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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소유의 종말

     

     

     

    아웃소싱

    아웃소싱 계약은 불순한 의도에서 출발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아웃소싱은 경영진이 노조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즐겨 쓰는 수단이 되었다.

     

    노조의 힘이 강하지 않은 기업이나 노조가 아예 없는 기업에 업무를 넘김으로써 회사는 골치 아픈 단체협상을 피할 수 있다.

    최근 미국을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에서 노조의 힘이 줄어드는 배경에는 아웃소싱이 있다. ​

     

     

    접속

    물품을 팔지 않고 서비스 접속을 제공하는 기업이 늘어나면서 자원이 대폭 절약되고 생산 과정에서 배출되는 공해와 쓰레기가 줄어들어 환경 보호에도 상당히 유리한 여건이 조성되고 있다.

     

    에어컨 제조업체로 유명한 캐리어는 이제 냉난방 서비스를 제공한다. 캐리어는 에어컨을 팔기보다는 고객에게 에어컨 서비스를 제공한다.

     

    고객이 거주하는 곳에 에어컨을 설치하고 미리 약속한 온도로 에어컨 기능을 유지하면서 서비스 요금을 받는다.

    제품을 판매하는 데 중점을 두었던 시절에는 회사 입장에서는 이익을 많이 남기기 위해서 어떻게 해서든 용량이 큰 에어컨을 팔려고 애썼다.

     

    그러면 자연히 에너지 소비도 늘어났다.

    그러나 접속에 바탕을 둔 서비스 관계에서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드는 비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가급적 에너지 소비를 줄이려고 노력한다.

     

    캐리어는 고객이 에너지를 적게 쓰면서도 쾌적함을 느낄 수 있도록 조명 시설의 교체, 방열 유리창 설치와 같은 부대 서비스도 제공한다.

     

    회사 입장에서는 경비를 절감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에너지 낭비도 줄이고 온실 효과를 낳는 배기가스를 줄이는 일석삼조의 효과가 있다. ​

     

     

    제품은 무료, 서비스는 유료

    제품과 제품에 수반되는 서비스의 관계가 변하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는 제품과 서비스의 시장 가치가 달라지고 있다는 데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애프터서비스는 물건에 자동적으로 첨부되어 있었다.

    최소한의 서비스 요금을 받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물건을 하나라도 더 팔기 위해 애프터서비스는 공짜로 제공했다.

     

    이제는 그런 관계가 뒤집어지고 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점점 많은 기업들이 고객을 끌어모으기 위해 제품을 그냥 주고, 제품의 유지, 보수, 업그레이드에서 돈을 벌어들인다.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의 무료 배포는 정보 기술 회사에서는 특히 효과적인 전략이다.

    한 회사의 프로그램을 통해 연결된 사람의 숫자가 늘어날수록 여기에 참여한 사람이 개인적으로 누릴 수 있는 혜택도 많아지고 회사가 제공하는 서비스의 수익성도 올라간다.

     

    업계에서는 이런 현상을 ‘네트워크 효과’라고 부른다.

    네트워크가 커지고 링크가 확대될수록 가입자는 네트워크의 덕을 톡톡히 본다. 독창성, 기민성, 순발력만으로 통하던 시대는 끝났다.

     

    기술의 원가가 제로로 곤두박질치는 경제에서 가치를 새롭게 정의할 수 있어야만 살아남는다.

    머지않아 이런 급락은 거의 모든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가치를 똥값으로 만들 것이다.

    그렇다면, 가치라는 것은 처음 개발한 제품을 무료로 제공하는 한이 있더라도 고객과 장기적 관계를 맺을 수 있을 때만 창출될 수 있다. ​

     

     

    고객이 시장이다

    기업들이 한 번에 최대한 많은 고객에게 제품을 파는 것을 포기하고 개별 고객과 장기적 관계를 맺는 쪽으로 눈길을 돌리는 것은, 곧 개인이 일평생 경험할 수 있는 세계가 상품화될 수 있다는 잠재성에 주목함을 뜻한다.

     

    마케팅 전문가들은 불연속적 시장 거래의 비중이 줄어들고 클라이언트와 평생에 걸친 안정적 관계가 더 중시되는 상황, 다시 말해서 제품 지향에서 접속 지향으로 바뀌는 환경에서 얻을 수 있는 장점을 강조하기 위해 ‘평생 가치 LTV’라는 표현을 쓴다.

     

    한 고객의 평생 가치를 계산하기 위해 어떤 기업은 장기적 관계를 확보하고 유지하는 데 들어가는 마케팅 및 고객 서비스 비용과 미래의 모든 구입을 지금 시가로 환산한 금액을 비교한다.

     

    구독자와 회원에 의존하여 운영되는 신용 카드 회사, 잡지사, 우편 주문 카탈로그 회사는 이미 오래전에 평생 가치 개념을 도입하여 손익을 따져보았다.

     

    지금은 많은 기업들이 앞다투어 이런 방식을 도입하고 있다.

    많은 기업이 제조업자와 생산업자에서 대리인과 배급 업자로 변신하는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다시금 우리는 접속의 시대에서는 소비자를 관리하는 것이 제품을 관리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결국 제품이라는 것은 고객과의 관계를 형성하는 다양한 서비스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메드코는 미국 최대의 우편 주문 약품 공급업체이다.

    메드코는 대형 제약 회사가 생산하는 약을 구입하고 공급하는 역할을 맡는다.

     

    고객, 즉 의료 보험 회사는 ‘각각의 약을 복용하는 환자의 진단, 치료, 몸조리를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에 대한 메드코의 발언권’을 존중하기로 약속해야 했다.

     

    고객이 약품을 선택할 때 메드코의 영향을 크게 받게 되자, 제약 회사는 점점 메드코에게 휘둘리게 되었다.

    제약 회사는 제2선의 공급 업자로 밀려나게 되고 고객을 확실히 장악한 메드코가 궁극적으로 승리를 거둔다.

     

    아마존과 나이키처럼 메드코는 순수 마케팅 회사에 가깝다.

    공장을 소유해야 하는 부담, 연구 개발에 막대한 시간과 비용을 쏟아부어야 하는 부담으로부터 자유롭다.

     

    이런 회사는 실질적으로 재산을 보유하지 않는다.

    가장 큰 자산은 고객에 접속할 수 있는 힘, 최종 사용자와 장기적으로 상업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이다.

    마케팅 관점이 제조 방식보다 우위에 올라서는 네트워크 경제에서는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

     

     

    체험

    바로 이 지점에서 자본주의는 완전한 문화적 자본주의를 향한 최후의 변신을 시도한다.

    문화적 생활을 상징하는 기호, 그 기호를 해석하는 예술적 의사소통의 형식만 우려먹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체험 그 자체를 우려먹는 것이다.

     

    미래의 기업은 사람의 생활 전체를 설계하고 관리하는 역할을 점점 더 떠맡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는 미래학자가 늘어나고 있다.

    앨빈 토플러도 그중 한 사람이다.

     

    ‘궁극적으로는 체험의 생산자가 경제의 전부는 아니더라도 중요한 축을 떠맡게 된다’고 토플러는 내다본다.

    그것이 실현되는 날에는 ‘우리는 역사상 처음으로 첨단 과학 기술을 이용하여 인간의 체험이라는 가장 일시적이면서도 가장 지속적인 상품을 생산하는 사회에서 살게 될 것이다.’

     

     

    근대성

    근대인은, 인간의 정신이 입수 가능한 방대한 지식을 검증 가능한 이론으로 종합하여 자연계의 기원, 발달, 원리를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했다.

     

    근대 과학의 아버지로 곧잘 불리는 프랜시스 베이컨은 자연의 비밀을 올바르게 탐구할 수 있는 방법론을 개발했다.

    베이컨은 인간의 정신은 자연과 일정과 거리를 두고 중립적 관찰자로서 자연을 연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말했다.

     

    베이컨은, 자연은 ‘길거리에 널린 창녀’나 다를 바 없다면서 ‘불가능이 없을 만큼 인간의 제국을 확대하기’위해서는 창녀의 야성을 ‘누르고 순화하고 길들여야 한다’고 보았다.

     

    베이컨은 과학적 방법을 앞세워 마침내 우리는 자연을 ‘정복하고 굴복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었고 ‘자연을 뿌리까지 흔들어 놓을 수 있게’ 되었다고 믿었다.

     

    계몽주의 철학자이며 수학자였던 르네 테카르트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말한 존재의 대 연쇄를 스트라스부르에 있는 거대한 시계의 시침과 분침처럼 자동적이며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움직이는 기계적 우주관으로 바꾸어 놓았다.

     

    데카르트는 자연에 남아있던 실제로서의 특성을 모두 벗겨내고 자연을 자신의 가장 기본적이라고 생각한 수학적, 양적 요소로 환원시켰다.

     

    계산할 수 있는 데카르트의 우주는 고정적이며 규칙적이며 분할이 가능하다.

    그것은 위치와 속도가 현실 자체의 틀을 압도적으로 규정하는 세계다.

     

    근대 철학자들을 사로잡는 새로운 현실관을 가장 훌륭하게 묘사한 사람은 아이작 뉴턴이었다.

    계몽주의 과학자이며 수학자였던 뉴턴은 이 세계는 생명이 있건 없건 아무튼 독립성을 가진 물체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았다.

     

    이 물체들은 중력이라는 만고불변의 법칙에 따라서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뉴턴이 생각한 우주는 흔히 당구공들이 가득 들어 있는 방에 비유되곤 한다.

    분명한 경계선을 가진 물체들이 물리학적 법칙에 따라 서로 부딪치는 세계를 뜻한다.

     

    이런 근대인의 감각은 사유 재산에 바탕을 둔 인간관계와 잘 맞아떨어졌다.

    자연은 이해하고 이용할 수 있는 것이라면, 총명함과 근면함으로 자연을 상품과 인공물로 변형시킨 사람이 그동안 흘린 땀의 대가로 열매를 차지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이것이 바로 존 로크가 재산의 노동 이론에서 주장한 내용이었다.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중세인의 사고방식을 깔아뭉갰다.

    그들은 심지어 인간의 지각 방식까지도 바꾸어, 우주는 위계적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중세인의 관념을 몰아내고 주체와 객체로 이루어진 새로운 인식론을 전개했다.

     

    이 세상을 주체와 객체의 관계로 파악하는 사고방식은 유럽 르네상스 시대에 발달한 원근법의 영향과도 무관하지 않다.

    중세 화가도 원근법을 모른 것은 아니었지만 원근법대로 그림을 그린 경우는 드물었다.

     

    어디까지나 위계적이며 지옥의 용광로에서부터 천국의 문에 이르기까지 존재의 거대한 연쇄로 한 점의 빈틈도 없이 촘촘히 이어진 관계망 속에서, 관계는 어디까지나 상하의 관계였다.

    그리고 그런 현실 인식은 대부분의 중세 미술에 명백히 드러나 있다. ​

     

     

    탈근대성

    탈근대 이론가들은 고정되고 인식 가능한 현실이라는 관념 자체를 부정한다.

    20세기에 들어와 독일 과학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가 불확정성의 원리를 과학적 논쟁의 불길을 당기면서 계몽주의의 철갑에 처음으로 금이 갔다.

     

    뉴턴의 법칙은 두 입자가 동시에 동일한 장소를 차지할 수 없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각각의 입자는 일정한 공간을 점유하면서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물리적 실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20세기 초반에 들어오면 물리적 현상에 대한 이런 전통적 견해는 전혀 새로운 관점 앞에서 맥없이 허물어진다.

    원자 세계로 깊숙이 들어가면 갈수록 물리학자들은 일정한 공간 안에 딱딱한 물질로 존재하는 것이 원자라는 지금까지의 통념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까지 딱딱한 물질이라고 말해 온 것은 실은 에너지의 패턴에 불과하다고 물리학자들은 주장했다.

    물질처럼 보이는 속성은 피상적 차원에서만 그렇게 드러날 뿐이었다.

     

     

    접속의 두 가지 유형

    어떤 종류의 집단적 반향이 나타나는가?

    인간의 삶에서 이념성이 줄어들고 연극성이 늘어난다면, 거창한 줄거리나 웅장한 세계관의 비중이 줄어들고 수십억 가지에 이르는 개개인이 드라마가 상업 네트워크와 사이버스페이스 안에서 자기 나름의 각본에 따라서 공연된다면, 그때 우리는 인간이 처한 조건, 인간이 추구하는 정신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문화는 인간 문명이 원활하게 기능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또 다른 가치의 산실이 된다.

    리프턴에 따르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마음으로 들어가서 생각하고 느낄 수 있는 공감 능력을 통해 동질성을 확인한다.’

     

    사회적 신뢰는 공감이라는 토대 위에서 형성된다.

    공감은 ‘타자의 인간성을 자신의 상상력 속에 끌어들이는 노력’을 요구한다.

    공감은 가장 심오한 인간의 감정에 해당된다.

     

    친밀함과 예의 바름을 하나로 이어주는 힘도 공감에서 나온다.

    공감하기 위해서는 자아의 울타리 밖으로 넘어가서 타인 안에서 감정의 둥지를 틀고 타인의 감정을 자신의 감정처럼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남에게 공감한다는 것은 희로애락을 함께 체험한다는 뜻이다.

    그런 감정을 통해서 우리는 서로를 배우고 서로를 배려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대부분의 체험이 문화로부터 떨어져 나와 상업 영역으로 밀려 들어갈 때 그것은 공감이라는 발상을 허용하지 않는 상품이 되어버린다는 사실이다.

     

    클라이언트와 서버의 관계는 언제나 방편적이게 마련이다.

    둘 사이에 공감이 오가는 경우는 지극히 드물다. 체험을 구입할 때 우리는 투자한 돈에 걸맞은 반대 급부를 기대한다.

     

    상품화된 관계에서 타인은 지불한 돈에 상응하는 ‘서비스’나 ‘실행’을 제공하는 사람이다.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을 기를 수 있는 토양이 아니다.

     

    문화 체험을 상품화하고 마케팅하는데 따르는 희생은 만만치 않다. 문화가 시들면 문화의 가장 중요한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사회적 신뢰와 공감은 어떻게 될까?

     

    네트워크 경제와 사이버스페이스에 접속하는 권리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사회적 자본에 접속할 수 있는 권리를 상실한다면 결국 인류가 얻는 것은 무엇일까?

     

    아니, 사회적 신뢰와 공감이 없는 상태에서 앞으로 우리는 상업과 교역을 제대로 해낼 수나 있을까? ​

     

     

    놀이

    산업 자본주의가 문화 자본주의로 넘어가는 지금, 노동 정신은 놀이 정신에서 서서히 밀려나고 있다.

    놀이는 간단히 말해서 문화를 창조하는 것이다.

     

    사람의 상상력을 해방시켜 공유할 수 있는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놀이는 인간 행동의 가장 근본적 범주에 해당한다. 놀이가 없으면 문명도 존립할 수 없다.

     

    새로운 자본주의 시대에는 놀이가 세계 경제의 전면에 등장한다.

    문화 체험의 상품화는 놀이의 모든 차원을 식민화하여 순전히 사고팔 수 있는 형식으로 바꾸려는 노력에 다름 아니다.

     

    접속은 누구를 놀이에 참여시키고 누구를 배제시킬 것인지 결정하는 방식의 문제로 귀결된다. ​

    성숙한 놀이는 사람들을 공동체로 끌어모은다.

     

    그것은 가장 친밀하면서도 가장 섬세한 인간 교류의 형식이다.

    성숙한 놀이는 정치적 성격을 띠었건 상업적 성격을 띠었건 제도화된 권력의 무분별한 횡포에 저항하는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