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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피타고라스의 하늘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모르는 사람은 없으리라.
피타고라스 학파는 사실 학파라기보다 오르페우스교라는 신비주의 신앙을 가진 하나의 종교 집단이었다.
그들은 매우 엄격한 종교적 계율을 지켰고, 무엇보다 영혼의 윤회를 믿었다.
피타고라스가 살던 당시 그리스에서는 막 철학적 사유가 싹트고 있었다.
당시 철학계에서는 이 세상의 다양한 사물과 변화무쌍한 현상 속에서 변하지 않는 어떤 근본적인 것을 찾는 게 유행이었다.
어떤 사람은 그걸 '물'이라 하고, 어떤 사람은 '불'이라 했다.
그런데 피타고라스는 특이하게도 그런 눈에 보이는 물질이 아니라 추상적인 것, 곧 '수'가 만물의 근원이라 생각했다.
아테네 학당(라파엘로 산치오. 프레스코화)
중앙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보인다.
플라톤의 손은 하늘 위 이데아 세계를 가리키고, 현실을 중시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손은 땅을 가리키고 있다.
그림엔 안 보이지만, 저 정문에 플라톤은 이렇게 써 붙였다.
"기하학을 모르는 자는 이 문을 들어서지 말라."
계단 아래 오른쪽에는 컴퍼스를 들고 제자들에게 뭔가 열심히 설명하는 유클리드의 모습도 보인다.
플라톤과 기하학적 원자론
플라톤의 얘기 가운데 '기하학적 원자론'이란 게 있다.
세상 모든 것이 두 개의 직삼각형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거다.
하나는 정삼각형을 반으로 자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정사각형을 대각선으로 자른 것이다.
이 두 개의 기본 삼각형을 다시 붙이면, 정삼각형과 정사각형이 된다.
정삼각형과 정사각형은 다시 각각 정다면체를 이룬다.
정삼각형이 네 개 모이면 정사면체, 정사각형이 여섯 개 모이면 정육면체, 정삼각형이 여덟 개 모이면 정팔면체,
그리고 정삼각형이 이십 개 모이면 정이십면체!
한 개가 빠졌다고?
맞다.
정십이면체도 있다.
하지만 정십이면체는 정오각형으로 이루어지는데, 이건 기본 삼각형으로 만들 수 없기 때문에 슬쩍 뺐다.
플라톤은 이 정다면체들이 네 개의 원소를 이룬다고 보았다.
정사면체는 불, 정육면체는 흙, 정팔면체는 공기, 정이십면체는 물, 이 세상 모든 것 이 네 개의 원소로 이루어져 있다.
물론 원소가 딱 네 개 밖에 없다고 한 건 그의 한계지만,
원소가 두 개의 기본 삼각형으로 이루어진다고 본 발상은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보다 앞선 거라고 한다.
이는 물리학에서 '소립자'라고 부르는 것에 대응하기 때문이다.
마티스
피카소가 세잔에게서 평면을 기하학적 단편들로 처리하는 법을 배웠다면, 마티스는 세잔에게서 또 다른 측면,
즉 풍부한 색채와 빛나는 표면을 발견했다.
<모자를 쓴 여인>은 마티스를 유명하게 만든 작품이다.
커다란 모자 밑으로 왼쪽 머리카락은 푸른색이고, 얼굴 오른쪽의 머리카락은 붉은색이다.
그녀의 얼굴엔 연보라색, 푸른색, 파란색 줄무늬가 그려져 있다.
정말로 그녀의 얼굴이 그런 색일까?
물론 그럴 리 없다.
그 때문에 이 그림은 당시의 비평가들에게 수많은 욕설을 들었고,
결국 그 욕설 중 하나가 그가 속한 그룹의 이름이 되어버린다.
야수파,
대상의 원래 색에 관계없이 강렬한 원색 위주의 색채를 구사하는 마티스가 그들에겐 짐승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마티스는 현대 추상 예술에 또 하나의 특징을 보탠다.
이제 색은 더 이상 대상에 종속되어 있을 필요가 없다.
대상에서 해방된 색채의 자유로운 배열!
피카소는 대상으로부터 형태를 해방시켰고,
마티스는 대상으로부터 색채를 해방시켰다.
카딘스키의 말대로,
이 두 사람은 '위대한 목표'를 지향하기 시작했고,
결국 현재 예술에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그 변화의 본질은 어디에 있었을까?
예술, 인류의 모어
크로체에 따르면 예술뿐만 아니라 언어도 표현이다.
따라서 언어는 곧 예술이다.
최초의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숭고한 시인이었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지만 우리의 언어 표현은 예술성을 띠고 있다.
실제로 포슬러라는 언어학자는 언어가 가진 예술성에 주목해 언어학을 미학에 종속시키기까지 했다.
시는 인류의 모어다.
실제로 인류가 최초로 언어를 만들어냈을 때 그건 거의 시에 가까웠을 거다.
가령 인류의 유년기에 가까운 인디언의 언어를 생각해 보자,
그들은 '친구'를 '나의 슬픔을 대신 지고 가는 자'라 부른다.
어느 인디언 추장은 부족의 땅을 팔라는 제안을 받고 미합중국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시적은 아름다움으로 유명한 이 편지의 내용을 정확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땅을 팔라는 귀하의 제안을 저는 정중하게 거절하는 바입니다.
우리는 땅을 팔 수가 없습니다.
그건 땅이 우리에게 속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땅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하늘을 떠다니는 구름, 대지를 스치는 바람, 흐르는 강물을 어떻게 돈으로 바꿀 수 있겠습니까,
저 울창한 숲과 바위, 나무 하나하나에 서린 조상의 추억, 부족의 역사를 어떻게......"
예술 작품의 존재
창설의 예지에서 나온 예술 작품은 인격적 존재인 우리만큼 많은 존재층을 갖고 있다.
이제 존재의 층을 따라 상승해보자.
첫 번째 존재층은 '물리적 존재'다.
이건 모든 예술 작품을 지탱하는 작품의 실체로, 예컨대 조각의 돌, 회화의 안료, 음악의 진동하는 공기 같은 거다.
크로체는 작품의 물리적 존재를 예술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그에게 순수한 예술은 예술가의 내면에 떠오른 직관이었다.
하지만 수리오는 작품의 물리적 존재를 작품의 구조에 포함시킨다.
작품은 자신의 물리적 현전을 행사할 권리가 있다는 거다.
둘째는 '현상적 존재'다.
이건 작품이 가진 순수한 감각적 질로, 수리오는 이걸 '퀄리아'라 부른다. 가령 선, 볼륨, 색, 소리 등이 그것이다.
이것들은 다듬어지지 않은 조야한 감각이 아니라 이미 예술적 가공을 거친 것이다.
가령 기본음 'A'는 자동차 소음과 달리 순수하게 음악적인 소리다.
말하자면 질적으로 순수하고 양적으로 명료한 음을 찾은 결과다.
셋째는 '사물적 존재'다.
이건 작품 속에 재현된 세계다.
가령 <사모트라케의 니케>를 보자.
현상적 존재의 층에서 그건 볼륨이라는 감각적 질이었지만, 사실적 존재의 층에선 피가 흐르는 살아 있는 신체다.
바흐의 푸가를 보자.
실제 세계의 재현은 하나도 없지만, 거기에도 어떤 이야기가 있다.
먼저 동기가 제시되고, 주제가 도입되고, 잠시 후에 대위 주제가 도입되고, 그것들이 서로 교체되면서 펼쳐지는 드라마......
넷째는 '초월적 존재'다.
이건 예술 작품 속에 깃든,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걸 넘어선 어떤 신비스러운 느낌이다.
눈에 보이는 것의 배후에 은밀히 드러나는 존재, 어떤 신비스러운 후광, 이게 바로 초월적 존재다.
이걸 말로 표현하기란 어렵다.
하지만 이 '알 수 없는 그 무엇'이야말로 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거다.
예술 작품이 주는 깊은 감동은 바로 여기서 흘러나온다고 한다.
이처럼 네 개의 존재의 층을 밟아 초월적 존재로 상승하는 가운데.
형태도 없었던 물질 덩어리가 형상적 완전성을 가진 유일한 '존재'가 된다.
존재가 창설된 거다.
물론 이건 글자 그대로 존재를 창조한 것 아니다.
그건 오직 신의 능력에 속하는 일이니까.
우리는 다만 미리 존재하는 형태적 전형을 발견하여 그걸 현실화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를 통해 우리는 자연이 채 완성되지 못한 것을 완성했다.
그건 곧 세계를 완전하게 만들려는 신의 작업을 우리가 돕고 있는 거다.
예술은 신과 인간의 공동 작업이다. 인간은 '신의 그림자'다.
이 그림자는 언제나 신을 따라다니며, 그와 함께 세계를 완성한다.
예술을 통해서,
폭포 옆에서
플라톤 <폭포>를 좀 보게. 뭐 이상한 거 없나?
아리스 어? 끝없이 돌고 도는군요.
플라톤 희한하지?
아리스 어떻게 저럴 수 있죠?
플라톤 뭘 새삼스럽게 놀라나? '이상한 고리'를 변형시킨 거지.
아리스 저게 뭘 나타낸 거죠?
플라톤 뭘 나타내긴, 그냥 그림일 뿐이야, 그냥 보고 즐기게나.
아리스 이 <폭포>를 만든 친구는 머리가 좀......
플라톤 과연 그럴까? 사실 내가 자네를 이리 데려온 데에는 이유가 있어.
아리스 뭐죠?
본질은 없다
일상 언어에서 대개 하나의 낱말이 성질이 다른 여러 사물을 동시에 가리킨다.
물론 그 사물들 모두에 공통되는 특징은 없다.
하지만 그 사물들 사이엔 서로 엇갈리는 공통성이 있어,
이를 근거로 우린 그것들 모두를 '하나'의 낱말로 지칭할 수가 있다.
언어가 가진 이런 특징을 비트겐슈타인은 '가족 유사성'이라 불렀다.
미국의 미학자 웨이츠는 이 생각을 미학에 그대로 적용한다.
예술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제까지 미학은 모두 이 물음에서 출발했다.
여러 가지 대답이 나왔다.
예술은 모방이다.
형식이다.
이념의 감각적 현현이다.
현실의 반영이다.
성욕의 표출이다 등등.
하지만 웨이츠에 따르면 이 물음 자체가 잘못된 거다.
가령 '예술'이라는 말은 음악, 무용, 영화, 소설, 조각, 회화 등 여러 가지 예술을 가리킨다.
하지만 이것들 모두에 공통된 성질이 있을까?
없다.
이들 사이엔 단지 가족 유사성만 있을 뿐이다.
본질이 없는데 본질이 뭐냐고 묻는 것 난센스다.
웨이츠에 따르면 예술의 본질이 뭐냐고 물으며 출발했던 전통적 미학은 모두 이러한 오류에 빠져 있다고 한다.
이걸 '본질주의적 오류'라고 한다.
욕망의 승화
이드는 끊임없이 쾌락을 추구하나,
현실에서 욕말을 충족하는 게 언제나 가능하지는 않다.
현실 원리 때문에 우리는 때론 대상이나 목표를 잠시 또는 영원히 포기해야 한다.
하지만 인간이 쾌락을 포기하기란 쉽지가 않다.
어떻게 하나?
이드는 방법을 안다.
공상을 통해 욕망을 충족시키는 거다.
적어도 공상 속에선 현실 원리의 속박을 벗고 자유를 누릴 수 있다.
그래서 우린 대낮에도 꿈을 꾼다.
야무지게.
물론 공상을 통한 만족은 진정한 만족이 아니다.
우린 결국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
그런데 야무진 꿈을 고스란히 품고 현실로 돌아오는 길이 있다.
바로 예술이다.
예술가들은 본능적 요구가 매우 강한 사람들로, 대개 신경증에 가까운 내향적 소질을 갖고 있다.
이때 그들은 공상을 통해 그 바람을 이루려 한다.
그들이 이루지 못한 꿈,
이루지 못한 욕망을 '승화'시킬 때 예술이 탄생한다.
승화란 욕망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게 아니다.
만약 그 바람이 사회적으로 금지된 것이라면,
교묘히 변형시킨 금지된 원천에서 나온 것임을 쉽게 눈치채지 못하게 만들어야 한다.
혹시 너무 개인적이라고 반감을 살 만한 내용은 다듬어서 다른 사람들도 함께 즐길 수 있게 해야 한다.
교묘한 형태로 욕망을 담고 있기에, 사람들은 그 작품에서 쾌감을 느낀다.
이 쾌감의 대가로 사람들은 그에게 감사와 존경을 표하고,
그 결과 예술가는 오직 꿈속에서만 가능했던 것을 현실에서 이루게 된다.
열린 예술 작품
<장미의 이름>의 저자로 유명한 에코는
현대 예술의 가장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작품의 완성을 독자의 손에 맡기는 데 있다고 본다.
오늘날의 예술에선 독자의 적극적인 개입에 문을 열어놓는 경향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이제 예술 작품은 완성품의 형태로 독자에게 배달되지 않는다.
현대 예술은 열려 있다.
이런 특징을 에코는 '개방성'이라고 부른다.
열린 예술 작품은 더 이상 일률적으로 고정된 의미를 갖지 않는다.
독자는 작품 속에 들어가 작품을 스스로 완성하는 가운데, 거기서 무한히 다양한 의미를 끄집어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 예술은 '움직이는 예술'이라 할 수 있다.
키네틱 아트라는 흐름이 있다.
키네틱이란 원래 '움직임'이란 뜻이다.
글자 그대로 키네틱 아트는 정적인 조형 예술에 '움직임'을 준 것을 말한다.
어떻게?
콜더의 모빌을 생각해 보라.
모빌은 고정된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바람에 가볍게 흔들리면서 우리에게 시시각각 새로운 조형적 의미를 던져준다.
에코가 말하는 현대의 움직이는 예술 작품은 바로 이 모빌을 닮았다.
작품이 열리기까지
현대 예술을 특징짓는 건 물론 제 1도의 개방성을 극단적으로 밀고 나가
제2도의 개방성으로 나아가려는 경향이다.
예술사에서 개방성을 추구하는 경향은 물론 현대에만 있었던 게 아니다.
가령 우린 이런 경향을 바로크 회화의 '열린 형식' 속에서도 볼 수 있다.
뚜렷한 윤곽을 가진 르네상스 회화와는 달리,
바로크 회화는 대상의 일부분이 어둠 속에 묻혀버리거나 윤곽선이 중간에 끊겨버리곤 해서
보는 사람이 대상의 형태에 관해 다양한 추측을 할 수 있게 한다.
또 묘사가 역동적이어서 보는 사람이 수시로 관점을 바꾸도록 요구한다.
하지만 이런 경향을 의식적으로 추구한 건 상징주의 시인들,
특히 말라르메부터였다.
이때부터 예술가들은 의식적으로 작품을 열린 구조로 만들기 시작한다.
상징주의 시는 매우 애매해서 수없이 많은 방식으로 해석할 수가 있다.
그리하여 이젠 하나의 작품에서 얼마나 많은 해석이 가능한가 하는 것이 아예 예술성의 기준이 되어버린다.
이제 예술가의 임무는 수많은 의미가 교차하는 지점을 포착하여 그걸 작품에 담아내는 것이다.
가령 카프카의 작품을 보자.
그의 작품에 나오는 상징적인 얘기들은 실존주의적으로도,
신학적으로도,
임상학적으로도,
정신 분석학적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이걸로 그 작품이 가진 상징적 의미가 전부 다 밝혀지는 건 아니다.
그의 작품은 그 밖의 수많은 해석에 열려 있다.
피라네시의 세계
그리스를 다시 발견한 빙켈만은 바로크 취향에서 다시 고전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다.
빙켈만에게 로마 예술은 '모방자 양식',
즉 그리스 예술을 서툴게 베낀 모조에 불과했다.
피라네시가 발견한 것은 로마였다.
빙켈만이 일으킨 신고전주의 물결 속에서 피라네시는 조용히 로마를 발견한다.
그에게 로마는 그리스 문화의 모조가 아니라,
그리스와는 전혀 다른 예술 의지를 가진 독자적인 문화였다.
피라네시의 시적인 상상력은 낭만주의를 낳게 된다.
그리스의 이상이 '아름다움'이라면, 로마의 이상은 '숭고함'이다.
그리스 예술의 전형이 조각이라면,
로마 예술의 전형은 건축이었다.
로마의 건축은 그리스의 것과는 스케일이 다르다.
로마가 거대한 건축물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시멘트라는 재료,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치'라는 로마 특유의 공법 때문이었다.
로마의 숭고함은 아치에서 나온다.
이는 중세에 그대로 받아들여져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고딕 숭고의 원형이 된다.
놀이
오래된 책에 이르기를,
인도에 한 임금이 있어,
현자들을 사랑하는 고로 늘 그들을 곁에 두고 사물의 원인과 결과에 대해 설명하기를 요구했다.
그 현자는 세 사람이었는데, 견해가 서로 달랐다.
그중 한 사람은 이성이 운수보다 더 귀하다고 말했다.
또 한 사람은 이르기를, 운수가 이성보다 더 귀한데,
그 이유는 '운수'가 이득이나 손해를 가져오는 것은 그 어떤 이성으로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란다.
세 번째 현자는 말하기를 이성과 운수,
이 두 가지를 모두 즐기는 사람이 가장 잘 사는 것이라고 했다.
이들이 자기 생각을 다 얘기하자 왕이 이들에게 명하기를,
각자 자기 말을 뒷받침할 증거를 가져오라고 했다.
이성이 중요하다고 했던 현자는 장기판을 내놓으며
가장 똑똑하고 주의 깊은 자가 상대방을 이길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운수가 중요하다고 말했던 현자는 주사위를 내놓았다.
판돈을 건 주사위 던지기 내기가 보여주듯이 이성은 전혀 중요하지 않고 오직 운수만이 귀하다는 것이다.
이성과 운수를 함께 택해야 한다고 말했던 현자는 말판,
숫자를 맞추어 가지런히 상자 안에 넣은 말들,
그리고 이 말들을 움직이게 해주는 주사위를 내놓았다.
훌륭한 경기자는 주사위를 던져 뜻하지 않게 불리한 결과가 나와도
이성을 사용함으로써 그 해를 피할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