들은 한국에 와서 군사들이 들고 있는 '창의 길이', '기생과 노는 목사'

    그리고 회석에서는 후추를 던져 제각기 그것을 주우려고 덤비는 꼴에서 국가의 강기가 어지러워진 것 등을

    세밀히 정탐해 갔는데, 우리의 사신들은 오직 히데요시의 눈만 가지고 왈가왈부했던 것이다. ​ ​

     

     

    "사람 살려"와 "헬프 미"

    "헬프 미"나 "다스케테쿠레"는 다 같이 도와달라는 뜻이다.

    다만 영어는 "나를 도와달라"지만 일본의 경우는 그냥 "도와달라"고만 되어 있다.

     

    사경 속을 헤매면서도 '나'를 내세우고 있는 서구인들은 확실히 동양인인 일본 사람보다 개인의식이 강한 것 같다.

    하지만 '도와달라'는 뜻만은 피차 다를 것이 없다.

     

    "헬프 미"나 "다스케테"라는 말은 "살려달라"는 것과는 달리 어디까지나 힘을 좀 보태달라는 것이다.

    '제로'에서 구원을 청하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힘을 보조해 달라는 의미가 잠재해 있다.

     

    죽음 속에서도 주체적인 힘을 잃지 않으려는 흔적이 보인다. ​

    그러므로 "도와달라"는 것과 "살려달라"는 것은 다 같은 구원의 요청이라 할지라도 얼마나 그 뜻과 태도가 다른 것일까!

     

    우리는 위급한 경우를 당했을 때 그냥 살려달라고만 한다.

    그것은 완전한 절망과 무력과 자기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다.

    살려달라는 말을 뒤집으면 "나에게는 아무런 힘도 없다", "죽어가고 있다"란 뜻이 된다. ​ ​

     

     

    눈은 로고스, 귀는 파토스 ​

    영어로 "나는 안다"라고 할 때 "Yes, I see(본다)"라고 하는 것을 보아도

    그들은 주로 시각의 면에서 인생을 이해해 간 사람들이지만,

     

    "말 잘 들어라", "말을 잘 안 듣는다", "말귀가 어둡다"라고 말하는 우리는

    '보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에서 사물을 이해하려고 한 것 같다.

     

    우리는 귀 없는 기계를 보고서도 "말을 잘 듣는다", "안 듣는다"라고 한다. ​

    그렇다면 대체 '보는 것'과 '듣는 것'은 어떠한 차이가 있는 것일까?

     

    박종홍 교수의 <본다는 것과 듣는다는 것>이라는 논문에서도 지적된 바와 같이 '보는 것'은 로고스적인 것이며

    '듣는 것'은 파토스적인 것이다.

     

    즉, 눈의 문화는 지성적이고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며 능동적인 것이다.

    그러나 귀의 문화는 정적이고 감성적이고 직감적인 것이며 수동적이라고 할 수 있다. ​ ​

     

     

    돌담의 반개방성

    우리 돌담은 바로 폐쇄와 개방의 중간쯤에 위치해 있다.

    밖에서 들여다보면 그 내부가 반쯤 보인다.

     

    당신은 그 토담 너머로 맨드라미 꽃이나 해바라기 그리고 영창을 열고 나오는 여인의 그 상반신을 볼 수 있으리라.

    내부의 풍경이 '보일락 말락' 하는 것, 그 '반개방성'이 바로 우리나라의 울타리가 갖는 상징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또 그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빨간 고추잠자리가 앉아 있는 사립문이나,

    푸른 넌출에 반쯤 가린 하얀 박들이 매달려 있는 돌담 풍경은 사실 '장식적'인 것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

     

    도둑을 막기 위해서인가?

    아니다.

    도둑은 그 정도의 담은 다 뛰어넘을 수가 있다.

    또 '도둑이 도둑의 마음을 도둑맞을까 두려울' 정도로 가난한 집에도 그런 담이 있지 않던가?

     

    그러면 짐승을 막기 위한 것인가?

    아니다.

    그 담 한구석에는 으레 개구멍이란 것이 있어, 족제비든 도둑 고양이든 자유로 드나들 수가 있다.

     

    그것은 단순한 경계선에 불과하다. ​

    그것은 '너'와 '나'의 분열과 대립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저 허전하기에 금을 그어놓은 것 정도에 불과하다.

    담은 있어도 결코 담의 그 반발적인, 그 고립적인 그런 이미지는 주지 않는다.

     

    이 돌담의 반개방성-그것은 분열이면서도 통일이며,

    고립이면서도 결합이며, 폐쇄적이면서도 동시에 개방을 뜻하는 것이다.

     

    이 어렴풋한 돌담의 경계선-말하자면 '성벽의 문명'과 '숲의 문명'의 중간인 '돌담의 문명' 속에서

    한국의 문화는 어렴풋이 자라났던 것이다. ​ ​

     

     

    공공 도덕의 제로 지대

    한국 사람들이 말하는 '친구'는 영어의 '프렌드'란 개념과는 다르다.

    그것은 '클로스 프렌드'란 뜻이다.

     

    왜냐하면 미국에서 '프렌드'라 할 때는 단지 알고 지내는 사람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다.

    한국에서는 그냥 알고 지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친구'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서 파벌주의가 생겨났는지도 모른다. ​

     

    킬로렌 신부도 말한 일이 있다.

    한국의 가정을 방문해 보면 어느 집엘 가나 따듯이 대해 준다는 것이다.

    공손하고 정답다는 것이다.

     

    그러나 집 안에서 만난 사람과는 달리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은 그와 정반대의 인상을 준다는 것이다.

    '가정'과 '거리'의 세계는 완전히 단절된 별개의 이국이란 것이다.

    '거리의 세계'는 '울타리 안의 세계'와는 달리 사람들은 불친절하고 부도덕적이라고 그는 솔직히 말하고 있다. ​ ​

     

     

    '우리'와 '나'의 혼용

    '나'란 말보다 '우리'란 말을 더 즐겨 사용한다 해서 우리 국민이 그만큼 민주적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나'없는 '우리'야말로 도리어 전제주의를 낳게 하는 요인이 되기 때문이다. ​

    개인의식이 부재할 때, 개개인의 권리가 망각되었을 때, 언제나 독재자의 검은 손이 뻗치게 되는 것이다.

     

    한국의 비극은 태반이 '나'를 찾지 못한 데에 있었다.

    주어를 상실하고 살았기에 진정한 '우리'도 찾지 못했다. '내'가 '우리' 속에 매몰된 전제주의였다.

     

    개 목걸이처럼 운명이라든지, 혈연이라든지, 권력이라든지 하는 것에 끌려다니며 살았던 것이다. ​

    다만 우리는 죽을 순간에 가서야 '나'를 느꼈던 것 같다.

    죽을 때만은 "아이고 우리 죽는다" 하지 않고," 아이고 나 죽는다"라고 했으니까......

    죽음 속에서 '나'를 발견하듯이 모든 단절 속에 나를 찾지 않고서는 진정한 '너'와 '나'의 결합인 '우리'도 생겨나지 않는다. ​ ​

     

     

    사랑에 대하여

    서양의 '사랑'에는 분노의 감정이 있다.

    신이 인간을 사랑하는 데에도 그 곁에는 분노가 있었으며

    최후 심판의 날은 신이 마지막 노여움으로 불덩어리를 내리치는 날이다.

     

    사랑과 분노의 감정을 떼낼 수 없는 것이 서양의 감정이다.

    그리하여 분노가 있는 곳에 사랑이 있고 사랑이 있는 곳에 분노가 있다고까지 표현할 수 있다. ​

     

    그러나 한국의 사랑에는 분노가 아니라 체념이 있다.

    <속미인곡>을 보나 <정과정곡>을 보나 그것은 자기를 버린 임에 대한 배신의 분노라기보다는

    체념의 한숨이며 인종의 의지였다.

     

    "달이야 크니와 구즌 비나 퇴쇼서"라든가,

    "내 님믈 그리사와 우나다니 졉동새 난 이슷하요이다......

    아소 님하, 도람 드르사 괴오셔서"와 같이

    버린 임에의 분노보다 그가 다시 돌아오기를 그냥 빌고 기다라는 순종의 사랑이다. ​ ​

     

     

    화투와 트럼프

    하트의 붉은 반점,

    흑싸리의 검은 점들 그리고 난초와 목단과 스페이드와 검고 붉은 색채들이 뒤범벅이 되어 흩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부터 그러한 잔영들은 확연히 다른 두 개의 판도로 나누어져 갔다.

    자연과 인간으로...... ​

     

    화투는 6세기 말 서구의 카드에서 힌트를 받아 일본에서 만들어진 것이라 전한다.

    그러나 <악마의 그림책>에도 지적되어 있다시피 서구의 그것과는 전연 다른 것으로,

    그것은 일본의 독창적인 카드놀이라는 것이다.

     

    1년 열두 달로 나누어진 화투는 계절에 맞추어 자연의 변화를 나타낸 것이다.

    1일 송죽, 2월 매조, 3월 사쿠라...... 하는 식으로 시작하여 8월의 공산이며,

    9월의 국화며, 10월의 단풍이며 모두가 자연의 풍류에 얽혀 있는 것들이다. ​

     

    배일사상이 짙은 한국인은 바로 이웃이지만 일본 풍속은 여간해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런데 유독 화투만이 하나의 예외로 되어 일본인보다도 더 그것을 즐겨 했고 대중화한 데에는

    그와 같은 풍류의 정이 우리 구미에 맞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화조 월풀을 사랑한 우리의 고유한 감정과 화투의 그것이 서로 공통되는 요소가 많다. ​

    매화도, 국화도, 난초도, 단풍도 모두 다 우리가 철 따라 즐겨 노래 불러오던 초목이요 꽃 들이다.

     

    말하자면 화투는 일본에서 건너온 것이지만 오히려 우리의 감정과 호흡에 일치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트럼프는 화투와는 다르다.

    화투가 자연 의식을 반영한 카드라고 한다면 트럼프는 강렬한 인간 의식과 사회의식을 상징한 카드라고 볼 수 있다. ​ ​

     

     

    토정비결

    설화, 관화, 인화......

    이러한 <토정비결>의 운수는 우리 민족이 자연을 사랑하고 자연의 율법을 따르고 자연과 동화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인간을 사랑하고 인간의 질서를 형성하고 인간과의 교섭을 원활히 하는 데에는

    실패를 거듭해 왔다는 사실을 시사해 주고 있다.

     

    인간 의식의 빈곤이었다. ​

    말을 조심하라,

    관가를 조심하라,

    인간을 조심하라,

    밖에 나가는 것을 조심하라,

    토정은 그렇게 일렀다.

     

    그리고 또 사람들은 토정의 그러한 말이 옳았다고 했다.

    미신이 아니라 도리어 그것은 확률을 이용한 과학이었는지도 모른다. ​ ​

     

     

    조선조의 시장

    이항복의 말대로 나라에 무슨 일이 있으면 시장의 상인들에게 그냥 물건을 갖다 썼다.

    그들은 이것을 '무역'이라고 했는데

    이름만 그러했지 사실상 돈도 주지 않고 강제로 물건을 빼앗다시피 가져가는 것이라 했다.

     

    나라에서뿐만 아니라 권세깨나 부리는 양반들도 사무역을 했다.

    남의 상점을 자기 집의 창고처럼 생각하고 마음대로 드나들며 물건을 갖다 썼던 모양이다.

     

    상인들도 또 상인들대로 세금을 제대로 물지 않았으며,

    '도가'나 '계방'이란 것이 있어 매점매석을 일삼아 물건값을 함부로 올리고 내렸다. ​

     

     

    시장 제도가 문란해지자 길가에 아무렇게나 집을 짓고 임시로 상점을 벌이는 일도 생겼다.

    그것이 바로 '가가'였던 것이다.

     

    본격적으로 집을 짓고 상점을 차릴 만큼 안정된 직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소위 이러한 '가가'는 '난전'이라 해서 불법화되었으며 걸핏하면 관가에서 나와 이 난전을 때려 부쉈던 것이다.

     

    그러므로 언제 부서질지도 모르고 언제 문을 닫게 될지도 모르는 상점이었던 만큼 판잣집이 제격이었던 까닭이다. ​

    그러고 보면 소위 요즈음의 '구멍가게'나 '하꼬방' 철거 소동 같은 것은

    이미 옛날부터 있어왔던 전통을 되풀이하고 있는 데에 불과하다.

     

    우리나라에서 상업이 자유직업화한 것은 갑오경장 이후의 일이다.

    말하자면 서구화된 문명과 함께 비로소 상업에 대한 인식이 싹텄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 ​

     

     

    독재의 길과 지게

    현실을 타개하는 적극적인 사고보다는 주어진 현실에 나를 맞추고자 한 데에서

    바로 그러한 '지게'가 생겨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지게는 '한국'의 모든 비극의 상징하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지한 흑인들도 '채리엇(수레)'를 밀고 다니고, 가까운 중국만 하더라도 손수레로 물건을 나른다.

     

    그들은 수레가 다니도록 길을 만들었다. ​

    그런에 우리에겐 '길'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구절양장이 물도곤 어려워라"는 식으로 험하고 위태로운 길,

    사람들이 걷다 보니 저절로 생겨난 자연 발생적 오솔길 밖에는 없었다.

     

    길 없는 나라- 그 증거로 우리는 도로를 '신작로'라고 한다.

    새로 만든 길, 즉 근대화되고부터 새로 생긴 길이 곧 도로였던 것이다.

    그 이전에는 마차조차 다니기 어려운 오솔길이었다. ​

     

    길은 문명의 상징이며, 인간과 인간이 교통하는 사회의 척도다.

    길 없는 사회란 고도의 사회를 의미한다.

     

    '로마'의 부흥은 '길'에서 비롯된 것이다.

    세계의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했듯이 로마 시민은 길을 정복하여 세계를 얻었다. ​

     

    '내'가 '너'로 향하고 '너'가 '나'로 향하려 할 때 길이 생기는 법이다.

    그것은 결합이며 통일이다.

     

    '지게'를 지고 다니는 저 가냘픈 시골길을 볼 때 우리는 역시 그렇게 가냘픈 인간 정신의 통로를 느끼게 된다.

    무거운 짐을 등에 지고 오르내리는 그 농부의 모습에서

    우리는 천 년 동안 쌓인 무거운 역사의 짐을 메고 위험한 고빗길에서 허덕이는 모든 한국인의 수난을 보는 것이다. ​

     

    왜 길을 개조하지 않고 '지게'를 만들었습니까?

    '길'을 '나'에게 맞추어 만들지 않고 어째서 '나'를 길에 맞추려 했습니까?

     

    옛 조상들의 무덤이 아니라 바로 오늘 이 시각에 우리 자신을 향해 물어봐야 할 일이다.

    누구나가 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의 '지게'를, 그 순응의 지게를 어깨에 메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 ​

     

     

    완구 ​

    페이디먼은 라는 저서에서 말하기를 미국 사람들은 낯선 사람끼리 만나면 우선 그의 '직업'에 대해서 묻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러시아 사람들은 "당신은 신을 믿느냐?"라고 묻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에 있어서는 거의 공식적으로 연령을 묻는다. ​

    미국은 '비즈니스'를, 러시아 인은 '종교'를.,

    그리고 우리는 '연령'을 존중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나이가 한 살이라도 더 많으면 형님이라고 부르고 연장자의 대우를 깍듯이 한다.

    결국 연령을 존중시한다는 것은 '젊음' 보다 늙은 것에 규준을 두고 있는 사회임을 입증하는 것이라 하겠다.

     

    우리에게는 경로사상은 있었어도 아이들에 대한 복지 관념이 없었다.

    완구뿐만 아니라 서구의 시나 성전에는 아이들을 찬양하고 노래한 것들이 많으나 우리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았다.

     

    시조에 등장하는 아이는 으레 어른들에게 술을 따르는 동자였던 것이다. ​

    아이들에 관심이 없었다는 것은 곧 미래에 대한 비전이 없었다는 말이 된다.

     

    조상의 무덤에 망주석은 세울 줄 알아도 어린에게 완구를 만들어줄 생각은 없었던 이 민족은 미래의 맹인이었다.

    완구 없는 역사, 그것은 미래 없는 역사와 다를 것이 없다. ​ ​

     

     

    춘향과 헬렌

    사실 헨렌에게서 지조라는 것은 바늘 끝만큼도 찾아볼 수가 없다.

    파리스가 헬렌을 데려가서 트로이의 왕비로 삼았을 때, 그녀는 항거는커녕 제 발로 쫓아갔던 것이다.

     

    그리고 파리스가 싸움에 패하고 죽어버리자 또 태연히 옛날의 남편인 메넬라오스의 품에 안긴다.

    혹평하여 창녀의 그것과 다를 것이 없다.

     

    헬렌은 자기 때문에 그리스 군들이 무수히 생명을 잃은 것을 미안하게 생각한다고는 말했으나

    10년 동안 파리스의 침실을 같이한 것에 대해서는 별로 이렇다 할 말이 없다. ​

     

    여기에 비하면 춘향의 정절은 대단하다.

    변 사또에게 몸을 허락지 않으려고 스스로 머리를 풀고 형장에 무릎을 꿇는 춘향의 자태와

    양 군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가는 전투 장면을 성벽의 망루에 올라 묵묵히 굽어보고 있는 그 헬렌의 모습을 견주어보라. ​

     

    망루에 나타난 헬렌의 아름다운 자태를 보고 트로이의 노인들은 감탄을 했다.

    과연 이 싸움은 억울할 것이 없다.

    자식들이 목숨을 잃은 것도 헛된 일이 아니라고......

     

    그들(서양)의 미는 윤리를 초월하는 것이다. 현실을 넘어선 것이다.

    '아름답다'는 것만으로 그만이다.

    이러한 문제는 미녀로서의 헬렌을 말하는 데에 아무런 장애도 되지 않는다. ​ ​

     

     

    색채미에 대하여

    빛깔, 오호! 빛깔

    살포시 음영을 던진 갸륵한 빛깔아

    조촐하고 깨끗한 비취여

    가을 소나기

    막 지나간

    구멍 뚫린 가을 하늘 한 조각

    물방을 뚝뚝 시리어

    곧 흰 구름장이 이는 듯하다

    그러나 오호! 이것은

    천 년 묵은 고려청자기 ​

     

    고려자기의 아름다운 빛깔을 찬미한 월탄의 시 한 구절이다.

    한국 사람만이 아니라 외국의 여러 미학자들도 고려자기 앞에서는 고개를 수그린다.

     

    그것은 단순한 미의 정취를 지나 어떤 숭고한 종교적인 신심까지도 불러일으킨다.

    심지어 어떤 외국인은 고려자기를 신에 이르는 길이라고까지 감탄한 일이 있다.

     

    그 자기의 형태도 형태지만,

    그 신묘한 빛깔에 대해서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

     

    일반적으로 한국에서는 색채미가 발달되어 있지 않다고들 말한다.

    이미 나는 그것을 백의 시비에서 언급했다.

     

    색채의 감각이란 생의 향락 속에서 움트는 것이라 했다.

    생명이, 기쁨이 있는 곳에 색채가 있고, 육체의 발산이 있는 곳에 색채를 발하는 마음이 있다.

     

    밤과 죽음과 비극은 색을 거부하고 색을 피하는 것이다. ​

    그러므로 우울한 고민의 역사 속에서 생명을 억제하면서 살아온 눈물 많던 한국인에게는

    색채도 자연 빈약해질 수밖에 없었다는 의견이 나오게 된다.

     

    그렇다면 대체 어느 민족도 감히 창조해 내지 못한 저 고려청자기의 신비한 색채미는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일까? ​

    고려청자의 '청색'은 푸른빛의 요소를 최대한으로 승화시켜서 얻은 색채다.

     

    그 청색은 완전히 도자기의 내면 속에 묻혀 있다.

    해맑은 푸른색이지만 쑥빛에 가까울 정도로 깊이가 있다.

     

    그러나 결코 어두운 빛깔이 아니다.

    푸른 채로 내부에 젖어들어 깊이를 얻은 색채라고 할까, 그야말로 영원과 무한 '무'의 빛이라고 할 수 있다.

    나타나면서 숨어 있고 즐거운 듯하면서 슬프디슬픈 신비한 색채감이다. ​ ​

     

     

    '멋'과 '스타일'

    사전적인 뜻을 보아도 '멋'은 세련되고 풍채 있는 몸매 혹은 말쑥하고 풍치 있는 맛으로 정의되어 있다.

    그것이 '스타일'이란 말처럼 체모나 형식미를 가리킨다는 데에 대해 우리는 아무런 이의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멋쟁이'라고 하는 경우처럼 사실 '댄디'와 일치하는 뜻을 가질 때도 없지 않은 것이다. ​

    그러나 '멋'과 '스타일'을 자세히 분석해 보면 정반대의 성격이 드러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스타일'은 격식화된 일정한 법칙 그리고 특정한 양식과 질서를 의미한다.

    원래 '스타일'이란 말 자체가 철필로 무엇을 새긴다는 뜻에서 생긴 말이다.

     

    그러니까 '스타일'이란 혼돈되어 있는 것을 어떤 틀 속에 통일화하는 것처럼,

    산만하고 무질서한 것에 어떤 법칙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

     

    '스타일'이 없다는 것은 그와 같은 통일성이, 일정한 법칙이, 또한 특정한 격식과 경향이 없다는 의미가 된다.

    '스타일라이즈'가 '인습화한다', '규격에 맞춘다' 등을 뜻하고

    '스타일'이 또 유파나 체재나 유행 등을 의미하게 되는 것을 보더라도 그것의 의미를 알 수 있을 것이다. ​ ​

     

     

    '가래질'이 의미하는 것

    한국인들은 모일수록 약하다고들 한다.

    스포츠만 보더라도 역도나 마라톤처럼 개인기는 우수하지만 팀워크를 필요로 하는 것들은 아주 시원찮다고 한다.

     

    세 사람만 모여도 벌써 파벌이 생기고 당 하나가 형성된다고 자조하는 축도 없지 않다.

    우리에게 협동 정신이 없었다는 것은 오늘의 현실만 보더라도 수긍이 갈 만한 일이다. ​

     

    그러나 간단히 그렇게만 규정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문제를 더 깊이 따지기 위해서는 '협동'에 대한 개념부터 논의되지 않으면 안 된다.

     

    한자의 그 '협協'을 분석해 보면 여러 힘들이 사방에서 합쳐지는 것을 의미한 것이고,

    영어의 '코퍼레이션'은 함께 일하다에서 나온 말이다. ​

     

    그런데 '힘을 모으는 데에' 있어서는 결코 성질이 하나가 아니다.

    서양의 협동은 마치 버스가 진구렁에 빠졌을 때 여러 사람이 모여들어 일정한 방향으로 힘을 합쳐 밀고 있는 경우와 같다.

     

    그러한 협동에 있어서는 설혹 한 사람쯤 빠져도 힘이 모자랄지언정 방해는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인의 협동 방식이란 그와는 다른 것 같다.

     

    그것은 '가래질'과 같은 것이다.

    힘을 합치되 일정한 방향이 아니라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끌고 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