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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코스모스

     

     

     

    나무막대기로 지구의 둘레를 계산한 에라토스테네스

    에라토스테네스는 천문학자이자, 역사학자, 지리학자, 철학자, 시인, 연극평론가였으며 수학자였다.

    그는 또한 유명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책임진 도서관장이었다.

     

    어느 날 거기서 그는 파피루스 책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는 것을 보았다.

    남쪽 변방인 시에네 지방, 나일 강의 첫 급류 가까운 곳에서는 6월 21일 정오에 수직으로 꽂은 막대기가 그림자를 드리우지 않는다.

     

    1년 중 낮이 가장 긴 하짓날에는 한낮에 가까이 갈수록 사원의 기둥들이 드리우는 그림자가 점점 짧아졌고 정오가 되면 아예 없어졌으며 그때 깊은 우물 속 수면 위로 태양이 비춰 보인다고 씌어 있었다.

     

    태양이 바로 머리 위에 있다는 뜻이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쉽게 지나쳐 버릴 관측 보고였다.

     

    나무 막대기, 그림자, 우물 속의 비친 태양의 그림자, 태양의 위치처럼 단순하고 일상적인 일들이 무슨 중요한 의미를 품고 있으랴?

    그러나 에라토스테네스는 과학자였다.

     

    그는 이렇게 평범한 사건들을 유심히 봄으로써 세상을 바꾸어 놓았다.

    그는 실제로 알렉산드리아에 막대를 수직으로 꽂고 그 막대가 6월 21일 정오에 그림자를 드리우는지를 직접 조사하였다.

     

    결과는 '그림자가 생긴다'였다.

    에라토스테네스는 보아하니 나올 수 있는 유일한 해답은 지구의 표면이 곡면이라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 곡면의 구부러지는 정도가 크면 클수록 그림자 길이의 차이도 클 것이었다.

    그림자 길이의 차이로 따져 보니 알렉산드리아와 시에네는 지구 표면을 따라 약 7도 정도 떨어져 있어야 했다.

     

    다시 말해서 두 막대의 끝을 지구 중심까지 뚫고 들어가도록 연장한다면 두 막대의 사잇각이 7도가 된다는 뜻이다.

    지구 둘레 전체가 360도 이므로, 7도는 전체의 50분의 1 정도다.

     

    에라토스테네스는 사람을 시켜 시에네까지 걸어가게 한 다음 그 거리를 보폭으로 재 봤기 때문에 시에네가 알렉산드리아에서 대략 800킬로미터 떨어져 있다고 알고 있었다.

     

    800킬로미터의 50배이면 4만 킬로미터, 이것이 바로 지구의 둘레인 것이다.

    그때 에라토스테네스가 사용한 도구라고 할 만한 것은 막대기, 눈, 발과 머리 그리고 실험으로 확인하고자 하는 정신이 전부였다.

    그 정도만 가지고 에라토스테네스는 지구의 둘레를 겨우 몇 퍼센트의 오차로 정확하게 추정할 수 있었던 것이다.

     

     

    행성은 타원 궤도를 따라 움직이고 태양은 그 타원의 초점에 있다.

    원 궤도와 실제 궤도를 분간하는 일은 우선 측정값이 정확해야 가능했고 비록 자신의 이론과 일치하지 않더라도 그 측정값을 과감하게 수용하는 용기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어디나 조화로운 비율이 장식처럼 박혀 빛나는 이 우주이지만, 그러한 조화의 비율도 경험적 사실에 반드시 부합해야 한다."

    케플러는 여기서 원 궤도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신성한 기하학에 대한 그의 신앙을 뒤흔들어 놓았다.

    결국 케플러는 원에 대한 동경이 하나의 환상이었음을 깨달았다.

     

    지구도 코페르니쿠스가 말한 대로 과연 하나의 행성이었다.

    그리고 케플러가 보기에 지구는 전쟁, 질병, 굶주림과 온갖 불행으로 망가진, 확실히 완벽과는 아주 먼 존재였다.

     

    그리고 만일 행성이 '불완전'하다면, 그 궤도 역시 불완전하지 않겠는가? 케플러는 달걀 모양 곡선을 여럿 시험해 보았다.

    열심히 계산해 내려가다 몇 달 뒤에 자포자기 심정으로 타원의 공식을 이용하여 분석을 다시 시도했다.

    결과는 튀코 브라해의 관측값과 완전히 일치했다.

     

    "자연의 진리가, 나의 거부로 쫓겨났지만, 인정을 받고자 겉모습을 바꾸고 슬그머니 뒷문으로 들어왔으니......아, 나야 말로 참으로 멍청이였구나!"

     

    일정한 속도로 원 운동을 하는 행성이라면 중심각이 같은 부채 꼴의 호 또는 그 부분의 원둘레를 도는 데 같은 시간이 걸린다.

    케플러가 보니 타원 궤도를 도는 행성은 그렇게 움직이지 않았다.

     

    타원 궤도를 따라 움직이는 행성과 태양을 이은 선은 타원 내부에서 부채꼴 형태의 영역을 쓸고 지나간다.

    케플러는 법칙을 자연에서 그저 캐낼 수 있었음에 만족하지 않고 한발 더 나아가 더 근본적인 행성 운동의 원인을 찾고자 노력했다.

     

    태양이 태양계 내 물체들의 운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행성이 태양에 가까워질수록 공전 운동 속도가 빨라지고 또 멀리 떨어질수록 속도가 느려진다.

     

    그렇다면 떨어져 있어도 작용하는 자기력 같은 힘이 태양과 행성 사이에서 작용하는 것은 아닐까?

    케플러는 행성 운동의 근본 원인이 자기력의 작용과 유사한 성격의 것이라고 제안했다.

    그는 놀랍게도 중력 또는 만유인력의 개념을 예견했던 것이다.

     

     

    행성의 주기를 제곱한 것은 행성과 태양 사이의 평균 거리를 세제곱한 것에 비례한다. 즉 멀리 떨어져 있는 행성일수록 더 천천히 움직이되, 그 관계가 수학 공식(p^2=a^3)을 정확하게 따른다.

    케플러의 제3법칙

     

    요하네스 케플러가 자신의 일생을 바쳐 추구한 목표는, 행성의 움직임을 이해하고 천상 세계의 조화를 밝히는 것이었다.

    이러한 목표는 그가 죽고 36년이 지난 후에 결국 결실을 맺게 된다.

     

    뉴턴은 관성의 법칙을 발견했다.

    움직이는 물체가 어떤 다른 것의 영향을 받아 가던 길을 벗어나지 않는 한 계속 그 방향을 따라 직선으로 움직이려고 하는 성질을 관성이라 한다.

     

    뉴턴이 보기에, 만약 어떤 힘이 달을 지구 쪽으로 잡아당겨 지속적으로 운동 방향을 바꾸지 않는 한 달도 직선으로, 그러니까 달이 도는 궤도의 접선 방향으로 날아가 버릴 듯 싶었다.

     

    그러나 어떤 힘이 달을 계속해서 지구 쪽으로 끌어당기기 때문에 달은 거의 원에 가까운 궤도를 따라 운동을 한다.

    뉴턴은 이 힘을 중력이라고 불렀고, 거리를 두고도 작용하는 힘, 즉 원격 작용이 가능한 힘이라고 생각했다.

     

    지구와 달은 직접 물리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지구는 달을 항상 우리 쪽으로 잡아 당긴다.

     

    뉴턴은 케플러의 세 번째 법칙을 이용해 인력의 세기를 수학적으로 추정했다.

    지구가 사과를 잡아당겨 떨어뜨리는 바로 그 힘이 달이 원 궤도를 따라 운동하도록 지구가 달을 잡아당기는 힘이었다.

    뿐만 아니라 뉴턴은 그 당시 발견된 목성의 달들이 목성의 주위를 궤도 운동하도록 만드는 힘도 바로 목성의 중력임을 밝혔다.

     

     

    바이킹 계획의 미생물학 실험

    바이킹 계획의 미생물학 실험 세 가지가 서로 각기 다른 내용의 질문을 던지고 있지만 세 실험 모두 신진대사와 관련됐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바이킹 우주선을 우주에 진수하기 전에 생각했던 판단 기준들에 따를 것 같으면 긍정적인 결과가 나온 듯했다.

    첫 번째 실험에서 화성 토양을 지구에서 가져간 무균 용액과 혼합시켰더니 토양에 있던 무엇인가가 그 용액을 화학적으로 분해했다.

    마치 화성 토양의 미생물이 지구의 용액을 흡수하여 신진대사 과정에서 어떤 가스를 배출하는 듯했다는 이야기이다.

     

    두 번째 실험에서는 지구에서 가져간 여러 종류의 기체를 화성의 토양 표본과 섞었더니 그 기체들이 화성의 토양과 화학적으로 결합한 듯했다.

    마치 광합성을 하는 미생물이 화성 토양에 존재하는 것처럼 말이다.

     

    대기 중에 있는 기체 성분에서 유기 물질을 합성하는 미생물들이 화성 토양에도 살고 있는 듯했다는 것이다.

    화성 미생물학 실험에서 모두 일곱 개의 서로 다른 표본에서 생명 존재에 관한 긍정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었는데, 이 시료들은 5,000킬로미터나 멀리 떨어진 두 지점에서 채취된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 상황은 이것보다 복잡하다. 실험 결과를 가지고 생물의 유무를 결정할 수 있는 판단 기준이 좀 불충분했다고 생각된다.

    우리가 현재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화성의 미생물학적 존재를 받아들여야 할 확실한 증거는 없다'라는 것이다.

     

     

    크리스티안 하위헌스의 공헌

    이탈리아에서는 갈릴레오가 또 다른 세상의 발견을 공표하고, 조르다노 브루노는 우주에 우리와 다른 형태의 생물들이 존재하리라는 주장을 펴고 있었다.

     

    물론 그들은 이러한 발표와 주장으로 철저하게 비판받는 처지에 놓이게 됐다.

    하지만 이와는 대조적으로 네덜란드에서는 크리스티안 하위헌스가 위 두사람의 의견을 모두 지지하면서도 온갖 찬사를 다 받으면 살고 있었다.

     

    당대의 모티브는 빛이었다.

    스넬의 굴절 현상 연구, 레벤후크의 현미경 발명 그리고 하위헌스의 빛의 파동설 등 당시 과학 연구의 중심 주제가 모두 빛과 연관된 것들이었다.

     

    하위헌스는 초기의 현미경들을 설계하는 데 적지 않은 기여를 했으며, 그 자신도 현미경으로 새로운 발견을 많이 했다.

    사람의 정자를 처음 본 소수의 사람들 중에 레벤후크와 하위헌스가 들어 있을 것이다.

    정액 세포의 발견이 사람의 생식 작용을 이해하는 단초가 되었다.

     

    하위헌스는 충분히 끓여서 완전 소독한 물에서도 미생물이 서서히 증식하는 현상을 관찰하고, 미생물들은 충분히 작아서 공기 중에 떠다닐 수 있으며 떠다니다가 물에 내려 앉아 번식한다고 설명함으로써, 생명의 자연 발생설에 하나의 대안을 제시할 수 있었다.

     

    그는 에라토스테네스의 발자취를 따라서 지구 외의 다른 행성의 크기를 측정한 첫 번째 인물이며 금성이 구름으로 완전히 뒤덮여 있다는 사실을 맨 처음으로 추측해 본 천문학자였다.

     

    그리고 화성의 표면 특징을 지도로 그려 남겼을 뿐 아니라, 그러한 표면 특징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현상을 관찰하여 화성의 자전 주기가 지구와 비슷하게 24시간 정도라는 것까지 측정했다.

     

    토성이 여러 겹의 고리로 둘러싸여 있고 특히 그 고리가 토성 표면과 접촉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처음 확인한 것도 하위헌스였다.

    타이탄도 그가 발견했다.

    타이탄은 토성의 위성 중에서 가장 큰 위성이자 태양계에서도 둘째로 큰 것이다.

     

    하위헌스는, 일찍이 갈릴레오가 제시한, 전자의 주기가 일정하다는 원리를 이용하여 추시계를 발명했고 그것을 경도 측정에 이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위헌스는 균형을 잡아 주는 나선 모양의 용수철을 발명했으며, 이 용수철은 오늘날까지도 일부 시계에 이용되고 있다.

    그는 역학의 발전에도 큰 공헌을 했다.

     

    예를 들어 원심력은 그가 계산해 낸 것이다.

    그는 또 주사위 놀이를 연구하여 확률론에도 공헌했다.

     

    하위헌스는 공기 펌프를 개량하여 나중에 채광 산업의 혁명을 불러왔다. 그가 발명한 '요술 등'은 오늘날 슬라이드 영사기의 원조이다.

    그는 '화약 엔진'이라 할 수 있는 것을 개발하여 증기 기관 발달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태양계에서 가장 강력한 자기장과 복사 벨트를 생성하는 목성

    목성의 구름 저 깊은 밑바닥에서 느끼게 되는 대기의 무게, 즉 기압은 지구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엄청난 것이다.

    수소 원자들은 그렇게 높은 압력을 받으면 서로 짓눌려서 핵에 속박되어 있던 전자들이 핵에서 떨어져 나가 금속성의 액체 수소로 변한다.

     

    구체적으로 목성 내부의 압력은 지구 표면 대기압의 300만배나 된다.

    이런 조건에서 예상되는 수소의 유일한 존재 양식이 액체 수소이다.

     

    목성의 내부는 금속성의 액체 수소가 바다를 이루고 있을 것이다.

    지구에서는 이 정도의 압력이 실현될 수 없기 때문에 지상 실험실에서 금속성의 액체 수소를 관측할 기회가 없다.

     

    목성은 태양계에서 가장 강력한 자기장을 발생시키는데, 이것은 목성 내부의 금속성 액체에 흐르고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전류 때문일 것이다.

    이 전류는 자기장뿐 아니라 전자와 양성자로 구성된 목성 주변의 복사 벨트를 생성하기도 한다.

     

    전파천문학이 발달하기 시작한 1950년대에 목성이 강력한 전파방출원이라는 사실이 우연히 알려지게 됐다.

    미국의 젊은 두 과학자, 버나드 버크와 케네스 프랭클린은 당시로서는 감도가 대단히 좋은 최신형 전파 망원경을 사용하여 우주 배경 복사를 검출할 목적으로 전파를 관측하고 있었다.

     

    그때 놀라울 정도로 강력한 전파 신호가 우연히 잡혔다.

    그 전파 신호의 특성은 그때까지 학계에 보고된 어떤 전파원과도 부합하지 않았으며, 이 전파원이 천구상에서 멀리 있는 배경 천체들보다 더 빠르게 이동한다는 점이었다.

     

    하루는 하늘에 뭐 재미있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가 알아보기 위하여 관측실 밖으로 나와서 육안으로 하늘을 쳐다보다가 어안이 벙벙해졌다.

     

    문제의 전파원이 있다고 생각되는 방향으로 유난히 밝은 천체가 하나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바로 목성이었다.

     

     

    태양계에서 가장 거대한 위성을 거느리고 있는 토성

    토성은 목성보다 약간 작다는 점만 제외하면 물질 조성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측면에서 목성과 매우 비슷하다.

    대략 10시간에 한 번씩 자전하는 토성은 다양한 색깔의 고리로 자신의 적도 부분을 아름답게 치장하고 있다.

     

    토성의 자기장과 복사 벨트는 목성에 비하여 매우 미약한 수준이다.

    하지만 행성 고리만 본다면 토성은 목성에 비해 훨씬 더 훌륭한 장관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그리고 토성도 열두어 개 이상의 위성을 거느리고 있다.

    토성의 위성들 중에서 우리의 가장 큰 관심을 끄는 것은 타이탄이다.

     

    타이탄은 태양계 안에 있는 위성 중에서 가장 거대한 존재로, 있으나마나 한 대기가 아니라 상당 수준의 대기를 실제로 보유한 유일한 위성이다.

     

     

    코스모스

    고대 그리스 인들은 태초에 '형태가 없는' 혼돈이 있었다고 믿었는데 그 내용은 <창세기>의 구절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혼돈의 신 카오스가 먼저 밤의 여신을 만든 다음 짝짓기를 했다.

    거기에서 태어난 자손들이 결국은 모든 신과 인간이 됐다.

     

    혼돈으로부터 이렇게 우주가 탄생했다는 생각은 그리스 인들의 자연관과 잘 맞는 것이었다.

    변덕스러운 신들이 다스리는 예측 불허의 세상이 자연이라는 그들의 자연관과 상통했다.

     

    하지만 기원전 6세기에 이오니아에서 새로운 사조가 태동했다.

    그것은 인류 사상에서 가장 위대한 생각들 중의 하나이다.

     

    고대 이오니아 인들은 우주에 내재된 질서가 있으므로 우주도 이해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자연 현상에서 볼 수 있는 모종의 규칙성을 통해 자연의 비밀을 밝혀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연은 완전히 예측 불가능한 것이 아니며, 자연에게도 반드시 따라야 할 규칙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우주의 이렇게 훌륭하게 정돈된 질서를 '코스모스'라고 불렀다.

     

     

    탈레스, 에우클레이데스, 뉴턴의 연속성

    이오니아의 첫 번째 과학자는 밀레투스의 탈레스였다.

    밀레투스는 좁은 해협을 두고 사모스 섬 건너편에 있는 아시아의 한 도시이다.

     

    그는 이집트를 두루 여행했고 바빌로니아의 지식에도 정통했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일식을 예측할 수 있었다고 한다.

     

    탈레스는 피라미드 그림자의 길이와 수평선 위에 떠오른 태양의 고도를 이용하여 피라미드의 높이를 쟀다.

    오늘날에도 달 표면에 있는 산들의 높이를 잴 때 똑같은 방법을 쓴다.

     

    3세기 후 에우클레이데스가 정리의 형식으로 기술한 기하학의 여러 성질들을 탈레스가 이미 증명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니까 탈레스는 에우클레이데스의 기하학을 에우클레이데스보다 먼저 증명한 인물로 통한다.

     

    예를 들어 이등변삼각형의 두 밑각이 같다는 정리들 말이다.

    따지고 보면 탈레스는 에우클레이데스로 연결되고, 에우클레이데스는 아이작 뉴턴으로 이어진다.

    왜냐하면 뉴턴이 1663년 스투어브리지 박람회에서 구입한 책 중에 에우클레이데스의 <기하학 원론>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실험의 중요성을 인식했던 아낙시만드로스

    탈레스의 친구이자 동료인 밀레투스의 아낙시만드로스는 연구에서 실험의 중요성을 인식했던 최초의 인물이었다.

    아낙시만드로스는 수직으로 세워 놓은 막대의 그리자가 이동하는 것을 관찰하여 1년의 길이를 정확하게 측정했고 계절의 시작과 끝도 제대로 알아냈다.

     

    오랜 세월 상대방을 때리고 찌르는 무기로만 사용돼 온 막대기가 아낙시만드로스 덕분에 처음으로 훌륭한 시간 측정 도구로 활용된 셈이다.

     

    그는 그리스에서 최초로 해시계를 만든 사람이었고 당시까지 알려진 세상을 지도로 표현하고 별자리의 모양을 나타내는 천구도를 만든 최초의 인물이기도 했다.

     

    훨씬 오래전부터 내려오던 생각이었겠지만, 그는 해, 달, 별이 천구 위에서 움직이는 구멍을 통해 보이는 불이라고 믿었다.

    그는 지구가 하늘에 매여 있거나 지지받고 않고, 대신 우주의 중심에 고정되어 있다는 주장을 폈다.

    왜냐하면 지구가 '천구'위의 모든 지점에서 등거리에 있으므로 지구를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공기에 대한 실험을 했던 엠페도클레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오니아적인 과학적 사고방식은 실험의 기법들과 함께 그리스의 전역을 거쳐,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에까지 퍼져 나갔다.

     

    아무도 공기의 존재를 믿지 않던 시기가 있었다.

    당시 사람들도 사람이 호흡을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바람이 신의 숨소리라고 생각했지, 공기가 눈에 보이지 않는 정적인 물질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공기에 대한 실험을 최초로 했다고 기록에 나오는 인물은 기원전 450년경에 활약했던 엠페도클레스라는 이름의 의사이다.

    그가 자신을 신이라고 주장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이것은 그가 지나치게 영리했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이 그를 신으로 여겼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엠페도클레스는 빛이 매우 빠른 속도로 이동하지만 그렇다고 무한히 빠른 것은 아니라고 믿었다.

    그리고 예전에 지구상에는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종류의 생물들이 살았다고 가르쳤다.

     

     

    더 작은 조각으로 쪼갤 수 없는 입자 '원자'

    데모크리토스가 만들어 낸 '원자'라는 단어는, 그리스 어로 '자를 수 없다'라는 뜻이다.

    '원자는 궁극의 입자로서, 원자를 더 작은 조각으로 쪼개려는 시도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라는 뜻이 이 한 단어에 담겨 있다.

     

    그는 물체는 복잡하게 얽힌 원자의 집합이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우리 자신도 그렇다는 것이다.

    데모크리토스는 "원자와 빈 공간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다"라고까지 주장했다.

     

    그의 논지에 따르면 칼로 사과를 자를 때 칼날은 원자들 사이의 빈 공간을 통과한다.

    사과에 칼날이 통과할 빈 공간이 없다면 칼은 더 쪼개질 수 없는 원자를 만나게 되므로 결국 사과는 갈라질 수 없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원뿔 같은 것을 잘라서 만든 두 단명을 비교해 보자.

    노출된 넓이가 같은가? 데모크리토스는 아니라고 말했다.

     

    원뿔의 경사 때문에 한쪽 단면이 다른 단면보다 살짝 더 작아지기 때문이다.

    만일 두 넓이가 같다면, 원뿔이 아니라 원기둥일 것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날카로운 칼로 완벽한 의미의 원기둥을 자른다고 해도, 잘린 두 조각의 단면은 서로 같을 수가 없다고 그는 주장했다.

    왜?

     

    매우 작은 원자적 규모에서 보면 물질은 어쩔 수 없이 울퉁불퉁한 구조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미세한 규모의 울퉁불퉁함을 데모크리토스는 원자의 세계로 인정했다.

     

    그가 전개한 원자론이 오늘날 우리가 받아들이는 원자의 개념에 딱 들어맞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논지는 창의성이 풍부하고 하나같이 정연한 논리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일상의 경험에서 우러난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논지를 통해서 그가 도출한 결론은 근본적으로 모두 옳았다.

     

     

    태양, 달, 하늘을 탐구했던 아낙사고라스

    아낙사고라스는 기원전 450년경 아테네에서 활약했던 이오니아 출신의 실험가였다.

    그는 부자였지만 재화에 관심이 없었다.

     

    그의 삶은 과학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했다.

    인생의 목적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는 "태양, 달, 하늘에 관한 탐구"라고 답했다.

     

    그것은 정말 천문학자들에게 어울리는 대답이었다.

    그는 아주 재치 있는 실험도 많이 했다.

     

    예를 들어 그는 크림같이 하얀 액체 한 방울을 주전자에 떨어뜨려 주전자에 가득 들어 있는 포도주와 같이 어두운 색깔의 액체를 눈에 띌 정도로 희게 만들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 준 다음, 비록 감각으로 직접 감지할 수 없을 정도의 미소한 변화라고 하더라도 잘 설계된 실험을 통하면 그 변화를 알아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아낙사고라스는 데모크리토스만큼 과격하지는 않았지만 철저한 물질주의자라는 점에서 그와 궤를 같이 했다.

    소유물을 중히 여긴다는 뜻에서가 아니라, 물질이 세계를 지탱하는 근본이라는 뜻에서 그들은 물질주의자(유물론자)였다.

     

    아낙사고라스는 모종의 정신적 요소는 믿었지만 원자의 존재는 믿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인간이 손 때문에 다른 동물보다 더 현명하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기계 조직이나 제조를 중시했던 이오니아 인들에게 썩 잘 어울리는 발상이었다.

    그는 달이 밝게 보이는 것이 반사된 빛 때문이라고 확실하게 이야기한 최초의 인물로서 달이 차고 기우는 위상 변화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었다.

     

    당시 사회에서 이러한 생각을 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므로, 그가 기술한 이론의 복사본이 비밀리에 유포됐다고 한다.

    아테네의 지하 출판물이었던 셈이다.

     

    지구, 달 그리고 스스로 빛을 내는 태양, 이 셋이 이루는 상대 배치에 따라서 달의 위상이 변하고 월식 현상이 일어난다는 설명은 당시의 상식과는 전혀 부합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그리고 두 세대 후 아리스토텔레스의 "위상 변화와 월식은 달의 내재적 특성이다."라고 설명한 것이 고작이었다.

    이것이야말로 말장난에 불과한 설명 아닌 설명이었다.

     

     

    불경죄로 투옥된 아낙사고라스

    아낙사고라스를 아테네로 데려온 장본인은 페리클레스였다.

    당시는 아테네의 전성기였다.

     

    하지만 페리클레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일으킨 주인공이기도 했다.

    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아테네의 민주주의가 붕괴하기 시작했다.

     

    철학과 과학을 좋아하던 페리클레스는 아낙사고라스와 절친한 사이였다.

    이러한 면에서 아낙사고라스가 아테네의 융성에 크게 이바지했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페리클레스는 정치적으로 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었다.

    그의 정적들은 페리클레스의 세력이 워낙 강대했기 때문에 그를 정면으로 공격하지 못하고 대신 그의 측근을 노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낙사고라스가 불경죄로 투옥되었다.

    달도 보통 물질로 만들어진 하나의 장소에 불과하며 태양도 하늘에 떠 있는 불타는 돌덩이일 뿐이라는 그의 주장이 문제의 발단이었다.

    이러한 연유에서 그에게 불신앙의 죄목이 씌워졌다.

     

    존 월킨스 주교가 1638년에 쓴 글을 보면 그가 당시의 아테네 인들을 어떻게 평했는지 알 수 있다.

    "그 열광적인 우상 숭배자들은 자신들이 신으로 모시는 태양이 돌이라는 주장에 모욕감을 느끼면서도, 정작 우상인 돌을 신으로 모시는 자신들의 어리석음은 깨닫지 못했다."

     

    페리클레스는 아낙사고라스의 석방을 위해 노력했고 성공을 거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그때는 그리스 사회의 전반적 분위기가 변화의 큰 물결에 휩쓸려, 이오니아의 전통이 급격히 쇠퇴하는 중이었다.

    이오니아의 위대했던 전통은 그나마 200년쯤 뒤에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다시 꽃을 피우게 된다.

     

     

    무리수를 거부한 피타고라스학파

    피타고라스학파는 정수를 특별히 좋아했다.

    그들은 다른 수들은 물론이고, 만물의 근원도 모두 정수라고 보았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과 관련해 아주 곤란한 문제가 하나 발생했다.

    정사각형의 한 변에 대한 대각선의 길이의 비를 나타내는 2의 제곱근이 무리수로 판명됐던 것이다.

     

    아무리 큰 정수를 쓰더라도 2의 제곱근은 두 정수의 비로는 정확하게 표시할 수 없는 숫자다.

    이것도 운명의 장난인지, 2의 제곱근이 무리수라는 사실은 다름 아닌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통해서 밝혀졌다.

     

    원래 '무리수'는 두 정수의 비로 표현될 수 없는 숫자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피타고라스학파는 무리수를 모종의 위협적인 요소로 받아들였는데, 이것은 무리수의 존재가 그들 세계관의 불합리성과 오류를 암시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오늘날 'irrational'이라는 단어가 '불합리'라는 두 번째 뜻을 갖게 된 연유이다.

    피타고라스학파는 이렇게 중요한 수학적 발견들을 외부와 공유하지 않았고, 2의 제곱근과 정십이면체에 관한 사실의 공표를 거부했다.

     

    그들의 관점에서 이러한 발견은 외부 세계가 알아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오늘날에도 과학 대중화에 반대하는 과학자들을 종종 만나게 된다.

    그들은 과학의 신성한 지식은 소수 집단의 전유물이며, 대중이 함부로 손대어 훼손시키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고집한다.

     

     

    고대 과학과 천문학의 쇠퇴

    과학사를 연구하는 벤저민 패링턴은 고대 과학의 쇠퇴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이오니아의 중상주의적 전통은 과학의 발전을 가져온 원동력이었지만 동시에 노예 경제의 발전도 동반했다.

     

    노예 소유가 부와 권력으로 이르는 길이었다.

    폴레크라테스의 요새도 노예들이 쌓아 올렸으며 페리클레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이 활약하던 시기에 아테네 시에는 엄청난 규모의 노예 인구가 상주하고 있었다.

     

    아테네 인들의 민주주에 관한 온갖 대범한 생각들은 소수의 특권층에게만 해당됐지, 구성원 전부를 대상으로 한 것은 아니었다.

    노예의 정체성은 손을 사용하는 그들의 육체 노동에 있었다.

     

    육체 노동은 바로 노예임을 뜻했다.

    한편 과학 실험도 육체 노동이었다.

     

    노예 소유자들은 당연히 육체 노동과 거리를 뒀다.

    그러니 과연 누가 과학을 했겠는가?

    비슷한 경향을 우리는 세계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중국 고유의 천문학은 1280년경에 절정에 이르렀다. 이 시기에 와서 곽수경이 이미 1,500년의 장구한 세월에 걸쳐 축적된 관측 자료들을 기반으로 하여 각종 천문 관련 물리량들을 정확하게 측정했으며, 천문 관측 기기와 천문 계산에 필요한 수학적 기법들을 크게 향상시켰다.

     

    그러나 중국의 천문학은 그 후에 급속한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왜 그랬을까?

     

    네이선 시빈은 쇠락의 원인을 엘리트 계층의 경직된 사고에 돌리고 있다.

    "점증하는 사고의 경직성은 지식인들의 기술에 대한 호기심을 반감시켰으며, 사대부 계급으로 하여금 과학이 자기네들이 추구할 분야가 못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돈다고 주장한 아리스타르코스

    지구가 하나의 행성이며 지구인은 우주 시민이라는 생각은 피타고라스 이후 3세기가 지난 뒤 사모스 섬에서 태어난 아리스타르코스에서 시작한다.

     

    그는 이오니아의 마지막 과학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시기에 와서 지적 깨달음의 중심지가 위대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으로 이미 이동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리스타르코스는 태양이 행성계의 중심이고 모든 행성은 지구가 아니라 태양의 주위를 돈다고 주장한 첫 번째 인물이었다.

    늘 그렇듯이 이 주제에 관한 그의 저술은 소실되었다.

     

    그는 월식 중에 달의 표면에 드리워지는 지구의 그림자를 보고 태양은 지구보다 훨씬 크며 매우 멀리 떨어져 있다고 옳게 추론했다.

    그 다음에 따라올 결론은 뻔하다.

     

    그는 태양처럼 큰 물체가 지구처럼 작은 물체의 주위를 회전한다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추론했다. 그는 지구 궤도 중심에 태양을 놓았다.

    그리고 지구가 자신의 축을 중심으로 하루에 한 번씩 자전하는 동시에 태양을 1년에 한 번씩 공전한다고 가정했다.

     

     

    태양계를 우주의 구석으로 밀어낸 구상 성단

    구상 성단이란 구형으로 분포한 별들의 무리로서 벌 떼를 연상케 하는 아주 매혹적인 천체이다.

    섀플리는 먼저 기준이 될 특별한 종류의 변광성을 구상 성단에서 찾아냈다.

     

    그 별들의 밝기가 주기적으로 변하지만 그 밝기의 평균 값은 일정하다.

    그런데 이러한 별들의 원래 평균 밝기가 변광 주기와 긴밀한 관계에 있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었다.

     

    즉 밝기가 변하는 데 걸리는 주기를 관측을 통해서 알아내면, 그 별의 원래 밝기를 알 수 있다는 말이다.

    구상 성단에서 특정한 패턴으로 밝기가 변화하는 별을 찾아내고 그 변광 주기에서 그 별의 원래 밝기를 추정한 다음 겉보기 밝기와 비교함으로써 우리는 그 별까지의, 즉 구상 성단까지의 거리를 계산해 낼 수 있는 것이다.

     

    원래 밝기를 알고 있는 가로등의 희미한 정도로부터 나와 그 가로등 사이의 거리를 가능할수 있다.

    같은 이치에서 별까지의 거리도 측정할 수 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하위헌스가 사용했던 거리 측정의 방법이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모두 100여 개에 이르는 구상 성단들의 거리를 알아낸 다음에, 섀플리는 이들의 3차원적 분포를 조사했다.

    그랬더니 구상 성단들이 태양계 근방이 아니라, 은하수 은하의 궁수자리 방향으로 멀리 떨어진 곳을 중심으로 하여, 대칭적인 분포를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우리 은하의 중심은 태양계가 아니라 태양계에서 궁수자리 방향으로 멀리 떨어진 구역에 있다는 결론을 피할 수 없다.

    100여 개에 이르는 구상 성단들이 바로 우리 은하수 은하의 한가운데에 몰려 있는 막대한 질량 중심점을 궤도 운동의 중심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구상 성단들이 은하수 은하 안에서 하는 운동은 마치 그 중심 구역에 경의를 표하는 모습 같다.

     

     

    우주의 구조물을 지탱하는 전기력

    1910년을 전후해서 45년 동안 영국의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수행된 연구의 결과로, 원자의 정체가 인류사상 처음으로 밝혀졌다.

    실제 사용된 방법은 이렇다.

     

    하나의 원자를 향해 다른 원자들을 쏘아 충돌시켰을 때 '총알 원자'들이 어떻게 튕겨 나가는가를 조사하여, 표적 원자의 내부 구조를 미루어 알아내는 것이었다.

     

    대개 원자의 외곽부는 전자의 구름으로 둘러싸여 있다.

    전자는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전하는 띠는데, 우리는 전자의 전하를 음전하로 부르기로 약속했다.

     

    이 전자가 원자의 화학적 성질을 결정한다.

    예를 들면 황금의 번쩍이는 광채, 철의 차가운 느낌, 탄소로 이루어진 금강석의 단단한 결정 구조 등을 전자들이 좌우한다.

     

    원자의 저 깊숙한 내부, 전자구름 속 깊숙한 곳에는 핵이 숨어 있다.

    핵은 양전하를 띠는 양성자들과 전기적으로 중성인 중성자들로 구성된다.

     

    원자는 매우 작다.

    원자 1억 개를 일렬로 늘어놓아 봤자,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가 겨우 새끼 손톱 끝만 하다.

     

    원자의 핵은 원자 전체의 경우 10만 분의 1 정도이다.

    원자핵이 발견되기 어려웠던 이유가 이렇게 작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자의 질량은 거의 전적으로 이 조그마한 핵에 모여있다.

    전자는 그저 떠돌아다니기만 하는 솜털이라고나 할까?

     

    그러니까 원자는 속이 텅 빈 엉성하기 이를 데 없는 녀석이다.

    이렇게 따지고 보니 물질이란 것도 실은 속이 텅 빈 쭉정이였던 셈이다.

     

    우리 인간도 원자로 만들어져 있다.

    책상 위에 올려놓은 나의 팔꿈치도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

     

    물론 책상도 원자로 되어 있다.

    원자가 그렇게 작은 존재이고 게다가 속까지 그렇게 엉성하게 비어 있으며, 원자핵은 원자보다 더더욱 작기만 한데, 내 책상은 나의 무거운 몸을 도대체 어떻게 지탱할 수 있는 것일까?

     

    이런 의문은 독자만 품어 본 게 아니다.

    저 위대한 아서 에딩턴 교수도 똑같은 질문을 자신에 던졌다.

     

    내 팔꿈치를 구성하는 원자핵들이 어째서 책상의 원자핵들 사이로 스르르 미끄러져 들어가지 않는단 말인가?

    책상이나 걸상을 만든 목재가 이렇게 텅 비어 있다면, 어쩐 연유에서 나는 마루로 그냥 내려앉지 않는가?

     

    아니 지구의 저 속으로 그냥 떨어져 들어가지 않는 까닭은 무엇이란 말인가?

    에딩턴의 질문은 전자의 구조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한다.

     

    내 팔꿈치에 있는 원자의 외곽부는 음전하를 띠고 있다.

    책상을 구성하는 원자도 이 점에서 마찬가지다.

     

    음전하들은 서로를 밀친다.

    내팔꿈치가 책상을 스르르 미끄러져 들어가지 않는 까닭은 음전하들 사이에 생기는 강력한 척력 때문이다.

     

    전하들의 척력 덕분에 우리는 일생생활을 무리 없이 꾸려 갈 수 있다.

    우리의 일상이 원자의 미시적 구조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전하만 사라져 버리면 모든 것이 눈에 보이지도 않을 먼지 부스러기가 된다.

    전기력이 작용하지 않는다면 우주의 그 어떤 구조물도 그대로 남아 있을 수가 없다.

     

     

    원자와 쿼크

    물리학자들은 양성자와 중성자 같은 소립자들을 구성하는 더 근본적인 알갱이를 쿼크라고 부른다.

    쿼크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핵보다 작은 세상의 모습을 일상의 언어로 기술하기 위해 사람들은 쿼크에 '냄새'와 '색깔'을 입혔다.

    쿼크야말로 궁극의 기본 입자인지, 아니면 쿼크도 더 근본적인 입자들로 구성돼 있는지는 아직 모른다.

     

    물질의 정체를 이해하려면 우리는 언제까지 물질을 둘로 쪼개야 하는 걸까?

    우리는 과연 가장 근본이 되는 입자들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을까?

     

    양성자, 중성자, 전자의 구성비에 따라서 원자의 종류가 결정되고, 그 원자들이 적당히 모여서 분자들을 생성하고, 이 분자들이 조합을 이뤄 지구성의 모든 물질을 만든다.

     

    그러므로 현대 물리학과 현대 화학은 매우 복잡한 이 세상을 단 세 가지 소립자로 환원시켜 놓은 셈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중성자는 전하를 띠지 않는다.

     

    양성자와 전자는 똑같은 크기의 양전하와 음전하를 갖는다.

    부호가 다른 전하들 사이에 작용하는 인력이 원자를 원자로 남아 있게 하는 요인이다.

     

    원자는 전체적으로 중성이므로 핵에 있는 양성자의 개수와 전자구름을 이루는 전자의 개수가 정확하게 일치한다.

    한 원자의 화학적 성질은 전자의 개수에 따라 좌우되는데, 원자 번호가 바로 양성자나 전자의 개수이므로 원자 번호에는 그 원자의 화학적 특성을 쉽게 점칠 수 있다.

     

    전자와 양성자를 하나씩 갖고 있으면 수소, 둘씩이면 헬륨, 셋씩이면 리튬, 넷씩이면 베릴륨, 다섯씩이면 보론, 여섯씩이면 탄소, 일곱씩이면 질소, 여덟씩이면 산소, 이런 식으로 계속된다.

     

    원자 번호 92의 우라늄은 양성자와 전자를 각각 아흔두 개씩 갖는다. 부호가 같은 전하들 사이에는 척력이 작용한다.

    그들이 만드는 세상은 은둔자나 염세가로 가득한 곳일 것이다.

     

    아무튼 전자는 전자를 밀치고, 양성자는 양성자를 배척한다.

    그렇다면 의문이 생긴다.

     

    원자핵에 전하를 띤 입자라고는 양성자뿐인데, 핵이 와해되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핵에는 또 다른 종류의 힘, 즉 핵력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핵력의 정체는 중력도 전자기력도 아니다.

    핵력은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만 작용하는 갈고리에 비유될 수있다.

     

     

    블랙홀

    영국의 천문학자 존 미셸이 1783년에 최초로 블랙홀에 대한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의 아이디어는 워낙 기상천외한 것이라, 최근까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러나 블랙홀이 존재한다는 관측적 증거들이 최근에 하나둘씩 나타나면서 천문학자를 포함한 모든 이들이 깜짝 놀라기 시작했다.

    중력이 아주 강력하면 빛조차 그 중력장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렇게나 강한 중력장을 동반하는 천체를 우리는 블랙홀이라고 부른다.

    이것이야말로 주위 상황에 아랑곳 않는 불가해한 우주적 체셔 고양이인 것이다.

     

    밀도가 충분히 높고 중력이 한계값 이상으로 강해지면 블랙홀은 윙크 한 번 하고 우주에서 사라진다.

    하지만 빛이 블랙홀 안에 갇혀 있으므로 블랙홀의 내부는 휘황하게 밝을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비유를 밀고 나가면, '블랙홀은 공간에 패인 바닥 없는 보조개'라고 주장할 수 있다.

    당신이 그 보조개에 빠지면 어떻게 될까 생각해보자.

     

    밖에서 봤을 때 당산이 다 빠져 들어가는 데 무한대의 시간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이렇게 강력한 중력장에서는 기계적, 생물학적 시계가 완전히 멈춘 것으로 감지되기 때문이다.

     

    한편 빠져 들어가고 있는 당신의 세계에서는 모든 시계가 정상적으로 작동한다.

    중력에 따른 막강한 조석력과 강력한 복사를 당신이 '신의 특별 배려로' 어떻게든 견뎌 낼 수만 있다면, 그리고 당신이 빠져 들어가고 있는 검은 구멍이 자전하는 블랙홀이라면, 당신은 시공간의 또 다른 점으로 출현할 것이다.

     

    공간과 시간적으로 모처와 모시에 다시 나타난다는 말이다.

    벌레가 사과에 침입하여 과육을 갉아먹고 나방이 돼서 빠져나가면 사과에 벌레의 입구와 출구를 연결하는 터널이 뚫린다.

     

    벌레 구멍, 즉 웜홀은 사과에 뚫려 있는 입구와 출구에 해당한다.

    존재를 증명할 수 없지만, 학자들은 벌레 구멍의 가능성을 진지하게 다룬다.

     

    성간 공간이나 은하 간 공간에 중력이 파 놓은 벌레 구멍들이 있다면 그 구멍들을 연결하는 '우주 지하철'을 타고 통상적인 방법으로는 접근이 불가능한 우주의 구석구석을 보통 방법으로는 구현될 수 없는 쾌속으로 여행할 수는 없을까?

     

     

    적색 이동 현상을 발견한 허블과 휴메이슨

    20세기 초 당시로서는 최대 구경의 반사 망원경이 윌슨 산 정상에 건설되었다.

    이 망원경이 바로 먼 은하들의 적색 이동 현상을 발견하게 해 주었지만, 당시에 이것을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천문대 건설 당시 망원경의 거대한 부품들을 산 정상으로 옮기는 데에는 노새들이 동원되었다.

    노새 몰이꾼인 밀턴 휴메이슨은 초등학교 8학년까지 다닌 것이 고작이었지만 머리가 총명하고 호기심이 많아서 각종 기계들에 관하여 주위 사람들에게 이것저것을 열심히 묻고는 했다.

     

    어느 날 야간 관측 보조원이 병이 나서 눕게 되자, 천문대 쪽에서는 밀턴에게 보조원 일을 대신 해 줄 수 있겠느냐는 제안을 하게 된다.

     

    그날 밤 그는 망원경을 능숙하게 다룰 줄 아는 기술과 성의를 충분히 과시할 수 있었고 이것을 계기로 윌슨 산 천문대는 망원경을 조작하고 관측자를 보조하는 직원으로 밀턴 휴메이슨을 정식 채용한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영국 유학을 마친 에드윈 허블이 윌슨 산에 나타났다.

    그는 두뇌 회전이 빠르고, 천문학계 바깥에 발이 넓고, 세련된 매너를 갖춘 미남이었다.

    또 옥스퍼드에서 단 1년간 로즈 장학생으로 지내는 동안 익힌 영국식 억양을 자랑스레 구사하는 인물이었다.

     

    나선 모양의 성운들이 "섬 우주"라는 확실한 증거를 제시한 인물이 바로 허블이다.

    섬 우주는 우리 은하와 같이 수많은 별들이 한데 모여 있는 것인데, 허블은 어떤 부류의 별들의 절대 광도가 일정하다는 사실을 이용하여 이 먼 은하들의 거리를 측정했다.

     

    거리 측정에 쓰이는 이런 부류의 천체들을 우리는 "표준 초"라고 부른다.

    한 망원경에 붙어서 오순도순 일할 단짝 치고는 좀 이상했을지 모르지만 허블과 휴메이슨은 만나자마자 서로 장단이 잘 맞았다.

     

    그들은 로웰 천문대 슬리퍼를 따라서 먼 은하들의 분광 사진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같이 일을 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양질의 은하 스펙트럼을 얻는 데 있어 휴메이슨은 전 세계 그 어느 천문학자보다 유능한 인물임이 밝혀졌다.

     

    휴메이슨과 허블은 자신들도 깜짝 놀랄 발견을 했다.

    먼 은하들의 스펙트럼이 모두 적색 이동을 보이며, 더욱 놀라운 것은 적색 이동의 정도가 은하까지의 거리에 비례하여 증가한다는 사실이었다.

     

    적색 이동을 가장 쉽게 해석할 수 있는 방편은 이것이 도플러 효과의 결과라고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은하들이 모두 우리에게서 멀어진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리고 멀리 있는 은하일수록 더 빠른 속력으로 후퇴한다는 추론도 사실로 받아들여야 한다.

    은하들이 도대체 왜 후퇴한단 말인가?

     

    휴메이슨과 허블의 발견은 우주의 기원이 대폭발임을 암시하고 있었다.

    은하들의 적색 이동을 발견할 당시에는 이것이 우주의 기원과 관련되어 있으며 모든 것의 근본을 건드리는 문제라고 확신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주 배경 복사

    적색 이동을 도플러 효과로 해석하여 은하들의 후퇴 현상을 현실로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우주의 팽창을 추론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적색 이동이 우주 팽창의 유일한 증거는 아니다.

     

    적색 이동과는 별도로 우주 배경 복사도 우주의 팽창을 설명하는 중요한 관측 사실이다.

    하늘의 어느 방향을 보든 미약한 세기의 전파 신호가 잡힌다.

     

    잡힌 전파 신호의 세기가 파장에 따라 어떻게 변하는지 조사하면, 이 신호를 내는 물질의 온도를 추정할 수 있다.

    한편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 대폭발 순간의 화구는 우주의 팽창과 더불어 점점 식어 왔다.

     

    그런데 우주 배경 복사에서 측정한 온도가, 식어 버린 화구 온도의 추정값과 정확히 일치했기 때문에 우주 배경 복사 역시 우주 팽창의 훌륭한 증거가 된다.

     

    그렇지만 여기에도 의문이 따른다.

    정밀한 전파 망원경을 U-2비행기에 실어서 지구 대기의 최상부로 올려 보내 하늘의 모든 방향을 세밀하게 관측하고 거기서 얻은 결과를 1차적으로 근사 분석했더니, 우주 배경 복사의 세기가 완벽에 가까운 대칭적 분포를 하고 있었다.

     

    이로부터 우리는 대폭발 순간에 화구가 모든 방향으로 일정하게 팽창했다고 미루어 추측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우주는 완전 대칭의 상태에서 시작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뇌의 구조

    뇌의 기능들은 크게 세 단계로 구분된다. 그

    것은 R-영역, 변연계, 대뇌 피질의 세 단계이다.

     

    뇌의 가장 오래된 부위는 뇌간이 자리한다.

    뇌간은 반사 작용, 심장 박동, 내장 활동, 호흡 등 생명의 가장 기본적인 기능을 조절한다.

     

    뇌간의 상단부를 모자처럼 뒤덮고 있는 부위인 R-영역은 인간의 공격적 행위, 정형화된 의식 행위, 자기 세력권의 방어, 계층적 위계 질서의 유지 등을 관장한다.

     

    R-영역은 변연계가 둘러싸고 있는데, 이 변연계는 뇌의 이 부위가 인간의 기분, 감정, 걱정 등의 정서적 반응과 행동 그리고 자녀 보호의 본능을 지시하고 제어한다.

     

    끝으로 뇌의 가장 바깥 부분인 대뇌 피질은 의식을 창출하므로, 인류가 꿈꾸는 모든 우주여행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두뇌 전체 질량의 3분의 2 이상을 차지하는 대뇌 피질이 직관과 비판적 분석의 중추이다.

     

    뇌의 언어는 유전자 DNA의 언어와 다르다.

    리가 알고 있는 지식은 모두 신경원 또는 뉴런이라고 불리는 세포 속에 암호로 씌어 있다.

     

    뉴런은 굵기가 겨우 수백분의 1밀리미터인 현미경적 존재로서 아주 미세한 전기·화학적 스위치 회로의 역할을 수행한다.

    이 뉴런이 우리 몸속에 약 1000억 개 있다.

    은하수 은하에도 대략 이 정도 수의 별들이 존재한다.

     

    뉴런들 중에는 하나의 수천 개의 이웃 뉴런 세포들이 연결된 것들이 있다.

    인간 대뇌 피질에서 우리는 그와 같은 연결을 총 10^14개 가량 볼 수 있다.

     

     

    별들을 향해 날아가는 보이저 탐사선

    두 척의 보이저 탐사선이 지금도 별들을 향해 날아가고 있다.

    각 탐사선에는 구리에 금박을 입힌 레코드판이 한 장씩 실려 있다.

     

    레코드판뿐 아니라 레코드 바늘과 카트리지도 실려 있으며 알루미늄 겉표지에는 사용법이 적혀 있다.

    혹시 성간 항해 중인 외계 문명인이 있다면 그들에게 우리의 존재를 알린다는 뜻에서 레코드판에 인간의 유전자, 사람의 두뇌, 우리의 도서관 등에 관한 정보를 약간씩 기술해 뒀다.

     

    그렇지만 우리의 과학에 대한 정보는 전혀 싣지 않았다.

    과학적 발견 대신에 우리 자신의 고유한 특성이라고 생각되는 사실만을 그들에게 알리고자 했다.

     

    한 여인의 생생한 느낌과 생각도 기술하여 보이저에 실어 보냈다.

    그녀의 뇌와 심장의 박동, 안구 및 근육 활동이 내놓는 전기적 반응을 1시간 동안 계속해서 채록하여 이것을 소리 신호로 바꾼 다음, 실시간으로 압축해서 시계열 신호로 만들어 레코드판에 수록하였다.

     

    우리보다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높은 수준의 문명권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우리가 보낸 레코드에 기록된 생각과 느낌이 누군가에 의해 해독될 가능성을 배제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해독하는데 수세기 걸린 로제타석

    샹폴리옹은 로제타석을 근거로 상형 문자의 해독법을 터득해 냈다.

    로제타석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그는 영국의 물리학자 토머스 영의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이 석판이 발견된 곳은 나일 삼각주에 위치한 라시드라는 마을이고 '로제타'는 아랍 어에 무지했던 유럽 인들이 라시드를 잘못 부른 이름이다.

     

    이 석판은 1799년에 라시드에서 군사 요새를 구축하던 한 프랑스 병사가 처음 발견했다.

    고대 신전에 있었던 이 석판에는 같은 내용으로 보이는 글이 세 가지 다른 종류의 문자로 적혀 있었다.

     

    맨 위에는 보통 신성 문자라고도 불리는 상형문자가, 가운데에는 평민 문자라고 불리는 흘림체 상형 문자가, 그리고 맨 아래 부분에는 그리스 문자가 적혀 있었다.

     

    그리스 문자가 해독의 결정적 열쇠였다.

    고대 그리스 어에 능통했던 샹폴리옹은 맨 아래 부분을 거침없이 읽어 내려갈 수 있었다.

     

    내용은 기원전 196년 봄에 있었던 국왕 프톨레마이오스 5세 에피파네스의 즉위를 기념하기 위해서 석판에 글을 새겼다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즉위식에 즈음하여 정치범들을 석방했고, 각종 세금을 탕감해 줬고 신전들에 재물을 하사했으며 반란군들을 용서해 주었으며 군비의 증감을 꾀했다.

     

    무척 쉬워 보이지만 실은 해독법을 터득하기 위해서 수세기에 이르는 세월이 필요했다.

    특히 고대의 기록일수록 해독하기가 더 어려웠다.

     

    단서 중에 단서가 바로 왕의 이름을 둘러싼 긴 타원형의 표시였다.

    이집트의 파라오들은 2000년 후에나 태어날 먼 미래의 이집트학 학자들에게 결정적인 도움이라도 주려는 듯이 자기네 이름에 뚜렷한 표시를 남겼던 것이다.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의 한계

    인류 전체가 눈부신 과학 문명에 큰 희망을 걸 수 있었던 시기가 역사상 단 한 번 있었다.

    그것은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의 일이었다.

     

    이오니아 문명의 수혜자들이었던 고대의 최고 지성들은 수학, 물리학, 생물학, 천문학, 문학, 지리학, 의학을 체계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기반을 알렉산드리아에 구축할 수 있었다.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이 바로 그 핵심 성채였다.

    오늘날의 학문도 당시에 이루어진 연구에 아직 그 바탕을 두고 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그리스인 왕들의 지원을 받아서 건립됐다.

     

    당시 알렉산드리아는 출판에 관한 한 지구 전체의 수도 역할을 했다.

    당시는 인쇄기가 발명되기 전이었으므로 책이란 책은 모조리 손으로 한 권씩 베껴서 만들어야 했다.

     

    프톨레마이오스 3세는 아테네의 희곡들을 엄청난 액수의 반환 보증금을 놓고 빌려온 후, 보증금을 기꺼이 포기하기로 하고 작품이 적혀 있는 두루마리 원본들을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보물같이 소중하게 간직하고 내놓지 않았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기존의 지식을 수집만 한 것은 아니었다.

    과학 연구를 적극 장려하고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아 많은 지식을 새로이 창출하기도 했다.

    그 결과는 괄목할 만했다.

     

    에라토스테네스는 지구의 크기를 정확하게 계산해서 지구 모습을 지도에 담았고 스페인에서 서쪽으로 항해하면 인도에 닿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히파르코스는 별은 태어나서 수백 년 동안 서서히 움직이다가 결국 사라진다고 추측했다.

    이러한 변화를 확인하기 위하여 그는 최초로 별의 등급과 위치를 기록한 도표를 만들었다.

     

    유클리드는 기하학 교과서를 썼다.

    유클리드 기하학은 그 후 23세기 동안이나 사람들에게 읽히면서 케플러, 뉴턴, 아인슈타인 등과 같은 위대한 과학자들이 과학에 흥미를 갖게 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갈레노스는 치료와 해부에 관한 책을 썼는데, 그 책의 내용이 의학 분야를 르네상스때까지 지배했다.

    그 외에도 수많은 연구들이 있었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 그 씨앗이 깊게 뿌리를 내려 큰 마루로 성장할 수 없었을까?

    그 후 1000년이나 지속된 암흑시대라는 혼수상태에 빠져들게 됐을까?

    암흑시대는 콜럼버스, 코페르니쿠스 그리고 동시대인들에 의해서 결국 최후를 맞는다.

     

    한 가지 확실히 짚고 넘어갈 점이 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융성하던 전 시기를 통하여 과학자들이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주장이나 가정에 도전했다는 기록이 단 한 건도 없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별의 영구 불변성은 의심했지만, 노예 제도의 정당성에 대해서 단 한 번도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과학적 발견과 과학 지식은 일부 기득권층만의 소유물로 남아 있었고 대중에게는 아무런 이득이 되지 못했다.

     

    기계와 증기 공학의 발견들은 오로지 무기의 성능을 향상시키는 데 이용되거나, 아니면 왕의 흥미를 자극하고 미신을 부추기는 데에 쓰였을 뿐이다.

     

    과학자들은 기계가 언젠가는 사람을 노예의 상태에서 해방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고대에 이루어진 위대한 업적들의 거의 대부분이 실제로 응용되지 못하고 잊혀졌다.

     

    이렇게 됨으로써 과학은 대중의 상상력을 사로잡지 못했다.

    결국 폭도들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불을 지르고 소장품과 장서를 약탈해 갔지만 그것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