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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 형용법(oxymoron)
서로 상반되는 의미의 단어를 병치하여 상황을 강조하거나 독자의 관심을 끄는 비유법이다.
예컨대 오래전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당했을 때 <뉴욕타임즈>의 헤드라인은 '작은 거인 암살당하다'였는데,
이것도 옥시모론의 일종이다.
또 아인슈타인과 같이 일반 사람들이 익숙한 일에는 서두르고 자기 분야에서는 천재성을 발휘하는 사람을 이르는
'우둔한 천재'나 '어두운 빛'과 같은 이미지 묘사 또는 자주 사용하는 '다 아는 비밀'이라는 말도
따지고 보면 '모순형용법'의 일례이다.
정말 착한 마음을 먹었다가도 슬며시
'에라, 나만 착하게 산다고 누가 알아주나, 아무렇게나 살자' 나쁜 생각을 품기도 하고,
다시 '아니, 그래도 인간인데, 인간답게 살아야지' 하는 마음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그뿐인가,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
볼 수 있는 사람과 볼 수 없는 사람,
기쁜 사람과 슬픈 사람 등 서로 다른 사람들끼리 치고받고 싸우기도 하지만,
결국 또 서로 보완하고 도와가며 함께 어울려 그런대로 한세상 잘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이 세상이야말로 제일 좋은 모순형용법의 예이다.
개선문
'이모, 파리에도 개선문이 있고 로마에도 개선문이 있는데 왜 우리나라에는 개선문이 없어?'
순간 나는 답변이 궁해졌다.
'우리나라에는 대신 동대문, 남대문이 있잖아?'
'아, 그럼 동대문, 남대문이 개선문이야?'
'아니, 개선문은 아니고 그냥 대문이야.'
한 번도 남의 나라를 침략하거나 정복한 적이 없고
고래 싸움에 새우 역할만 했으니 개선문이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조금은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하고 있는데, 동생이 끼어들었다.
'개선문이 뭐가 좋아? 힘없는 나라 침략해서 이겼다고 만든 건데. 동대문, 남대문이 훨씬 좋은 거야.
그리고 네가 크면 개선문보다 더 좋은 것 우리나라에 만들어. 알았지?'
조카에게 말할 때는 무엇인든 교훈적인 내용으로 바꾸는 동생의 기막힌 재능에 나는 슬며시 웃음이 났다.
무릎 꿇은 나무
네가 결혼할 사람이라면서 그 사람과 함께 인사 왔던 날을 기억하니?
내가 생각하던 대로 그 사람은 명문 대학 출신의 잘생긴 청년이었고 어디로 보나 완벽한 조건을 갖춘 신랑감이었다.
그런데 그날, 우리가 신촌의 어느 작은 음식점에서 점심을 먹을 때였어.
날씨가 더워서 식탁 옆에는 선풍기가 돌아가고 있었지.
식사를 하던 도중 그 사람은 마치 당연한 일을 한다는 듯,
벌떡 일어나 회전 중인 선풍기를 자기 쪽으로 고정시켜 놓는 것이었다.
민숙아, 이상하게도 나는 못내 그 선풍기가 마음에 걸렸다.
옆에 앉아 있는 네게 허락도 받지 않고 자기 쪽으로만 선풍기를 돌리던 그 사람이 왠지 불안했다.
그리고 결국 그는 네가 함께할 자리는 손톱만큼도 허락하지 않은 채 매사에 자기뿐이었고,
네게 상처만 남겼다.
로키산맥 해발 3,000미터 높이에 수목 한계선 지대가 있다고 한다.
이 지대의 나무들은 너무나 매서운 바람 때문에 곧게 자라지 못하고
마치 사람이 무릎을 꿇고 있는 듯한 모습을 한 채 서 있단다.
눈보라가 얼마나 심한지 이 나무들은 생존을 위해 그야말로 무릎 꿇고 사는 삶을 배워야 했던 것이지.
그런데 민숙아, 세계적으로 가장 공명이 잘 되는 명품 바이올린은 바로 이 '무릎 꿇은 나무'로 만든다고 한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온간 매서운 바람과 눈보라 속에서 나름대로 거기에 순응하는 법을 배우며
제각각의 삶을 연주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내가 살아보니까
내가 살아 보니까 내가 주는 친절과 사랑은 밑지는 적이 없다.
내가 남의 말만 듣고 월급 모아 주식이나 부동산 투자한 것은 몽땅 다 망했지만,
무심히 또는 의도적으로 한 작은 선행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고 누군가의 마음에 고마움으로 남아 있다.
소중한 사람을 만나는 것은 1분이 걸리고
그와 사귀는 것은 한 시간이 걸리고
그를 사랑하게 되는 것은 하루가 걸리지만,
그를 잊어버리는 것은 일생이 걸린다는 말이 있다.
그러니 남의 마음속에 좋은 기억으로 남는 것만큼 보장된 투자는 없다.
내가 죽고 난 후 장영희가 지상에 왔다 간 흔적은 별로 없을 것이다.
어차피 지구상의 65억 인구 중에 내가 태어났다 가는 것은 아주 보잘것없는 작은 덤일뿐이다.
그러나 이왕 덤인 김에,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덤이 아니라, 없어도 좋으나 있으니 더 좋은 덤이 되고 싶다.
그래서 먼 훗날, 내가 이 땅에서 사라진 어느 가을날,
내 제자나 이 책의 독자 중 한 명이 나보다 조금 빨리 가슴에 휑한 바람 한 줄기를 느끼면서
'내가 살아 보니까 그대 장영희 말이 맞더라'라고 말하면,
그거야말로 내가 덤으로 이 땅에 다녀간 작은 보람이 아닐까.
'내게 힘이 된 말' 또는 '내 삶을 바꾼 말'
글 쓰는 사람이면 누구나 한두 번쯤 잡지나 신문으로부터 이런 주제로 글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았을 것이다.
며칠 전 차를 타고 가는데 마침 어떤 라디오 프로에서 청취자에게 똑같은 질문을 하고 있었다.
어떤 청취자는 신입 사원 시절 회사에 잘 적응하지 못해 그만두려 했는데
'난 너의 가능성이 보이는데 넌 안 보이니?'라는 한 선배의 말에 다시 회사에 남을 용기를 얻었고,
또 한 사람은 실직 상태에 있을 때
'개구리가 멀리 뛰려면 움츠렸다가 뛰는 거야'라는 말이 너무 고맙고 힘이 되었다고 회상했다.
또 어떤 청취자는 자신이 어떤 일을 했을 때 한 후배가 '사람이 되십시오'했는데,
그것이 자기 삶의 모토가 되었다고 했다. 아주 중요한 말이고 좋은 충고지만,
사실 나는 그 청취자의 인품에 더 감동했다.
사람이 되라는 말은 아주 모욕적인 언사가 될 수 있는데,
그것도 윗사람이 아닌 후배에게 그런 말을 듣고도 불쾌하기는커녕 다시 힘을 얻을 수 있었다면
그 청취자는 이미 다시 '사람'이 될 필요가 없는 훌륭한 사람일 것이다.
그중 제일 인상 깊은 것은 한 삼십 대 청취자가 한 말이다.
말썽 부리고 방황하던 십 대 때 어머니가 부르더니 단 한 마디 '그냥 그렇게 살다가 죽어라'라고 말씀하셨다고 했다.
그 말이 너무나 무섭게 들렸고, 자기의 일생을 바꾼 계기가 되었다고 했다.
오후에 여섯 살짜리 조카가 뜰에서 놀다가 무언가에 걸려 넘어져 무릎을 다쳤다.
아이가 큰 소리로 울자 동생 부부가 동시에 맨발로 뛰쳐나가 아이를 안고 들어와서는 허둥댔다.
동생은 아이를 꼭 껴안고 어쩔 줄 몰라 눈물을 글썽이고
동생 남편은 당황해서 연고 찾는다고 이리저리 서랍을 뒤지느라 분주했다.
그때 어머니가 차분하게 말씀하셨다.
'그렇게 야단법석 떨지 마라, 애들은 뼈만 추리면 산다.'
뼈만 추리면 산다- 성품이 온화한 어머니에게 어울리지 않는 과격한 말씀이다 싶어 슬며시 웃음이 났지만
얼핏 그것이 어머니의 삶의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운명이 뒤통수를 쳐서 살을 다 깎아 먹고 뼈만 남는다 해도 울지 마라,
기본만 있으면 다시 일어날 수 있다.
살이 아프다고 징징거리는 시간에 차라리 뼈나 제대로 추려라.
그게 살 길이다.
지금 절망스럽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학생이 찾아와 힘들다고 말하면 난 이렇게 말해 줄 것이다.
'얘, 뼈만 추리면 살아. 살아라!'하고.
결혼의 조건 지난 3월에 결혼하고 한동안 소식이 없던 영미가 오랜만에 메시지를 보냈는데
사뭇 심각한 고민을 털어놓고 있었다.
'선생님, 저희는 서로에 대한 기대치가 너무나 달라요.
사랑해서 결혼했다고 생각했는데 제가 일생을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을 제대로 선택했는지 이제 와서 회의가 듭니다.'
라고 결론짓고 있었다.
나는 영미가 1학년일 때 영작문 시간에 남녀별로 '내가 결혼하고 싶은 여자/남자'를 영어로 써보게 한 것이 생각났다.
다음 학기 준비를 하기 위해 모든 자료를 다 끄집어내고 있던 터라 찾는 것이 별로 힘들지 않았다.
우선 남자 학생들이 내세운 조건들을 번역해서 조합해 보면 다음과 같다.
내가 좋아하는 여자는 나만 사랑하고 다른 남자는 쳐다보지도 않는 여자,
우리 부모님 공경하고 잘 돌보는 여자,
남편 도움 청하지 않고 가사일 혼자 알아서 하는 여자,
요리 잘하는 여자,
부지런해서 늘 집 안을 깨끗하게 잘 정돈해 놓는 여자,
몸과 정신이 건강한 여자,
책을 많이 읽는 교양 있는 여자,
근검해서 옷 사는 데 돈을 많이 쓰지 않는 여자,
내가 팥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믿는 여자,
나보다 오래 사는 여자,
비가 오면 우산 들고 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려 주는 여자,
내가 아무리 늦게 와도 저녁 먹지 않고 기다리는 여자,
아들 잘 낳는 여자,
목소리가 크지 않은 여자,
너무너무 예쁘지는 않지만 조금은 예쁜 여자,
밤늦게 친구 데리고 와도 불평 한마디 안 하는 여자,
노래를 잘해 '주부 가요 열창'에서 1등 상을 타고 나를 하와이에 데리고 갈 수 있는 여자,
일찍 일어나서 모닝커피를 만들어 달콤한 키스와 함께 주는 여자,
내 의견에 찬성하지 않을 때도 늘 웃는 여자,
밤에 도둑이 들어도 무서워하지 않는 여자,
일요일에 하루 종일 자게 해주는 여자,
겨울이면 손뜨개로 스웨터 짜주는 여자. 등등
여학생들이 장래 남편감에 대해 내세우는 조건도 만만치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남자는 나만 사랑하고 다른 여자는 쳐다보지도 않는 남자,
신체 건강하고 머리 좋은 남자,
야망이 있는 남자,
유머 감각이 풍부한 남자,
돈을 많이 버는 남자,
가사일을 즐겨 하는 남자,
두말없이 우리 부모님을 부양하는 남자,
내가 야단칠 때 말없이 앉아 있는 남자,
내 독립적 생활을 방해하지 않는 남자,
애 잘 키우는 남자,
술은 조금 하되 담배는 피우지 않는 남자,
퇴근 후에 집에 와서 요리하고 집 안 치우는 남자,
우리 부모님을 일주일에 한 번 방문하는 남자,
나보다 오래 사는 남자,
아침에 일찍 얼어나 모닝커피를 만들어 침대로 가져다주는 남자,
내 잘못을 이해를 주는 남자,
더러운 버릇이 없는 남자,
나의 사교 생활을 이해해 주는 남자,
예쁜 여자를 끔찍하게 싫어하는 남자,
스포츠를 싫어하는 남자,
목소리가 좋은 남자,
일주일에 한 번 비싼 레스토랑에서 외식하자고 하는 남자,
결혼기념일과 내 생일을 절대로 잊지 않는 남자,
자주 꽃을 주는 남자,
나와 함께 쇼핑 가는 남자,
비 오는 날 함께 오랫동안 우산 받고 걷다가 카페에서 차를 마시는 낭만이 있는 남자,
여자 화장실 앞에서 내 핸드백 들고 서 있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남자. 등등
나는 그때 영미가 자기의 목록 마지막에 써놓은 말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선생님이 조건을 쓰라니까 한번 써보기는 했지만 사랑에 빠진다면 위의 조건들은 전혀 문제가 안 돼요!'
영미에게 답장을 보내는 대신 이 쪽지를 우편으로 보내 줘야겠다.
민식이의 행복론
학생들에게 행복이라는 주제와 관련하여 '잊지 못할 사람' 또는 '잊지 못할 그날'에 대해서 쓰라는 숙제를 내주었다.
다음은 김민식이라는 학생이 쓴 '내가 행복의 교훈을 배운 잊지 못할 그날'이라는 좀 긴 제목의 글인데,
번역해 보면 다음과 같다.
사람들은 내게 언제 행복을 느끼느냐고 물으면
나는 '화장실에 갈 때, 음식을 먹을 때,
걸어 다닐 때'라고 답한다. 유치하기 짝이 없고 동물적인 답변 아니냐고 반문들을 하지만,
내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내게 '잊지 못할 그날'은 3년 전 11월 4일 고등학교 3학년 때이다.
수능시험 보기 바로 이틀 전이었다.
방과 후에 교실에서 친구들과 공부를 하고 있는데 수위 아저씨가 뛰어 들어오면서 외치셨다.
'너희 반 친구 둘이 학교 앞에서 트럭에 치여서 병원 실려 갔다!' 우리는 곧장 병원으로 달려갔다.
명수와 병호는 온몸이 피투성이 된 채 응급실에 누워 있었다.
병호는 숨을 쉬는 것조차 힘겨워했고 생명이 위태롭다고 했다.
병호는 곧 수술실로 옮겨졌고,
친구들과 나는 거의 기절 상태이신 병호 어머니와 함께 수술이 잘되기를 바라며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온 마음을 다하여 빌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드디어 의사 선생님이 나오셨다. 아무 말도 안 하셨지만, 표정이 병호의 죽음을 알렸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바로 그때,
응급실 침대에 누워 있던 명수가 깨어나서 큰 소리로 말했다.
'엄마! 나 화장실에 가고 싶어! 오줌 마렵다고!' 나는 친구의 삶과 죽음을 동시에 보고 있었다.
한 사람은 이제 이 세상에서 숨을 멈추었고 또 한 사람은 살아서 화장실을 가고 싶어 하고 있었다.
나는 생각했다. '명수야, 축하한다. 깨어나서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은 너무가 큰 축복이고 행복이다.'
'좋은 '사람 '
좋은 사람'하면 나는 장기려 박사가 생각난다.
북에 부인을 두고 와서 일생 동안 홀로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며 살던 그와의 인터뷰에서
기자가 '유명한 의사'라는 호칭을 썼다.
그러자 그가 씁쓸하게 웃으며 '유명한 의사가 되는 것은 그다지 어렵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정 '좋은 의사'가 되는 것은 참으로 어렸습니다.'
미국 유학 시절 어떤 선생님의 정년 퇴임식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동료 교수 한 분이 송별사를 하면서 말씀하셨다.
'내가 읽은 책의 내용 중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 중 하나가,
'백경'에서 에이하브가 일등 선원 스타벅에게 하는 말이요.'당신은 좋은 사람이요'.
그리고 매클레인 박사, 오늘 나는 당신에게 그 말을 쓰고 싶소. 당신은 좋은 사람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