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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총균쇠

     

     

     

    위대한 한글로 공유하게 된 공감대

    수천 년 동안 한국은 일본에 아시아 대륙의 작물, 가축, 식량 생산 방법과 문화를 전달하는 주요 통로가 되어 왔습니다.

    독특하게 여겨지는 일본어도 어쩌면 2000년 전 한반도의 유민들이 일본에 전해준 말일지도 모릅니다.

    일본어는 신라가 한반도를 통일한 후 현재 한반도에서 쓰고 있는 한국어와 같은 신라 말이 대체해버린 여러 고대 언어 중 하나가 변형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국의 위대한 문자 체계인 한글은 전파라고 부르는 과정의 좋은 예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종대왕은 한국어에 적합한 문자 체계를 고안하는 데 몽골 또는 티베트의 불교 문자의 예에서 착안한 표음문자의 개념과 중국 한자의 블록 형식의 문자 형태로부터 영감을 얻었지만, 몽골 문자나 중국어 블록형 문자 중 어느 것도 세부까지 차용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그 대신 세종대왕은 표음문자와 블록형 문자 형태의 기본적인 개념만을 차용했습니다.

    세종과 집현전 학자들은 문자의 운용 원칙과 형태 등 모든 세부 사항을 스스로 고안해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세계의 어떠한 문자 체계에서도 유례가 없는 놀랍고도 새로운 원칙을 만들었습니다.

     

    세종은 음소를 블록 안에 배열하여 음절별로 분류하도록 했고 특정 문자가 정해진 소리를 대표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특정 자음을 발음할 때의 혀와 입술 모양에 착상한 자음의 형태를 생각해냈습니다.

     

     

    모리오리족과 마오리족의 잔혹한 충돌

    뉴질랜드에서 동쪽으로 800km 정도 떨어진 채텀제도에서 수세기에 걸쳐 살아오던 모리오리족은 1835년 12월에 갑자기 자유를 잃었다.

     

    그해 11월19일, 총과 곤봉과 도끼로 무장한 500명의 마오리족이 탄 배가 도착했고 12월 5일에는 다시 마오리족 400명이 더 쳐들어왔다.

     

    마오리족은 몇 패로 나뉘어 모리오리족의 촌락들을 누비고 다니면서 모리오리족은 이제 자신들의 노예라고 선언하고 반대하는 사람들을 죽여버리기 시작했다.

     

    만약 모리오리족이 조직적으로 저항했다면 수적으로 2대1의 열세에 있던 마오리족을 물리칠 수 있었을 것이다.

    모리오리족과 마오리족 사이에서 벌어진 이 충돌의 잔혹한 결과는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일이었다.

     

    모리오리족은 고립되어 있던 소수의 수렵 채집민으로 지극히 간간한 기술과 무기밖에 없었다.

    그들은 전쟁 경험이 전무했고 강력한 지도층이나 조직력이 부족했다.

     

    반면에 마오리족 침략자들은 격렬한 전쟁이 만성적으로 되풀이되는 조밀한 농경민 사회에 속해 있었다.

    그들은 모리오리족보다 더 발전된 기술과 무기를 갖추었고 강력한 지도층의 지휘에 따라 움직였다.

     

    그러므로 마침내 그 두 집단이 마주치게 되었을 때 마오리족이 모리오리족을 마구 도살할 수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모리오리족의 비극은 현대 세계와 고대 세계를 막론하고 벌어졌던 수많은 비극과 마찬가지로 좋은 장비를 갖춘 다수와 나쁜 장비를 갖춘 소수가 부딪힌 사건이었다.

     

    마오리족과 모리오리족의 충돌을 더욱 소름끼치게 만드는 것은 두 집단이 모두 1000년경에 뉴질랜드로 이주했던 폴리네시아 농경민의 후손이라는 점이다.

     

    그로부터 머지않아 마오리족의 한 무리가 다시 채텀제도로 이주하여 모리오리족이 되었던 것이다.

    두 집단은 헤어진 후 몇 세기에 걸쳐 서로 반대 방향으로 발전했다.

     

    북섬의 마오리족은 점점 더 복잡한 기술과 정치적 조직을 발달시켰고, 모리오리족은 오히려 점점 더 단순한 기술과 정치적 조직으로 후퇴했다. 모리오리족이 수렵 채집민으로 되돌아가는 동안 북섬의 마오리족은 더욱 집약적인 농업에 매달렸다.

    그와 같은 정반대의 전개 과정이 결국 충돌 결과를 결정했다.

     

    만약 이 두 섬의 사회가 각기 차등적으로 발전한 원인들을 이해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더 폭넓은 문제, 즉 각 대륙의 발전 양상이 서로 달랐던 이유를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모델을 얻게 될 것이다.

     

     

    근대사의 가장 큰 충돌 아타우알파 생포사건

    유럽인과 아메리카 원주민의 관계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은 1532년 11월 16일 잉카의 황제 아타우알파와 스페인의 정복자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페루의 고지대 도시인 카하마르카에서 최초로 마주친 사건이었다.

     

    아타우알파는 신대륙에서 가장 크고 발전된 국가의 절대군주였고 피사로는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였던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5세를 대신하고 있었다.

     

    168명의 스페인 오합지졸을 거느린 피사로는 낯선 땅에 들어왔다.

    그는 그 지역 주민들을 잘 몰랐고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스페인인들과도 연락이 완전히 끊어졌으므로 때맞춰 원병이 도착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반면에 아타우알파는 수백만의 백성이 있는 자기 제국에 버티고 있었으며, 더구나 다른 인디언과의 전쟁에서 막 승리를 거둔 8만 대군이 그를 둘러싼 형국이었다.

     

    그런데도 두 지도자가 얼굴을 맞대고 마치 몇 분이 지나기도 전에 피사로가 대뜸 아타우알파를 사로잡아 버렸던 것이다.

    피사로는 그로부터 8개월 동안이나 이 인질을 붙잡아놓고 나중에 풀어준다는 약속하에 역사상 가장 많은 몸값을 뜯어냈다.

    피사로는 황금을 몸값으로 받은 후에 약속을 저버리고 아타우알파를 처형하고 말았다.

     

     

    정착 생활에 따른 가축화와 작물화의 이점과 그 영향

    정복 전쟁에서 말 못지않게 중요했던 것은 가축화된 동물과 더불어 인간 사회에서 진화한 병원균이었다.

    천연두, 홍역, 인플루엔자 등의 전염병들은 원래 동물들에게 퍼져 있던 매우 유사한 조상 병원균에서 나온 것인데, 각각 돌연변이를 거쳐 인간의 병원균으로 특수화되었다.

     

    동물을 가축화한 사람들은 새로 진화한 병원균에 제일 먼저 희생되었지만 사람들은 곧 새로운 질병에 대하여 상당한 저항력을 진화시켰다.

     

    그렇게 부분적으로나마 면역성을 지닌 사람들이 일찍이 그 병원균에 노출된 적이 없었던 사람들과 접촉하게 되면 당장에 유행병이 돌기 시작하여 심한 경우 전체 인구의 99%까지 몰살되기도 했다.

     

    궁극적으로 가축화된 동물에게서 얻은 병원균들은 나중에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오스트레일리아, 남아프리카공화국, 태평양의 여러 섬 등지의 원주민들을 정복할 때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동식물의 가축화와 작물화는 곧 훨씬 더 많은 식량과 조밀한 인구를 의미했다.

    그 결과 잉여 식량이 생겼고 또한 일부 지역에서는 동물을 이용하여 그와 같은 잉여 식량을 운반할 수 있는 수단이 생겨났다.

     

    그 두 가지는 정치적으로 중앙집권화되고 사회적으로 계층화되고 경제적으로 복잡하고 기술적으로 혁신적인 정주형 사회로 발전하는데 필요한 선행 조건이었다.

     

    그러므로 가축화·작물화된 동식물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는, 유라시아에서 제국, 문자, 쇠 무기 등이 제일 먼저 발달했고 다른 대륙에서는 그보다 늦어지거나 끝까지 발달하지 못했던 이유를 설명해주는 궁극적 원인이 된다.

     

    말과 낙타의 군사적 쓰임새와 동물에게서 얻은 병원균의 살상력을 마지막으로, 식량 생산과 정복 사이의 여러 연관성들이 모두 드러났다.

     

     

    식량 생산 연대 추정하는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

    식량 생산이 독립적으로 시작된 지역에서는, 어째서 그 시기가 지역에 따라 크게 달랐을까?

     

    그 의문들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고 하기 전에 우선 식량 생산이 발원했던 지역들이 어떤 곳인지, 그곳에서 언제 시작되었는지, 그리고 농작물이나 동물이 언제 어디서 처음으로 가축화·작물화된 동식물은 야생이었던 그 조상과는 대개 형태학적으로 다르게 마련이다.

     

    예를 들면 가축화된 소나 양은 크기가 더 작고 가축화된 닭이나 작물화된 사과는 크고 작물화된 완두콩의 씨껍질은 얇고 연하며, 가축화된 염소의 뿔은 언월도 모양이 아니라 나사 모양이다.

     

    그러므로 연대를 확인한 고고학적 유적지에서 발견되는 가축화·작물화된 동식물의 잔해는 금방 식별할 수 있다.

    그것은 곧 그 시기에 그 지역에서 식량을 생산했다는 강력한 증거가 된다.

     

    반면에 유적지에서 야생종의 잔해만 발견된다면 식량 생산의 증가가 없는 것이므로 수렵채집민 생활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식량 생산자들도 일부 야생 동식물을 채집하고 사냥했다.

     

    그들의 유적에서 출토되는 먹거리 잔해에 가축화·작물화된 동식물뿐만 아니라 야생종도 포함되어 있음을 보면 알 수 있다.

    고고학자들은 유적지에서 발견한, 탄소가 함유된 물질에 방사성탄소 연대측정법을 사용하여 식량 생산 연대를 추정한다.

     

    이 방법은 탄소에 극소량 포함되어 있는 성분이며 생명체에 반드시 존재하는 요소인 방사성 동위원소인 탄소 14가 서서히 붕괴되어 비방사성 동위원소인 질소 14로 변화하는 현상에 근거한 것이다.

     

    탄소 14는 우주선에 의하여 대기 속에서 끊임없이 생성된다. 식물은 대기 중의 탄소를 흡수하는데, 그 탄소에서 탄소 14와 다량으로 포함된 동위원소인 탄소 12의 비율은 거의 일정한 것으로 확인되었다.(약 1:1000000)

     

     

    식량 생산민과 수렵 채집민의 경쟁력 차이

    과학자들은 수렵 채집민의 생활을 설명할 때 흔히 '고달프고 야만스럽고 짧은 삶'이라는 토머스 홉스의 구절을 인용한다.

     

    수렵채집민들은 고되게 일하고, 날마다 먹거리를 장만해야 하는 일에 쫓기고, 걸핏하면 굶어 죽을 위기에 처하고, 부드러운 잠자리나 적당한 옷가지와 같은 기본적인 물질적 안락조차 누리지 못하고, 또 일찍 죽음을 맞이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전 세계에서 실제 식량 생산자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대부분의 농경민이나 목축민들은 수렵 채집민들보다 잘산다고 말하기 어렵다.

     

    시간의 효율성에 대한 연구들을 보더라도 하루 중 노동 시간이 수렵채집민들보다 오히려 길면 길었지 짧지는 않다.

    그러나 지난 1만 년 동안 나타난 지배적인 결과는 대체로 수렵 채집에서 식량 생산으로의 전환이었다.

     

    학자들 사이에서도 논쟁이 벌어지는 주요 요인은 대략 다섯 가지로 추려낼 수 있다.

     

    첫 번째 요인은 야생 먹거리가 감소한 것이다.

     

    두 번째 요인은, 야생동물이 감소하면서 수렵 채집 생활의 보상이 줄어들었던 것과는 반대로 작물화할 수 있는 야생식물이 증가하면서 식물의 작물화에 따르는 보상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세 번째 요인은 야생 먹거리를 채집하거나 가공, 저장하는 등 식량 생산에 필요한 각종 기술의 계속된 발전이었다.

     

    네 번째 요인은 인구밀도의 증가와 식량 생산의 발원 사이에 존재하는 상호적인 관계였다.

    인구밀도가 차츰 증가하면서 사람들은 더 많은 먹거리를 구해야 했다. 어쩌다가 식량을 생산하는 쪽으로 나아간 사람들은 그 대가를 얻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식량을 생산하고 정주하기 시작하자 산아 간격을 단축할 수 있었고, 그래서 다 많은 사람이 생기면서 다시 더 많은 음식이 필요하게 되었다.

     

     

    돌연변이 종자의 유용성과 자연선택

    초기 농경민의 눈에 보이지 않았던 또 하나의 중요한 변화 유형은 식물의 생식에 관한 것이다.

    농작물 개발에 있어서 일반적인 문제는 이따금씩 발생하는 돌연변이 개체가 정상적인 개체보다 인간에게 더 유용하다는 점이다.

     

    그렇게 바람직한 돌연변이가 정상적인 식물과 교배하면 즉시 돌연변이가 희석되거나 없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초기 농경민들은 어떤 상황일 때 그러한 돌연변이를 보존할 수 있었을까?

     

    혼자서 생식하는 식물의 경우에는 돌연변이도 자동적으로 보존된다.

    무성생식을 하는 식물이나 자화수분을 하는 암수한그루 식물이 그렇다.

     

    그러나 대다수의 야생 식물은 그런 식으로 번식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암수한그루이면서도 자화수분을 하지 못하여 다른 암수한그루 식물과 교배하는 경우나 모든 정상적인 포유류처럼 아예 암컷과 수컷의 개체로 분리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식물의 많은 돌연변이는 생식 체계 자체에도 영향을 미친다.

    어떤 돌연변이 개체는 가루받이하지 않아도 열매를 맺는다. 씨 없는 바나나, 포도, 오렌지, 파인애플 등이 그렇게 생겨난다.

    또 어떤 돌연변이 암수한그루 식물은 불화합성을 잃어버리고 자화수분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한 과정의 사례로는 서양 자두, 복숭아, 사과, 살구, 버찌를 비롯한 많은 과일나무가 있다.

    포도는 암컷 개체와 수컷 개체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정상인데 어떤 돌연변이는 자화수분을 하는 암수한그루가 되었다.

     

    그와 같은 방법들을 통하여 고대 농경민들은 식물의 생식 생태를 전혀 모르면서도 처음에는 유망해 보이는 돌연변이였지만 그 후손은 쓸모가 없어져 망각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극복했다.

     

    결국 언제나 똑같은 결과를 낳고 다시 심을 만한 가치가 있는 유용한 농작물들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이상과 같이 농경민들이 식물의 여러 개체 중에서 선택할 때에는 크기와 맛처럼 식별 가능한 특성들만 기준이 되었던 것은 아니며 종자 분산의 기법, 발아 억제물, 생식 생태 등 눈에 보이지 않는 특성들도 함께 작용했다.

     

    그 결과 각각의 식물을 제각기 다른 특성, 심지어는 정반대 특성을 기준으로 선택되었다.

    해바라기 같은 식물은 다른 것들보다 훨씬 더 큰 종자가 선택되었고, 바나나 같은 식물은 아주 작거나 있으나 마나 한 종자가 선택되었다.

     

    양상추에서는 종자나 열매를 포기하는 대신 풍성한 잎을 선택했고 밀과 해바라기는 잎을 포기하고 종자를, 그리고 호박은 잎을 포기하고 열매를 선택했다.

     

     

    인위적 선택에 의한 농작물 개발 원리

    다윈도 저서 <종의 기원>에서 대뜸 자연선택부터 설명하지는 않았다.

    그 저서의 첫 장은 우선 우리의 농작물이나 가축이 어떻게 인간의 인위선택에서 비롯되었는지를 길게 설명하고 있다.

     

    다윈을 생각할 때 우리는 대개 갈라파고스 섬의 새를 먼저 떠올리지만 정작 다윈은 그보다 농부들이 구즈베리 변종을 만들어낸 이야기부터 꺼냈던 것이다! 그는 이렇게 썼다.

     

    "하찮은 재료를 가지고 그토록 기막힌 결과를 빚어낸 원예가들의 솜씨에 크나큰 놀라움을 표시하는 원예 서적을 많이 보았다.

    그러나 그 기술은 사실상 간단한 것이고 마지막 결과를 놓고 본다면 거의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진 일이었다.

    예외 없이 처음에는 가장 잘 알려진 변종을 재배하다가 그 종자를 뿌렸을 때 약간 더 나은 변종이 나타나면 다시 그것을 선택하는 식으로 되풀이했던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인위선택에 의한 이 농작물 개발의 원리는 바로 자연선택에 의한 종의 기원을 설명하는 가장 이해하기 쉬운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선택된 가축화와 '안나 카레니나의 법칙'

    가축화할 수 있는 동물은 모두 엇비슷하고 가축화할 수 없는 동물은 가축화할 수 없는 이유가 제각기 다르다.

    어디선가 그런 말을 읽은 듯하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건 당연한 일이다.

     

    그 문장에서 몇 마디만 바꾸면 바로 톨스토이의 위대한 소설 <안나 카레니나>에 나오는 유명한 첫 문장이 되기 때문이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불행한 이유가 제각기 다르다."

     

    이 문장에서 톨스토이가 말하려고 했던 것은, 결혼 생활이 행복해지려면 수많은 요소들이 성공적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즉 서로 성적 매력을 느껴야 하고 돈, 자녀 교육, 종교, 인척 등등의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서 합의할 수 있어야 한다.

     

    행복에 필요한 이 중요한 요소들 중에서 어느 한 가지라도 어긋난다면 그 나머지 요소들이 모두 성립하더라도 그 결혼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인류 역사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 세균들

    인류의 역사에서 치명적인 세균들이 갖는 중요성은 유럽인들이 신대륙을 정복하고 원주민들을 말살시킨 괴정에서 잘 나타났다.

    유럽의 총칼에 의해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은 아메리카 원주민보다 유럽의 병원균에 의해 병상에서 목숨을 잃은 원주민 수가 훨씬 더 많았다.

     

    이 같은 병원균들은 대부분의 인디언과 그 지도자들을 죽이고 생존자들의 사기를 떨어뜨림으로써 인디언들의 저항력을 약화시켰다.

     

    예를 들자면 1519년에 코르테스는 지독하게 군사 중심적인 인구 수천만의 아즈텍 제국을 정복하기 위해 600명의 스페인인을 이끌고 멕시코 해안에 상륙했다.

     

    그러나 코르테스는 아즈텍의 수도인 테노치티틀란에 입성하여 '경우' 병력의 3분의 2만을 잃고 무사히 탈출했으며 싸움을 거듭한 끝에 결국 해안까지 돌아갈 수 있었다.

     

    여기에는 스페인의 군사적 이점과 아즈텍족의 어리숙함이 함께 작용했다.

    그러나 코르테스가 다시 쳐들어왔을 때 아즈텍인들은 더이상 그렇게 어리숙하지 않았고 몹시 격렬한 싸움을 벌였다.

     

    그런데도 스페인인들이 유리했던 것은 바로 천연두 때문이었다.

    이 병은 1520년에 스페인령 쿠바에서 감염된 한 노예와 더불어 멕시코에 도착했다.

     

    그때부터 시작된 유행병은 거의 절반에 가까운 아즈텍족을 몰살시켰으며 그 속에는 쿠이틀라우악 아주텍 황제도 포함되어 있었다.

    마치 스페인인들은 무적임을 알리려는 듯 스페인인은 내버려두고 인디언만 골라 죽이는 이 수수께끼의 질병 때문에 아즈텍의 생존자들은 사기가 크게 저하되었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약 2000만에 달했던 멕시코 인구가 1618년에 이르렀을 때는 약 160만으로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1531년 피사로가 168명을 거느리고 수백만 인구의 잉카제국을 정복하기 위해 페루 해안에 상륙했을 때에도 그와 같은 무시무시한 행운이 따랐다.

     

    물론 피사로에게는 행운이었고 잉카족에게는 불운이었지만 이미 1526년경에 육로를 통해 들어온 천연두가 우아이나 카파크와 그의 후계자를 포함하여 잉카족 인구의 대부분을 몰살시켰던 것이다.

     

    1540년 에르난도 데 소토는 미시시피 강 하류 쪽에서 인구가 조밀한 여러 인디언 마을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의 탐험이 끝난 후 유럽인들이 다시 미시시피 강 유역에 진입한 것은 그로부터 한참 뒤의 일이었지만 유라시아의 세균들은 이이 북아메리카에 뿌리를 내리고 계속 전파되었다.

     

    미시시피 강 하류에 다시 나타난 유럽인들은 1600년대 말엽의 프랑스 정착민들이었다.

    그때 이미 인디언의 큰 마을들은 거의 대부분 사라지고 없었고 그들이 남긴 흔적이라고는 미시시피 강 유역 여기저기에 있던 거대한 둑뿐이었다.

     

    최근에 와서야 비로소 우리는 콜럼버스가 신대륙에 도착할 무렵까지만 하더라도 그렇게 둑을 쌓았던 많은 사회가 대체로 멀쩡하게 남아 있었다는 것, 그리고 1492년에는 유럽인들이 체계적으로 미시시피 강 유역을 답사하기 전까지의 기간 동안 그 사회들이 붕괴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

    토머스 에디슨의 축음기는 좋은 예라고 볼 수있다.

    이것은 현대의 가장 위대한 발명가가 이룩한 가장 독창적인 발명품이다.

     

    1877년 에디슨이 최초로 축음기를 만들었을 때 그는 이 발명품이 소용될 만한 열 가지 용도를 제시하는 글을 발표했다.

    그리고 몇 년 후 에디슨은 자신의 발명품에 상업적인 가치가 없다고 조수에게 말했다.

     

    그리고 20년이 흐른 후에야 비로소 에디슨도 축음기의 주된 용도는 음악을 녹음하고 재생하는 일이라는 데 마지못해 동의했던 것이다.

     

    자동차 역시 오늘날에는 그 용도가 명백해 보이는 발명품이지만, 이것은 그 어떤 수요에 따라 발명된 것이 아니다.

    니콜라우스 오토가 최초의 가스기관을 만들었던 1866년 당시 사람들이 육상 운송에 말을 이용한 지는 이미 6000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 말도 수십 년에 걸쳐 차츰 증기기관을 이용하는 철도로 대체되는 중이었다.

    말은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고 철도에 대해서도 불만 따위는 없었다.

     

    오토가 만든 엔진은 힘이 약하고 무겁고 높이는 2.1m에 달하는 결코 말보다 호감 가는 물건은 아니었다.

    그 후 개량을 거듭하여 1885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고틀리프 다임러가 자전거에 이 엔진을 설치하여 최초의 오토바이를 만들었고 그는 다시 1896년에야 최초로 트럭을 만들었다.

     

    1905년까지도 자동차는 여전히 부자들이나 즐길 수 있는 비싸고 불안정한 장난감에 부과했다.

    말이나 철도에 대한 대중의 만족도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때까지만 해도 매우 놓았는데 그때부터 군대에서도 트럭의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트럭 제조업자들과 각국의 군대는 집중적인 로비 활동을 통해 마침내 대중에게도 그 필요성을 납득시켰고, 그 결과 산업화된 여러 국가에서는 트럭이 마차를 대신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국의 가장 큰 대도시에서도 완전한 교체가 이루어지기까지는 50년이 걸렸다.

    발명가들은 대중의 수요도 없는 상태에서 오랫동안 제작에 매달려야 할 때가 많다.

    초기 작품은 대개 성능이 떨어져서 별로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최초의 카메라, 타자기, 텔레비전 등도 오토가 만들었던 높이 2.1m의 가스기관에 못지않게 한심한 수준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발명가로서는 자기가 만든 그 한심한 원형이 과연 어떤 쓸모가 있을지, 그것을 개량하기 위해 시간과 비용을 더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을지 예견하기가 어렵다.

     

    미국에서는 해마다 약 7만 건에 달하는 특허권이 발행된다.

    그중에서 상업적인 생산에까지 이르는 것은 소수에 불과하다.

    만약 쓰일 곳을 찾은 위대한 발명품이 하나 있다면 그 뒤에는 그렇지 못한 무수한 발명품이 빛도 보지 못한 채 사라지는 것이다.

     

    심지어 처음에 어떤 필요에 의해 고안되었던 발명품들조차도 나중에는 뜻밖의 다른 필요에 더욱 큰 가치가 있음이 밝혀지기도 한다.

    제임스 와트가 증기기관을 고안한 것은 원래 광산에서 물을 퍼내기 위해서였지만 증기기관은 곧 방적 공장에 동력을 공급하게 되었고 다시 기관차와 배를 움직이게 되었다.

     

     

    발명의 영웅 이론과 그 문제점

    우리는 '제임스 와트가 1769년에 증기기관을 발명했다'는 말을 흔히 듣는다.

    그는 주전자 주둥이에서 김이 솟는 것을 보고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멋진 이야기는 불행히도 허구일 뿐이고 실제는 와트가 그런 증기기관을 만들 아이디어를 얻게 된 것은 토머스 뉴커먼의 증기기관을 고치던 중이었다.

     

    그것은 뉴커먼이 57년 전에 발명한 증기기관이었고, 와트가 수리 작업을 하던 시기에는 이미 영국에서 100대 이상 제조된 후였다.

    그리고 뉴커먼의 증기기관도 실은 영국인 토머스 세이버리가 1698년에 특허를 받은 증기기관의 뒤를 이은 것이었고, 그것 역시 프랑스인 드니 파팽이 1680년경에 설계한 증기기관의 뒤를 이은 것이었다.

     

    그리고 다시 또 그것보다 네덜란드 과학자 크리스티안 하위헌스를 비롯한 여러 사람의 아이디어가 먼저 있었다.

    그렇다고 와트가 뉴커먼의 증기기관을 크게 향상시켰다는 사실이나 뉴커먼이 세이버리의 그것을 크게 향상시켰다는 사실까지 부인하자는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은 역사는 웬만한 기록이 남아 있는 현대의 모든 발명품에서 두루 찾아볼 수 있다.

    어떤 발명품을 만들었다고 흔히 알려진 영웅들도 사실은 그 이전에 비슷한 목표를 위해 설계도를 작성하고 실용 모델이나 아니면 상업적으로도 성공적인 모델을 만들어낸 다른 발명가들의 뒤를 이은 사람들이었다.

     

    에디슨이 1879년 10월 21일 밤에 '발명' 했다는 백열전구도 실은 1841~1878년에 다른 발명가들이 특허를 얻은 수많은 백열전구를 개량한 것에 불과하다.

     

    마찬가지로 라이트형제가 만든 유인 동력 비행기의 경우에도 그보다 앞선 오토 릴리엔탈의 유인 무동력 글라이더와 새뮤얼 랭글리의 무인 동력 비행기가 있었다.

     

    새뮤얼 모스의 전신기의 경우에도 조지프 헨리, 윌리엄 쿡, 찰스 휘트스톤 등의 전신기가 앞선 것이다.

    그리고 엘리 휘트니가 단섬유 목화를 다듬기 위해 만든 조면기는 이미 수천 년 동안 장섬유 목화를 다듬는 데 이용되었던 조면기를 개량한 것에 불과했다.

     

    그렇다고 와트, 에디슨, 라이트형제, 모스, 휘트니 등이 기존의 발명품을 크게 개선하여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거나 향상시킨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제품의 발명자로 인정받고 있는 사람들의 그 같은 공헌이 없었다면 그러한 발명품들의 형태는 다소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는, 일부 천재 발명가들이 어느 특정한 시대에 특정 장소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면 과연 세계사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겠느냐는 점이다.

     

    대답은 명백하다.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없다.

     

    두루 인정받는 유명한 발명가들에게는 항상 유능한 선후배가 있었고 사회가 그들의 제품을 이용할 수 있는 시기에 발명품을 개량했던 것이다.

     

     

    정복의 직접적 요인 - 병원균, 기술, 정치조직, 문자

    해로운 병원균의 대륙 간 차이는 아이러니하게도 유용한 가축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혼잡한 인간 사회에서 전염병을 일으키는 세균들은 대부분 가축에서 전염병을 일으키던 유사한 조상 세균이 진화한 것이다.

     

    식량 생산자들은 약 1만 년 전부터 날마다 가축과 가까이 접촉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유라시아에는 가축의 종류가 많아서 그런 세균도 많이 생겼지만 남북아메리카에는 둘 다 별로 없었다.

     

    아메리카 원주민 사회에 치명적인 유행병이 그렇게 적었던 또 다른 이유는 유행병의 이상적인 번식지인 촌락의 발생이 유라시아에 비해 수천년이나 뒤졌다는 점, 그리고 신대륙에서 도시 사회가 형성되었던 안데스, 중앙아메리카, 미국 동남부 세 지역은 아시아로부터 유럽으로 페스트와 인플루엔자, 그리고 어쩌면 천연두까지 전파되었던 것과 같은 대규모의 신속한 교역을 통해 연결되지 않았다는 점 때문이다.

     

    유럽의 남북아메리카를 정복한 배후에 감춰져 있는 또 하나의 직접적인 요인으로서 병원균에 버금가는 요인은 바로 모든 기술적 측면에서의 차이였다.

     

    기술에 대해서는 특기할 만한 분야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금속은 유라시아의 모든 복잡한 사회에서 1492년에 이미 도구로 사용되고 있었다.

     

    둘째로, 군사기술은 유라시아가 남북아메리카보다 훨씬 강력했다.

    유럽의 주된 무기는 강철로 만든 칼, 창, 단검이었고 그것을 대포와 소화기가 보충하는 형태였다.

     

    셋째로, 유라시아 사회는 기계를 움직이는 동력 공급원에서도 엄청나게 유리한 입장이었다.

    유라시아에서 바퀴는 동력 변환에 이용되기 훨씬 전부터 대부분의 육상 운송에 이용되었다.

     

    유라시아 사회와 아메리카 원주민 사회는 병원균과 기술뿐 아니라 정치조직에서도 차이가 났다.

    중세 말기나 르네상스 시대에는 이미 유라시아의 대부분 지역이 조직화된 국가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논의해야 할 직접적 요인은 문자다.

    유라시아의 경우에는 대부분의 국가에 문자를 아는 관료들이 있었고 일부 국가에서는 상당수의 일반 대중도 문자를 알고 있었다.

     

     

    중국은 어쩌다 기술의 선도자 위치를 유럽에 추월당했을까?

    중국은 원래 많은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우선 식량 생산이 비옥한 초승달 지대와 거의 맞먹을 만큼 일찍 시작되었고, 북중국에서 남중국까지 그리고 해안 지방에서 티베트고원의 고산지대까지 생태학적으로 다양하여 여러 가지 다양한 농작물과 가축, 기술을 가질 수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상과 같은 이점들과 빠른 출발 덕분에 중세 때 중국은 전 세계의 기술을 선도했다.

    중국이 처음 발전시킨 중요한 기술에는 주철, 나침반, 화약, 종이, 인쇄술 등 앞에서 언급했던 수많은 문물이 포함되어 있다.

    중국은 정치적인 힘, 항해술, 제해권 등에서 세계를 선도했다.

     

    1405~1433년에 일곱 차례의 선단이 중국을 떠나 항해했는데, 그러다가 세계 어느 곳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전형적인 정치적 착오에 부딪혀 중단되고 말았다.

     

    중국 조정의 두 파벌 사시에 권력투쟁이 일어났던 것이다.

    환관들은 선단을 파견하고 지휘하는 일에 동조하는 쪽이었다.

    그래서 반대파는 권력투쟁에서 승리하자 곧 선단 파견을 중단시켰고, 결국에는 조선소마저 해체하고 해양 항해를 금지했다.

     

    중국 전역이 정치적으로 통일되어 있어 한번 결정이 내려지자 중국 전역에서 선단 파견이 중단되었고, 일시적이었던 이 결정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유럽의 경우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이탈리아인으로 태어났지만 프랑스 앙주 공의 신하가 되었고, 다시 포르투갈 왕의 신하가 되었다. 그러다가 포르투갈 왕에게 서진 탐험을 위한 배를 내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러자 콜럼버스는 메디나 세도니아 공에게 호소했지만 그 역시 거절했다.

    메디나 첼리 공에게도 호소해 보았지만 또 마찬가지였다.

     

    마지막으로 스페인 국왕과 왕비에게 호소하자 그들도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다시 요청했을 때는 결국 허락해주었다.

    그 당시 유럽이 통일되어 앞의 세 왕후 중의 한 명이 다스리고 있었다면 남북아메리카의 식민지화는 무산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중국의 정치적·기술적 우위를 유럽에 빼앗긴 일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우선 중국의 만성적 통일과 유럽의 만성적 분열부터 이해해야 한다.

     

     

    일본인 조상에 관한 세 가지 학설

    일본 문화는 1만여 년간 지속된 조몬 시대보다 700여 년간의 짧은 야요이 시대에 훨씬 더 급격한 변화를 맞게 된다.

    현대 일본인의 조상은 조몬인일까 야요이인일까, 아니면 그 둘의 혼혈인일까?

     

    일본에는 이 세 가지 학설을 둘러싼 열띤 논의가 계속 진행되고 있다.

    첫 번째 학설은 조몬의 수렵 채집민 자체가 점차 현대 일본인으로 진화했다는 의견이다.

    두 번째 학설은 야요이 시대의 변화가 어머어마한 수의 한국인이 한국의 농업 기술과 문화, 그리고 유전자를 가지고 이주한 결과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마지막 학설은 한국에서부터 이주가 이뤄졌다는 증거는 인정하지만, 그것이 엄청난 규모였다는 견해는 부정하는 것이다.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 나타난 비슷한 양상의 변화와 비교해보았을 때, 두 번째나 세 번째 학설이 내게는 첫 번째 학설보다 더 타당하게 보인다.

     

    조몬인과 야요이인의 유골과 유전자를 현대 일본인과 아이누인과 비교해 보면 조몬인의 두개골은 현대 일본인과 다르고 현대 아이누인과 가장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아이누인은 야요이를 지배한 한국인과 현대 일본인의 유전자가 뒤섞인 조몬인의 후손일 확률이 크다.

     

    아이누인은 원래 일본에서 살던 원주민의 후손일 확률이 크고, 일본인은 근래에 일본으로 이주해온 민족에서 이어져 내려왔을 거라는 본다면 어떻게 외모가 독특한 아이누인과 그렇지 않은 일본인이 함께 일본에 살게 되었는지에 관한 명쾌한 해석을 내놓을 수 있다.

     

    근대 홋카이도의 아이누어는 고대 규슈의 조몬어의 모델로 적합하지 않다.

    마찬가지로 B.C. 400년 경 한반도에서 이주해온 이들의 언어를 고대 야요이어의 원형이라고 간주하기도 어렵다.

     

    한국은 정치적으로 통일을 이룩한 A.D. 676년 이전에 세 개의 왕국으로 분할되어 있었다.

    현대 한국어는 그중 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언어에서 유래한 것이지만 신라는 일본과 그다지 긴밀한 관계를 맺지 않았다.

    한국의 초기 연대기를 보면 삼국은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했다.

     

    신라에 복속된 고구려와 백제의 언어는 후세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부 전해지는 고구려어 단어들을 보면, 현대 한국어보다 오히려 옛 일본어의 그것과 더욱 유사하다.

     

    삼국이 통일되기 전인 B.C.400년경 한반도의 언어는 보다 다양한 형태를 띠었을 것이다.

    당시 일본에 전해져 현대 일본어의 기원이 되었던 한반도의 언어는 현대 한국어의 기원이 된 신라의 언어와는 크게 달랐으리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한국인과 일본인은 언어보다 외모나 유전자에서 더 많은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

     

     

    <총,균,쇠>가 불러일으킨 반향

    나는 사회가 인간의 생물학적 차이가 아니라 환경의 차이 때문에 각 대륙마다 다르게 발전했다는 요지의 결론을 내렸다.

    진보된 기술, 중앙 집권적 정치조직, 그 밖의 복잡한 사회의 여타 특징들은 오직 잉여 식량의 축척이 가능한, 인구밀도가 높은 정주 사회에서만 나타난다.

     

    하지만 농업의 발생에 주요한 역할을 하는 직물화와 가축화가 가능한 야생식물과 동물 종은, 대륙에 따라 매우 불균등하게 분포했다.

    작물화와 가축화가 가장 용이한 야생종은 지구상에서 아홉 군데에 협소한 지역에 집중되어 있었고, 그곳은 식량 생산을 최초 시작한 지역이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 살던 최초의 거주자들은 총기와 병원균과 금속을 발전시킬 주도적인 위치를 선점했다.

    그들의 언어와 유전자가 가축, 농작물, 기술, 문자 체계와 더불어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세계를 주도하게 된 것이다.

     

    지난 6년간 고고학자, 유전학자, 언어학자 및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은 이 책의 주된 흐름을 바꾸지 않고도 그 내용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줄 여러 발견을 했다.

     

    세 가지 예를 들어보자.

     

    첫 번째로 <총,균,쇠>의 내용을 지리적으로 확장·적용하기 가장 어려웠던 부분 중 하나이자, 1996년에는 그 선사시대에 관해 거의 언급하지 않았던 일본에 대한 것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최근에 발견된 유전적 증거는 현대 일본인들이 <총,균,쇠>에서 다른 다른 나라들과 비숫하게 농업적 팽창의 산물이란 사실을 시사한다.

     

    B.C.400년경 한국의 식량 생산자들은 남서부 일본을 시작으로 일본 열도 북동부까지 그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이주민들은 집약적인 벼농사와 금속 도구를 전파했고,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 살던 농경민들이 영역을 넓혀 유럽의 원시 수렵 채집민들과 섞여 현대 유럽인이 된 것처럼, 현대 아이누족과 관련 있는 원시 일본인과 섞여 오늘날의 일본이 되었다.

     

    다른 예로는, 멕시코의 옥수수, 콩, 호박류가 북동부 멕시코와 동부 텍사스를 통과하는 가장 직접적인 경로를 따라 동서부 미국으로 전해졌다고 하는 고고학자들의 기존 가설이다. 하지만 현재 이 경로는 농사를 짓기엔 너무 건조했다는 점이 점차 확인되고 있다.

     

    대신 그 작물들이 좀 더 긴 경로를 거쳐, 아나사지 사회의 발생을 촉발하며 멕시코에서 미국 남서부로 확산되었고, 이후 대평원의 계곡을 거쳐 뉴멕시코와 콜로라도에서부터 미국 남북부로 퍼졌을 거란 의견이 힘을 얻고 있다.

     

    마지막 예로, 동서로 작물이 빠르게 전파된 유라시아 대륙과, 한 작물 혹은 그와 연관된 작물이 남북 축을 따라 느리게 전파되거나 반복적으로 재배되는 식으로 작물화가 진행된 아메리카 대륙과의 비교를 들 수 있다.

     

    이 대비되는 두 가지 유형을 입증할 더 많은 예가 계속해서 발견되고 있다.

    그러나 유라시아에서 가축화된 5종의 주요 포유류 대부분은, 아메리카의 작물과 비슷하게 유라시아의 다른 지역에서 독립적인 가축화 과정을 반복적으로 겪은 것으로 밝혀졌다.

     

    이뿐만 아니라, 농업의 발생이 어떻게 고대 세계에 농업적 기반을 둔 복잡한 사회의 발생을 촉발시켰는지 하는 문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 나를 매혹시킬 만한 여러 발견들이 있었다.

     

    그러나 <총,균,쇠>가 이룬 가장 큰 진보는 책의 요점 자체가 아니라, 그 설명이 여러 영역으로 확장되었다는 성과다.

    출판 이후 수천 명의 사람들이 내게 편지를 쓰고 전화를 했으며, 이메일을 보내거나 나를 붙잡고 <총,균,쇠>에 쓴 고대 대륙의 성격과 그들이 연구하는 현대의 성격 사이에서 발견한 유사점이나 차이점을 얘기했다.

     

    종합하자면 주로 네 가지 질문으로 요약할 수 있다.

    뉴질랜드의 머스킷 전쟁에 관한 질문이 그중 하나이며,

    왜 중국이 아닌 유럽에서 문명이 발전했는가 하는 끊이지 않는 의문,

    고대와 현대의 무역에서 진행되는 경쟁의 보다 상세한 유사점들,

    그리고 나라별로 빈부의 차가 존재하는 오늘날 상황과 <총,균,쇠>의 관련성이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