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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심어준 자신감
그해 아이스하키 시즌의 마지막 게임은 너무도 실망스러웠다.
내가 살렘 고등학교의 최고 학년일 때 출전했던 처음 세 경기에서 우리는 덴버스, 리비어, 마블헤드를 누르고 승리했다.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진 여섯 경기에서 계속 패했는데, 그 중 다섯 번은 단 한 골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패했다.
그래서 우리는 최대의 라이벌인 베벌리 고등학교와 린 경기장에서 펼치게 될 마지막 경기에서 반드시 이겨야만 했다.
살렘 고등학교 하키팀의 공동 주장이었던 나는 두 골을 넣었고, 우리는 승리에 대한 좋은 예감이 들었다.
베벌리 고등학교와의 경기는 2대 2의 동점을 기록하며 연장전으로 이어진 막상막하의 숨막히는 경기였다.
하지만 상대 팀이 이내 득점을 했고, 우리는 결국 일곱번째 패배를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
엄청난 실망감 때문에 나는 하키 스틱을 경기장의 얼음판 위에 힘껏 내동댕이치고 라커룸으로 향했다.
다른 팀원들은 벌써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라커룸의 문이 열리더니 나의 어머니가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라커룸에서는 침묵이 흘렀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은 꽃무늬가 그려진 옷을 입고, 이미 옷을 갈아입은 몇몇의 동료들이 앉아 있는 긴 의자를 지나 내게로 걸어오는 중년의 여인에게 고정되었다.
어머니는 내게 똑바로 다가와서 멱살을 잡더니 이렇게 소리쳤다.
"이 바보 같은 녀석아.
만일 패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모른다면 넌 결코 멋지게 승리하는 방법 또한 알 수가 없을 거다.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넌 더 이상 경기를 할 자격이 없어."
나는 친구들 앞에서 모욕을 당했다.
하지만 어머니가 한 말은 그 이후로도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
라커룸 안으로 들어와서 내게 당신의 열정과 에너지, 나에 대한 실망, 그리고 사랑을 남김 없이 표현한 사람은 다름 아닌 어머니였다.
나의 어머니 그레이스 웰치는 내 삶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으로, 내게 승리의 기쁨과 실패를 딛고 일어서는 자세의 중요함, 그리고 경쟁의 소중함을 가르쳐주었다.
폭발 사고
내가 '중성자탄 잭'이라는 별명을 얻기 몇 년 전에 나는 실제로 공장을 날려버린 적이 있다.
1963년 GE에 입사해서 아직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그때 나는 스물여덟 살로 입사 3년차였다.
그 봄날의 일은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그것은 내 인생에 있어 가장 끔찍한 경험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폭발 사고가 일어났을 때 나는 실험 공장의 맞은편에 있는 피츠필드의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엄청난 폭발이 공장 지붕을 날려버렸고, 맨 위층의 창문을 모두 부숴버렸다.
그 진동은 모든 사람들을, 그 중에서도 특히 나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흔들어놓았다.
폭발음으로 귓속이 멍해진 채, 나는 사무실에서 뛰쳐나가 플라스틱스 가에서 100야드 떨어진 곳에 있는 붉은 벽돌로 지은 공장으로 달려갔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나는 제발 아무도 다치지 않았기를 기도했다.
지붕의 널빤지와 유리 파편이 사방에 흩어져 있었고 연기와 먼지가 건물을 감싸고 있었다.
3층으로 뛰어올라간 나는 끔찍할 정도로 겁을 먹은 상태였다.
심장은 빠르게 뛰었고,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폭발로 인한 손상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해서 지붕과 천장의 상당 부분이 바닥에 내려앉아 있었다.
다행스럽게 크게 다친 사람은 없었다.
우리는 큰 탱크 안에 든 휘발성이 강한 용액을 가지고 산소 거품을 발생시키는 화학 실험을 하던 중이었다.
그때 원인을 알 수 없는 불꽃이 일어나 폭발을 일으켰던 것이다.
우리는 운이 좋았다.
왜냐하면 안전 장치가 폭발이 위쪽을 향하도록 해주었기 때문이다.
실험 공장의 책임자인 내게 분명히 폭발에 대한 책임이 있었다.
다음날 나는 그룹의 임원인 찰리 리드에게 사건의 전말을 설명하기 위해 코네티컷의 브리지포트까지 100마일을 운전해 가야 했다.
그는 GE를 떠나지 말라고 나를 설득했던 내 직속 상사인 구토프의 윗사람이었다.
구토프도 그 자리에 참석하긴 했지만, 나는 그 일에 직접적으로 관여한 사람이었고, 최악의 상황을 각오하고 있었다.
GE의 임원들은 관리자들에게 많은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들은 관리자들이 끊임없이 제품에 대한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내줄 것과 새로운 시장에 진입해 매출을 증대시켜 줄 것을 기대했다.
하지만 누군가가 공장을 폭파하기를 기대했던 것은 아니다.
나는 폭발이 일어난 원인을 설명할 수 있었고, 그 문제를 해결할 아이디어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매우 긴장해 있었고, 나의 자신감은 내가 폭파시킨 건물만큼이나 흔들렸다.
나는 찰리 리드를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나를 편안하게 대해 주었다.
MIT에서 화공학 박사 학위를 받은 리드는 학자적인 기질을 갖춘 뛰어난 과학자였다.
실제로도 그는 1942년에 GE에 입사하기 전에 5년간 응용수학 강사로서 MIT에 재직했었다.
그는 약간 벗겨진 머리에 중간 키의 체격이 좋은 사람이었고, 눈에서는 언제나 빛이 났다.
리드는 과학 기술에 흥미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회사와 결혼한 독신자인 그는 GE의 임원들 중 가장 실력이 뛰어난 사람으로 꼽혔으며 화학 분야에 현장 경험이 있었다.
리드는 고온에서 휘발성 물질을 갖고 작업할 때 생길 수 있는 현상을 이해해 주었다.
그날 그가 내게 보여준 이해심은 놀랄 만한 것이었다.
그는 사고를 처리하는 데 있어서 거의 소크라테스와 같은 접근법을 사용했다.
리드가 관심을 가졌던 것은, 내가 그 반응 과정을 수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여부와 폭발 사고로부터 무엇을 배웠는가 하는 점이었다.
그는 우리가 그 프로젝트를 계속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그것은 감정이나 분노가 아닌 전적으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 나온 질문이었다.
그러가 나서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그 일을 매듭지었다.
"나중에 대규모로 작업을 할 때 문제가 생기는 것보다 지금 이런 문제가 있다는 걸 알게 되어 차라리 낫군,
아무도 다치지 않아서 천만다행일세."
찰리의 이와 같은 태도는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어떤 사람이 실수를 했을 때, 처벌은 최후의 수단이 되어야 한다.
그때 내게 필요했던 것은 격려와 자신감이었다.
플라스틱 사업에 날개를 달다
새 업무를 맡아 공장 건설 공사에 막 착수했을 때 PPO 제품에 심각한 결함이 있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수명 테스트 결과, 원래의 설계대로라면 충분히 견딜 수 있는 정도의 고온에서 시간이 흐를수록 갈라지며 틈이 벌어지는 현상이 발견된 것이다.
결국 구리 온수관을 대체할 수 있는, 엄청난 잠재 시장을 가진 물질을 개발하겠다는 꿈이 물거품이 된 것이다.
나는 그 동안 쌓아온 경력을 일순간에 무너뜨릴 수도 있는 도전을 하기로 결심했다.
내 마음속에 영원히 기억될 힘겨운 순간이 있다.
1965년의 추운 겨울, 나는 구토프와 PPO를 개발한 GE 중앙연구개발실의 과학자인 알 헤이와 함께 셀커크의 공장 건설 부지에 서 있었다.
외투를 입고 장갑을 낀 채, 우리는 모두를 묻어버리기에 충분한 족히 30피트는 되는 커다란 구덩이의 가장자리에 서 있었다.
마치 새롭게 발견된 제품의 기술적 결함을 상징하는 듯한 시커먼 구덩이 앞에 서 있자니, GE에서 보낸 시간들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마침내 나는 입을 열었다.
"알, 당신은 반드시 그 결함을 없애서 우리를 구해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모두 끝장입니다."
헤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너무 걱정들 하지 마세요. 앞으로 출시될 새로운 플라스틱이 두 가지나 있지 않습니까?"
나는 그를 구덩이 속으로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나는 내가 도대체 무슨 일을 저지른 것인지 의아했다.
우리는 너무 앞서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회사가 확신을 갖지 못한 채로 단일 사업에 1,000만 달러를 투자한 엄청난 프로젝트였다.
그리고 이제 새로운 공장을 세워 생산할 물질이 없어졌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설상가상으로, 그 제품을 개발해 낸 과학자조차도 결함을 없애는 방법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가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6개월간의 피나는 노력이 필요했다.
나는 그 당시에 실험실에서 살다시피 했다.
우리는 가능한 모든 방법을 다 써보았다.
PPO에 균열이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 우리가 생각해 낼 수 있는 합성 물질이란 합성 물질은 모두 만들어보았다.
내가 GE에 입사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댄 폭스가 피츠필드의 화학자팀을 이끌었는데, 그들이 PPO에 저가의 폴리스티렌과 약간의 고무를 합성하는 방법으로 마침내 해결책을 찾아냈다.
합성 과정을 고려한 공장을 설계하는 데 골머리를 앓긴 했지만 마침내 우리는 성공했다.
이 이야기는 결국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노릴이라는 이름의 합성 물질은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10억 달러 이상의 매출을 기록하는 성공적인 제품이 된 것이다.
치열한 승계 경쟁
1979년 1월 말에 레그는 나를 그의 사무실로 불러들였다.
그러고는 모든 후보자들이 치렀던 그 유명한 '비행기 면접'을 처음으로 실시했다.
전 회장이었던 프레드 보치도 레그를 선출할 때 비슷한 면접을 했다고 한다.
자리에 앉자 레그가 입을 열었다.
"잭, 자네와 내가 함께 회사 비행기에 타고 있었는데 그 비행기가 추락을 하게 되었다고 가정해 보세.
그럴 경우에 누가 제너럴 일렉트릭의 차기 회장이 되어야 하겠나?"
나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후보자들은 즉시, 그리고 본능적으로 추락한 비행기에서 간신히 빠져나와 회사를 맡으려 했다.
하지만 레그는 정중하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우리가 둘 다 비행기에 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추락에서 살아남았다고 주장하려 했다.
그러자 그가 나의 말을 가로 막았다.
"아니, 아니지. 자네와 나는 그 사고로 죽은 거야. 그렇다면 누가 회장이 되어야 하나?"
나는 적절한 대답을 찾으려 애썼다.
결국 나는 그에게 내가 그 자리에 어울리는 최고의 후보라고 자신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이름을 말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잠깐, 자네는 죽었대두 그러는군. 자, 이제 누가 회장이 되어야겠나?"
레그가 재차 물었다.
결국 나는 첨단기술제품과 서비스 섹터를 맡고 있던 에드 후드에게 표를 던지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사려 깊고 현명한 사람입니다.
두번째로는 톰 밴더스라이스를 꼽겠습니다.
톰은 결단력이 있고 매우 강인한 사람입니다. 그들은 서로를 잘 보완해 나갈 겁니다."
톰은 발전 설비 섹터를 맡고 있었고 나처럼 2명의 부회장으로부터 전혀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레그는 내가 그들의 강점과 약점을 평가하도록 했고, 나머지 경쟁자들에 대한 내 견해를 물었다.
그는 내가 지성, 리더십, 도덕성, 그리고 대외적인 이미지라는 측면에서 각각의 후보자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알고 싶어했다.
그는 누가 누구와 함께 일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지 파악하기 위해 노력했다.
레그는 자신의 후임자는 자신처럼 마음이 맞지 않는 2명의 부회장과 일하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수개월에 걸쳐 반복된 이러한 면접을 통해 레그는 경쟁에 끼지 않은 수석 임원들을 포함해서 모든 최고경영진의 의견을 수렴했다.
레그가 9명의 임원들과 함께 그러한 면접의 결과를 종합했을 때 아무도 내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면접을 한 사람 중에서 7명은 스탠 골트를 추천했고, 2명은 에드 후드의 이름을 말했다.
레그는 6월에 다시 한 번 나를 불러들여 이렇게 물었다.
"지난번에 말했던 비행기 얘기 기억하나?"
"그럼요, 제가 비행기 사고로 죽었다고 하셨죠."
레그는 소리내어 웃었다.
"음, 이번엔 우리가 비행기를 타고 있었는데 그 비행기가 추락하게 되었네."
"또 그 이야기입니까?"
나는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잭, 이번에는 나는 죽었지만 자네는 살았네. 이제 누가 제너럴 일렉트릭의 회장이 되어야겠나?"
"이번에는 훨씬 대답하기 쉽군요. 바로 접니다."
나는 주저 없이 대답했다.
중성자탄 잭으로 불리던 시절
1980년대 초반에는 이제 막 매각되려고 하는 GE사업부에서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도 잭 웰치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어디로 향해 가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동요와 분노, 그리고 혼란이 GE 안팎의 지배적인 분위기였다.
그 모든 것은 바로 1등이나 2등 전략의 실현, 세 개의 원의 달성, 철저한 사업부 매각, 그리고 여러 측면에서 진행되고 있는 예산 삭감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5년 동안 매각된 사업부에 소속된 3만 7,000명의 직원을 포함해 전체 직원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11만 2,000명이 회사를 떠났다.
GE의 모든 임직원들은 매각 및 감원 대상이 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런 상황에서 나는 소위 '비생산적인' 일에 수백만 달러를 투자함으로써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하는 격이 되었다.
나는 지역 본사마다 운동 센터와 고급 숙박 시설 및 회의장을 건립했으며, 크로톤빌의 경영개발센터를 대대적으로 개선하기 위해 계획을 입안하고 있었다.
이러한 일에 거의 7,500만 달러가 넘는 비용을 지불하려 했던 근본적인 이유는 피에르 호텔에서 구상했던 '초일류'와 같은 '소프트웨어적인' 가치 추구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나의 이러한 행동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무모할 정도의 과감한 투자는 그들에게 총체적 난국으로 비춰졌던 것이다.
운동센터와 회의장 및 숙박 시설 건립에 소요되는 비용은 해당 사업연도에 새로운 생산 시설 및 설비를 위해 투자되는 120억 달러에 비하면 거스름돈에 불과했다.
전세계에 산재해 있는 공장들에 투자된 120억 달러는 눈에 보이지도 않았으며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7,500만 달러가 상징하는 바가 너무 컸기 때문에 직원들은 그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몰랐다.
나는 그런 직원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옳은 일을 했다고 굳게 믿었다.
그러한 역설 뒤에 숨은 논리는 현실의 엄청난 불확실성에는 맥을 못 추었다.
실제로 변화에 저항하는 조직 내의 반발은 밖으로 드러날 정도로 거셌다.
1982년 중반에 <뉴스위크>는 건물들은 멀쩡한데 사람들만 조용히 죽어간다는 의미로 내게 '중성자탄 잭'이란 별명을 붙이고 그에 대한 내용을 커버스토리로 다루었다.
차별화 활력곡선
차별화를 위한 방법으로 사람들을 A, B, C의 세 등급으로 나누어 표시한다.
A등급의 사람들은 정열이 넘치고 현명하며, 능동적으로 일을 처리하고, 여러 아이디어에 대해 매우 개발적인 태도를 취한다.
또한 그들은 많은 기회를 가지고 있는 축복받는 사람들로 스스로가 항상 열정적일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열정적으로 만들어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즐겁고도 생산적으로 업무를 처리한다.
그들은 소위 말하는 GE 리더십의 4E를 갖춘 사람들이다.
여기서 4E란 강력한 에너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능력인 격려, 까다로운 의사 결정 과정에서 '예'와 '아니오'를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결단력, 자신의 약속을 지속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실행력을 의미한다.
사실 처음에는 에너지와 격려, 그리고 결단력의 3E를 GE 리더십의 덕목으로 정했었다.
이 3E에 근거하여 처음으로 인사회의를 가졌을 때, 그 세 가지 사항을 만족시키는 몇 명의 경영자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사업을 진행해 가면서 우리는 이러한 3E를 만족시키기는 하지만 뭔가가 부족해 보이는 한두 명의 경영자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영자들에게 부족한 것은 바로 주어진 일을 끝까지 수행하는 능력이었다.
그 결과 우리는 네번째 E인 실행력을 추가하게 되었다.
나는 이 4E가 하나의 P와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열정이다.
A 등급의 사람들과 B 등급의 사람들을 구별하는 가장 큰 차이가 바로 이 열정이다.
사실 B 등급의 사람이야말로 회사의 중추이자 업무를 성공적으로 이끄는 데 있어 가장 큰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이러한 B등급의 사람들을 발전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우리는 그들이 A등급을 받은 사람들에 비해 자신들이 무엇이 부족한가를 항상 고민해 주기를 바란다.
또한 경영자들이 하는 일이 바로 B등급의 사람들이 A등급에 도달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C등급의 사람들은 맡은 바 업무를 수행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활력을 불어넣어 주기보다는 오히려 의욕을 상실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일을 완수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그들의 재취업을 위한 교육에 드는 얼마간의 비용 외에는 더 이상 그들에게 투자할 필요가 없다.
활력 곡선은 직원들을 A, B, C 등급으로 분류하는 다이내믹한 방법으로 인사회의를 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도구이다.
부하직원들을 '20-70-10'이라는 틀로 분류하는 것은 관리자들에게 있어서는 몹시 힘든 결정 과정이다.
벽 없는 조직 만들기
우리는 보상 체계, 즉 스톡옵션 제도를 변화시키는 것에서부터 시작했다.
벽 없는 행동을 기반으로 한 우리의 운영 체계는 모든 회의들을 잘 연계시킴으로써 그 회의들을 단지 일상적인 회의가 아닌 하나의 학습 사이클이 되도록 했다.
벽 없는 행동에 기초한 인사 평가는 모든 사람이 아이디어 공유에 초점을 맞출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니셔티브 그룹은 이러한 모든 변화들을 가속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이 모든 단계들은 바베이도스 해변에서 잠수함을 타고 나타난 산타클로스를 보았을 때의 충격에서 비롯된 바로 그 아이디어에서 시작되었다.
보카 회의를 다녀온 진 4개월 뒤에 나는 GE 가전 사업부의 생산담당 부사장인 로이드 트로터와 함께 인사회의에 참석중이었다.
로이드는 각기 떨어져 있는 40곳의 공장들에서 좀더 효과적으로 베스트 프랙티스를 찾아내기 위해 고안된 '매트릭스'라는 것에 대해 우리에게 설명했다.
로이드는 우선 모든 공장에 똑같이 적용할 수 있는 12개의 측정 기준 및 프로세스를 만들었다.
그런 다음 각 공장의 관리자들에게 재고회전율과 주문조달률에 관한 자체 평가를 해서 보고하도록 요청했다.
로이드는 베스트 프랙티스에는 원을 그리고, 그 반대의 최악의 프랙티스에는 직사각형을 그리는 버릇이 있었다.
각각 '영광'과 '관'으로 불리는 그 표시들은 상황을 적절하게 인식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로이드의 명확한 매트릭스는 모든 사람의 주의를 끌었다.
마지막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더 나아질 수 있는가를 배우기 위해 최고의 공장을 찾아 바쁘게 움직였다.
매트릭스의 효과는 가시적으로 나타났다.
로이드의 가전 사업부가 올린 영업이익은 1994년 1.2퍼센트에서 1996년 5.9퍼센트로 상승했고, 2000년에는 13.8퍼센트를 기록했다.
6시그마를 넘어서
피에트는 왜 우리의 고객이 6시그마를 통해 품질이 개선되었음을 인식하지 못하는가에 대한 답을 제시해 주었다.
피에트가 제시한 이유는 간단했다.
그는 6시그마가 오직 한 가지, 즉 편차에 관한 것이라는 점을 우리에게 이해시켰다.
나를 포함해 GE의 경영진은 이미 종이 비행기 실험을 통해 편차에 대해 공부를 했었다.
그러나 피에트가 설명한 방식으로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는 평균과 편차 사이의 관계를 밝혀냈다.
그것이 바로 돌파구였다.
우리는 평균에서 눈을 돌려 편차에 초점을 맞추었다.
우리는 고객이 그들이 원할 때 원하는 제품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랐다.
편차를 0으로 만든다는 말은 고객이 원하는 바로 그 시점에 제품을 수령하게 되는 상태를 의미한다.
우리의 문제는 고객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단기 생산 및 서비스 주기를 측정한 숫자들의 평균에만 기초해서 성과를 측정했다는 점이었다.
예를 들어, 평균 배달 시간이 16시간에서 8시간으로 줄어들면, 우리는 그것을 두고 성과가 50퍼센트 증가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그것을 두고 자축까지 했다.
비록 평균 배달 시간이 단축되었을지라도 고객들은 서비스가 개선되었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고객들은 편차를 느꼈을 뿐이었다.
어떤 고객은 자신이 원하는 날짜보다 9일 늦게, 또 어떤 고객은 자신이 원하는 날짜보다 6일 일찍 제품을 받았다.
고객들은 여전히 제품을 언제 받게 될지 몰라 불안해했다.
우리는 고객중심의 사고를 바탕으로 다시금 6시그마 프로그램을 적용했다.
그 결과 우리는 배달 기간의 편차를 15일에서 2일로 줄일 수 있었다.
즉 고객들이 제품을 받기를 원하는 날에는 하루 일찍, 혹은 하루 늦게 배달이 이루어졌다.
그제야 고객들은 자신들이 원했던 날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때에 제품을 받게 됨으로써 실제로 무엇인가 개선되었음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또 다른 시작을 위해
오늘날처럼 규제가 심하고 소송하기 좋아하는 세상에서 - 그리고 기업들이 가장 쉽게 타깃이 되는 세상에서 - 검증되지 않은 관료주의는 대단히 위험한 요소이다.
이는 기업을 경영하는 CEO들에게 끊임없이 골칫거리를 제공하기도 한다.
우리의 경우, 합리적이고 정당한 절차를 거부당한 예가 두 번 있었다.
EPA의 슈퍼펀드법으로 인해 우리는 그들이 요구하는 정화 작업을 하든지, 아니면 매달 2만 7,500달러의 벌금을 물어야만 했다.
그리고 우리의 상소권은 모든 일이 끝난 후인 일년 후에 기각되었다.
당연히 주어져야 할 정당한 절차가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연방법원에 그 법의 합헌성에 대한 이의를 제기했다.
EC가 허니웰 인수를 거부했을 때 재조사를 할 수 있는 여지는 어디에도 없었다.
관료주의자들은 최고의 위치를 차지할 수 있으며, 타협에 대한 어떠한 의지도 갖고 있지 않다.
미국에서는 반독점당국이 어떤 거래를 금지시키기 위해서는 법원의 판결을 받아야만 한다.
유럽에서는 그렇지 않다.
기업들은 공평한 법정에서 합리적인 시간에 공정한 공청회를 할 수 있는 권리를 가져야만 한다.
오직 정부만이 이러한 불공정한 절차를 바로잡을 수 있다.
미래에는 기업들이 교통 위반 카드 때문에 매일같이 법정에서 논쟁하는 사람들처럼 똑같은 권리를 위해 싸워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