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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프로페셔널의 조건

     

     

     

    생산성 혁명

    유복한 가정에서 교육을 받으며 자란 테일러가 작업 현장의 기술자가 된 것은 정말 우연한 일이었다.

    시력이 좋지 않은 테일러는 하버드 대학에 입학하는 것을 포기하는 대신 제철소에서 일하기로 마음먹었다.

     

    테일러는 매우 똑똑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빨리 승진해서 곧 관리자가 되었다.

    그가 발명한 몇 가지 금속 세공품은 그를 일찌감치 부자로 만들어주었다.

     

    그러면 무엇이 테일러로 하여금 작업 연구를 시작하게 만들었을까?

    바로 19세기 후반 당시에는 흔한 일이었던,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심각한 반목을 보고 느낀 충격 때문이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테일러는 마르크스가 보았던 것, 디즈레일리와 비스마르크 그리고 헨리 제임스가 보았던 바로 그것을 본 것이었다.

     

    더 나아가 테일러는 그들 모두가 보지 못했던 것, 즉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반목은 얼마든지 해소시킬 수 있다는 사실까지도 보았다.

     

    테일러는 노동자들이 보다 생산적으로 일할 수 있게 함으로써 꽤 넉넉한 보수를 받도록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테일러가 악평을 들은 이유는, 정확히 말하자면, 지식을 작업 연구에 적용했기 때문이다.

     

    당시 노동 조합에서는 지식을 작업 연구에 적용하는 것을 금기 사항으로 여겼다.

    노동 조합은 테일러를 대상으로 미국 역사상 가장 잔혹한 인격 말살 운동을 전개하였다.

     

    노동 조합이 지적한 테일러의 가장 큰 죄(?)는 세상에 '숙련을 요하는 작업'이라는 것은 없다고 주장한 것이었다.

    그는 육체 노동에는 다만 '작업'만 있을 뿐이며, 모든 작업은 똑같은 방법으로 분석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그의 작업 분석이 보여주는 대로, 그것이 수행되어야 하는 방식대로 작업할 의사가 있는 노동자라면 누구나 '일류 시민'이 될 수 있고, '최상급의 임금'을 받을 자격이 있었다.

     

    즉 이들이 받은 임금은 오랫동안 도제 생활을 한 숙련 노동자가 받는 임금과 비슷하거나 또는 더 많을 수도 있다는 것이 테일러의 연구 결과였다.

     

    테일러가 활동하던 시대의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가장 강력한 노동 조합은 정부 소유의 병기창과 조선소였다.

    제1차 세계대전까지는 평화시 미국의 모든 무기가 이곳에서 생산되었다.

     

    이러한 노동 조합들은 숙련 직업별 독점 조합으로서 이 노동 조합에 가입할 수 있는 회원 자격은 회원의 아들이나 회원의 친척에게만 한정적으로 주어졌다.

     

    회원이 되려면 5년 내지 7년 동안의 도제 수업을 받아야 했지만, 체계적인 훈련이나 작업 연구는 없었다.

    훈련이나 작업 연구에 대해 기록을 남기는 것은 전혀 허용되지 않았다.

     

    테일러가 지식을 작업에 적용하기 시작한 지 몇 년 안되어 작업자의 노동 생산성이 연간 3.5퍼센트 내지 4퍼센트씩 향상되기 시작하였다.

     

    이를 계산해 보면, 매 18년마다 생산성이 두 배로 된다는 결과가 나왔다.

    테일러의 훈련 방식을 도입한 국가들의 생산력은 거의 50배 가까이 증가하였는데, 이 놀라운 생산력 증대야말로 모든 선진 국가에서 생활 수준과 삶의 질을 월등히 향상시킬 수 있었던 근원이었다.

     

    1930년 경 테일러의 과학적 관리법은 - 노동 조합과 지식인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 모든 선진국을 휩쓸었다.

    그 결과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는 '부르조아'가 되었다.

     

    자본주의 산업 혁명의 진정한 수혜자는 '자본가'가 아니라 제조 공장에서 일하는 블루칼라 노동자인 '프롤레타리아'였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사실이 1900년이 되기 전에 '혁명'을 겪게 될 것이라고 마르크스가 예견했던 고도로 발달한 선진국에서 오히려 마르크스주의가 완전히 실패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설명해 주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종종 다윈, 프로이트와 함께 '현대 세계를 창조한 삼위일체'로 간주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세상에 정말 정의라는 것이 있다면 마르크스 대신 테일러를 그 자리에 앉혀야만 한다.

     

    테일러가 그에 걸맞은 영광을 누리지 못했다는 사실은 단지 사소한 문제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난 100여 년 간의 폭발적인 생산성 향상을 통해 선진 경제를 창조할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지식을 작업에 적용한 테일러의 연구 덕분이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는 사람이 너무나도 적다는 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이다.

     

     

    경영이란 무엇인가

    경영은 아주 오랫동안 우리 주위에 있어왔다.

    나는 "당신은 지금까지 가장 위대한 경영자는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이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언제나 이렇다.

    "4,000여 년 전 최초로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지을 생각을 하고, 설계하고 그리고 건설한 사람이지요.

    피라미드는 아직까지도 무너지지 않고 여전히 서 있지 않습니까?"

     

    제2차 세계대전 동안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내가 처음 경영을 연구하기 시작했을 때, 경영자란 '부하직원들의 과업에 책임을 지는 사람'으로 정의되고 있었다.

     

    다른 말로, 경영자란 '보스'를 의미했고, 경영은 지위와 권력이었다.

    이것은 아마도 대부분 사람들이 '경영자'나 '경영'에 대한 말할 때 아직도 마음속에 품고 있는 하나의 정의일 것이다.

     

    그러나 1950년대 초가 되자 경영자의 정의가 '다른 사람들의 성과에 책임을 지는 사람'으로 바뀌었다.

    지금 우리는 이 정의 또한 너무나 편협한 것임을 알고 있다.

    경영자에 대한 올바른 정의는 '지식의 적용과 성과에 책임을 지는 사람'이다.

     

    경영자의 정의에 대한 이러한 변화는 지금 우리가 지식을 필수적인 자원으로 간주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토지나 노동과 자본 역시 중요한 생산 요소들이다.

     

    그것들 없이 지식만으로는 아무것도 생산할 수 없으며 아무런 성과도 낼 수 없다.

    그러나 지식에 지식을 적용하는 효과적인 경영만 있으면 다른 자원들은 언제나 손쉽게 얻을 수 있다.

     

    지식이 '하나의 자원'이 아니라 '자원 그 자체'가 되었다는 사실이 바로 지금의 사회를 '자본주의 이후 사회'로 규정지을 수 있게 한다.

    또한 사회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면서 새로운 사회적·경제적 원동력과 정치 체계를 창조하고 있다.

     

     

    일반 지식에서 전문 지식으로

    소크라테스에게 있어 지식의 목적은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고 그리고 자기 개발을 꾀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내면에만 나타나는 것이었다.

     

    소크라테스의 경쟁자인 프로타고라스에게 있어서 지식의 목적은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를 알고 그것을 말로 잘 표현하는 것이었다.

    지식에 대한 프로타고라스의 개념은 2,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서양의 학문을 지배했고, 또 지식이 무엇인지를 규정했다.

     

    지금 우리가 지식으로 간주하고 있는 '지식'은 행동을 통해 스스로를 증명한다.

    우리가 지식이라고 말할 때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행동을 하는 데 효과가 있는 정보이고, 결과에 초점을 맞춘 정보이다.

    그 결과들은 개인의 내면이 아니라 '바깥에' 드러난다.

     

    사회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나타나며, 혹은 지식 그 자체의 진보로도 나타난다. 어떤 일을 성취해 내기 위해 필요한 지식은 고도로 전문화된 지식이다.

     

    이것이 바로 전통적인 지식 - 고대에서부터 지금까지도 '교양 교육'으로 남아 있는 - 이 그 지위를 기술 또는 기능에 물려주게 된 이유이다.

     

    과거의 기능은 배울 수도 없었고 가르칠 수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일반적인 원리를 전혀 내포하고 있지 않았다.

     

    그것은 구체적이었고 전문화되었다.

    그것은 학습보다는 경험을 통해, 학교 교육보다는 훈련을 통해 얻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물론 오늘날에는 이러한 전문적인 지식을 과거처럼 '기능'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이제 우리는 체계적인 전문 지식을 '원리'라고 부른다.

     

    이것은 지식의 역사에 기록된 그 어떤 것에도 못지않는 커다란 변화이다.

    체계화된 원리는 '기능'을 방법론 - 예를 들면, 공학이라든가 과학적·계량적 방법 혹은 외과 의사들의 감별진단법 등 - 으로 전환한다.

     

    이런 각각의 방법론들은 개별적인 경험을 시스템으로 전환한다.

    방법론은 단순한 이야깃거리를 정보로 바꾸어놓았다.

     

    방법론은 기능을 가르칠 수 있고 배울 수 있는 것으로 바꾸어놓았다.

    일반 지식에서 전문 지식으로의 이동은 지식으로 하여금 새로운 사회를 창조할 수 있도록 힘을 부여해 주었다.

     

    이 새로운 사회는 전문화된 지식에 기초하여 건설되어야 하며, 전문가로서의 지식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되어야 한다.

    이러한 사실이 바로 지식 근로자들에게 힘을 가질 수 있도록 해준다.

     

    그리고 이것은 근본적인 물음들을 제기한다.

    가치, 비전, 신념 그리고 사회를 한데 묶어주는 것들과 인생에 의미를 부여해 주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말이다.

     

    이것은 또한 중요한 - 그리고 새로운 - 질문을 던진다.

    "지식사회에서 지식인의 모습이란 어떤 것인가?"하는것 말이다.

     

     

    조직 사회와 지식 근로자

    지식 사회에서는 전문 지식이 각 개인과 경제 전체에 있어 가장 기본적인 생산 요소가 된다.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전통적인 생산요소인 토지와 노동 그리고 자본이 사라진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부차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토지와 노동 그리고 자본은 획득될 수 있다.

     

    전문 지식이 있다면 더욱 쉽게 얻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역시 전문적인 지식이 아무리 많더라도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 것도 생산할 수 없다.

     

    전문적인 지식은 어떤 과업과 연결되었을 때에만 생산적이다.

    이러한 사실이 왜 지식 사회가 곧 조직 사회인지를 설명해 준다.

    영리 조직이든 비영리 조직이든 모든 조직의 목적과 기능은 공동 과업 수행을 위한 전문 지식의 통합에 있다.

     

     

    조직의 사회적 책임

    비영리 조식은 가장 강력한 사회적 힘을 소유하고 있다.

    기업들보다 훨씬 더 큰 사회적 힘을 갖고 있다.

     

    역사상 오늘날 대학이 가진 권력보다 더 큰 사회적 힘을 부여받은 조직은 없었다.

    대학에서 어떤 학생의 입학을 거절한다거나 학위를 부여하지 않는다거나 하는 것은 한 사람의 생애에 있어 직업을 갖거나 성공할 수 있는 모든 기회들을 빼앗아 가는 것이나 다름없다.

     

    마찬가지로, 병원에서 어떤 외과 의사의 채용을 거절하는 것은 그 외과 의사로 하여금 의료 활동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과 같다.

    도제 수업을 받으려고 하는 어떤 개인에게 조합 가입을 거절하는 노동조합의 권리 또는 오직 조합에 가입한 회원만 취업할 수 있도록 하는 '클로즈드 숍'체계는 그 노동 조합에 엄청난 사회적 힘을 부여한다.

     

    조직이 가진 사회적 권한은 정치적 권한에 의해 어느 정도 제한될 수 있다.

    조직의 권한은 법정에서의 정당한 절차와 심의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나 그것은 정치적 당국에 의해서가 아니라 개별 조직들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가 조직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그토록 강조하는 이유이다.

     

     

    조직의 성과란 무엇인가

    미국에서-또는 다른 국가도 마찬가지로-는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누구도 '조직'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1950년판 옥스퍼드 사전에도 현대적 의미로서의 조직이라는 단어는 나와 있지 않았다.

    그 이유는 경영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야 출현했기 때문이다.

     

    이것을 나는 '경영 혁명'이라고 명명한 바 있다.

    경영 혁명은 우리들로 하여금 조직이 사회의 다른 기관과는 분명히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해주었다.

     

     

    조직 사회의 특성들

    근대 유럽의 역사는 - 일본의 역사도 마찬가지인데 - 모든 경쟁적인 권력 중심점들이 하나의 중심적인 권위, 즉 처음에는 '군주'로, 그 다음에는 '국가'로 통합되는 과정이었다.

     

    19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모든 선진국이 중앙 집권 국가가 되었다.

    미국만이 예외였는데, 미국은 각종 종교와 교육 기관들을 매우 다양하게 유지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중세 사회의 다양성을 철폐한 것은 지난 600여 년 간 역사적 '진보'의 원천이 되었다.

    중앙 집권 국가의 승리가 확실해질 바로 그 무렵에 처음으로 새로운 조직이 등장했다.

     

    바로 대기업이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역사의 종말'이 선언될 때마다 언제나 나타난다.)

    그때부터 새로운 조직들이 하나씩 출현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유럽에서는 중앙 정부의 통제 아래 안전하게 성장을 해오던 대학과 같은 오래된 조직들이 다시 자치권을 얻게 되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20세기의 전체주의, 특히 공산주의는 오래되었지만 한때는 진보적이었던 신념, 즉 경쟁적이고 자치적인 다양한 조직들보다는 하나의 권위와 하나의 조직만 있으면 된다는 신념을 지키기 위한 최후의 절망적인 시도였던 것이다.

     

    그 시도는, 우리가 이미 아는 바와 같이,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중앙집권적인 권위의 실패는 다원 사회에서 나타나는 문제들의 해결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생산성을 어떻게 향상시킬 것인가

    생산성의 급증 이전에는 한 나라가 '선진국'이 되려면 적어도 50년이 걸렸다.

    그런데 한국은 - 1955년까지도 진정 '후진국' 가운데 한 나라였다 - 그것을 25년 만에 해냈다.

     

    아득한 옛날부터 하나의 규범처럼 여겨졌던 50년이라는 기준 연수를 한국이 그렇게 앞당길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1870년 내지 1880년경 미국에서 시작되었던 생산성 혁명의 결과이다.

     

    지식 근로자의 종류는 과학자, 외과 의사, 디자이너, 점포 관리자 그리고 보험 회사의 보험금 청구서를 처리하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지식 노동의 3가지 범주

    성과에 초점을 맞추어 지식 노동의 세 가지 범주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1. 지식 노동들 중 몇 가지 직무들의 성과는 곧 질을 의미한다.

    그 하나의 예가 연구소의 연구원들이 수행하는 직무인데, 이 직무에서 성과의 양 - 연구 결과의 수 - 은 질적인 문제에 비해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다.

    연간 2,000만 달러에서 3,000만 달러 정도의 매상을 올리는 20개의 '모조 약'보다는 10년간 시장을 지배하면서 연간 5억 달러의 매상을 올리는 '신약' 한 가지가 훨씬 더 큰 가치를 지닌다.

     

    2. 성과가 질과 양 두 가지로 구성되는 지식 노동도 매우 많다.

    백화점 판매원의 작업이 그 한 예이다.

    '고객의 만족'은 질적인 성과이기 때문에 측정하기가 쉽지 않다.

    그렇지만 그 질적인 성과는 판매 전표의 매수나 총판매액과 같은 양적인 성과 못지않게 중요하다.

     

    3. 마지막으로, 그 성과가 양적인 측면에 있는 작업도 있다.

    즉 보험 회사에서 보험금 청구서의 기입과 처리를 하는 일이라든지 병원에서 병상을 꾸미는 일 등과 같이 그 성과가 물건을 생산하고 운반하는 일, 즉 육체 노동과 비슷한 작업들도 매우 많다.

     

    지식 노동이 이렇게 뚜렷한 세 가지 범주로 나뉘는 까닭에, 지식 노동의 생산성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특정 직무가 어느 범주에 속하는지를 먼저 따져볼 필요가 있다.

     

     

    생산성 향상과 파트너십

    지식 노동의 생산성을 증대시키기 위해서는 과업을 정의하고, 그것에 전념하며 그리고 성과를 규정하는 일 외에 다른 여러 가지 일이 더 필요하다.

     

    우리는 성과가 주로 질을 뜻하는 직무들에 있어서는 그 작업 과정을 어떻게 분석해야 될지 잘 모르고 있다.

    이런 지식 노동에 있어서는 오히려 "무엇이 효과를 발휘하는가?"라고 물어야 한다.

     

    한편 성과가 질과 양 둘 다를 의미하는 직무들에 대해서는 위의 두 가지를 모두 다 해야 한다.

    즉 작업과정을 단계별로 그리고 활동별로 분석해야 하고, 또한 '무엇이 효과를 발휘하는지'를 물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성과가 양으로 평가되는 생산 작업에 있어서는 질의 기준을 규정하고 그것을 생산 공정에 반영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러한 작업에 있어서의 실질적인 생산성 개선은 상당히 전통적인 산업공학, 즉 개개의 단순 과업들을 합쳐서 하나의 완전한 '직무'로 구성하는 과업 분석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무엇을 어떻게 공언할 것인가

    다음은 미국 정부 산하의 대규모 과학 연구소에서 있었던 일이다. 연구소가 처음 설립된 1930년대부터 일해오던 나이 많은 출판국장이 퇴직을 했는데, 그는 과학자도 훈련받은 작가도 아니었다.

     

    그가 발행하는 간행물들은 간혹 전문가적인 세련미가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그의 후임에는 일류 과학 전문 기자가 기용되었다.

     

    연구소에서 출판하는 간행물들은 즉시 전문지다운 냄새를 물씬 풍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간행물의 주요 독자층인 과학자들이 잡지의 구독을 중단했다.

     

    이 연구소와 오랫동안 긴밀한 협력 관계를 맺고 있던, 매우 존경받는 어느 대학 연구소 소속의 과학자가 마침내 연구소장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해주었다.

    "지난번 출판국장은 '우리들을 위해' 글을 썼는데, 새로 부임한 국장은 '우리들에게' 글을 쓰고 있는 것 같소이다."

     

    퇴임한 출판국장은 스스로 다음과 같이 질문했다.

    "이 연구소가 성과를 올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나는 어떤 공헌을 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스스로의 대답은 "나는 우리 연구소에서 하는 일과 유사한 일을 하는 외부의 젊은 과학자들에게 흥미를 유발할 수 있고, 그들로 하여금 우리와 함께 일하려는 마음이 생기도록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연구소 내부의 주요 문제들과 새로운 결정 사항들 그리고 심지어는 연구소 안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논쟁들까지도 중요하게 다루었다.

     

    그런 편집 방침은 종종 국장과 연구소 소장 사이에 정면 충돌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전임 국장은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다.

     

    "우리가 만드는 간행물의 존재 가치는 연구소 내부 사람들의 입맛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 간행물을 읽고 얼마나 많은 젊은 과학자들이 이 연구소에 지원하는지 그리고 그들이 얼마나 유능한 과학자들인지 하는 것에 달려 있다."라고 주장하였다.

     

     

    최선의 공헌

    새로 부임한 어느 병원장이 첫번째 간부 회의를 주재하던 중에 일어난 일이다.

    다소 까다로운 문제 하나가 있었는데 참석자들 모두 만족하는 선에서 해결이 되었다.

     

    그런데 한 참석자가 불쑥 다음과 같이 질문했다. "브라이언 간호사도 이 결과에 만족했을까요?"

    즉각 다시 논쟁이 시작되어 오랫동안 계속되었고, 결국에는 한층 더 야심적인 새로운 해결책이 도출되었다.

     

    병원장이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브라이언 간호사는 이미 은퇴한 고참 간호사였다.

    그녀는 특별히 뛰어난 간호사도 아니었고, 간부 지위에 오른 일도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담당 병동에서 환자 간호에 관련된 새로운 결정을 내릴 때마다 다음과 같이 질문했다.

    "이 환자를 간호하는 데 있어 가능한 모든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브라이언 간호사가 근무하는 병동의 환자들은 훨씬 더 편안함을 느꼈고 회복도 더 빨랐다.

    차츰 세월이 흐르면서, 병원 전체가 '브라이언 간호사의 규칙'으로 알려진 것을 채택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달리 말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는 것 말이다.

    "우리는 이 병원의 목적에 적합한 최선의 공헌을 하고 있는가?"

     

    브라이언 간호사는 이미 10년 전에 은퇴했지만, 그녀가 설정한 기준은 그녀보다 교육 수준과 지위가 높은 사람들에게 여전히 준수되고 있었던 것이다.

     

     

    신들이 보고 있다.

    함부르크에서 견습생으로 일을 배우고 있을 그 무렵, 나는 '완벽'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또 하나의 이야기를 읽게 되었다.

    그것은 고대 그리스의 위대한 조각가 페이디아스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는 기원전 440년경 여러 조각 작품의 제작을 의뢰 받았는데, 그때 조각한 작품들이 2,4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의 지붕 위에 여전히 서 있다.

     

    페이디아스의 작품들은 오늘날까지도 서구 미술 역사상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히고 있다.

    보는 사람마다 그의 작품을 칭송했지만, 정작 아테네의 재무관은 페이디아스의 작품료 지불을 거절했다.

     

    재무관의 거절 사유는 이런 것이었다.

    "조각들은 신전의 지붕 위에 세워져 있고, 신전은 아테네에서 가장 높은 언덕 위에 위치해 있다.

    따라서 사람들은 조각의 전면밖에 볼 수가 없다.

    그런데도 당신은 우리에게 조각 전체 값을, 다시 말해 아무도 볼 수 없는 조각의 뒷면 작업에 들어간 비용까지 청구했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에 대해 페이디아스는

    "아무도 볼 수 없다고? 당신은 틀렸어, 하늘의 신들이 볼 수 있지."라고 대꾸했다.

     

    폴스타프를 관람하고 난 후 얼마 지나지 않은 때에 이 이야기를 읽었는데, 나 역시 제발 신들이 눈치채지 않기를 바라는 그런 식으로 일을 한 적이 많았다.

     

    그렇지만 페이디아스는 내게 어떤 일을 할 때 오직 '신들'만이 그것을 보게 될지라도 완벽을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었다.

     

     

    피드백 활동을 하라

    1937년에 나는 다시 영국에서 미국으로 이주했다.

    그로부터 꽤 많은 세월이 흐른 1945년 경에 나는 근대 유럽의 초기 역사, 특히 15~16세기의 역사를 3년에 걸쳐 연구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 연구를 통해 나는 근대 유럽에 지배적인 세력을 지닌 두 개의 조직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하나는 가톨릭이 지배하는 남부 유럽의 예수회였고, 다른 하나는 프로테스탄트가 지배하는 북부 유럽의 칼뱅파 교회였다.

     

    1536년에 독자적으로 창설된 두 교단은 공교롭게도 똑같은 방법으로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둘 다 아주 초창기부터 똑같은 학습 원리를 채택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회 신부나 칼뱅파 목사는 어떤 중요한 일을 할 때마다, 예를 들면 어떤 중요한 의사 결정을 할 때마다 자신이 예상하는 결과를 기록해 두었다.

     

    그리고 9개월 후에는 실제 결과와 자신이 예상했던 결과를 비교해 보는 피드백 활동을 한다.

    그것은 그들이 잘한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들의 장점은 무엇인지를 신속하게 알려준다.

     

    그것은 또한 그가 무엇을 배워야만 하는지 그리고 어떤 습관을 바꿔야 하는지도 알려준다.

    마지막으로 그것은 그가 소질이 전혀 없는 분야가 무엇인지 그리고 잘할 수 없는 일이 무엇인지도 가르쳐준다.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기 바라는가

    슘페터는 30세 무렵에 그의 위대한 경제학 저술들 가운데 최초의 두 권을 출판했는데, 그 당시 누군가가 "당신은 진정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랍니까?"라고 질문을 하자 "유럽 미녀들의 최고 연인, 유럽의 최고 승마인, 그 다음으로는 세계 최고 경제학자로 기억되기 바란다."라고 대답하여 악명이 높았다.

     

    활기차고, 당당하고, 외향적이고 그리고 우쭐대기 좋아했던 슘페터는 66세의 나이로 하버드에서 강의하는 마지막 한 해를 보내고 있었고 최고의 명성을 누리고 있었는데 그때 죽은 후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라는지 물었을 때 다음과 같이 대답 했다.

     

    "그렇네. 그 질문은 여전히 나에게 중요하네.

    그러나 지금 나는 그 당시와는 전혀 다른 대답을 하고 있네.

    나는 대여섯 명의 우수한 학생을 일류 경제학자로 키운 교사로 기억되길 바란다네.

    이제 나도 책이나 이론으로 기억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알 만한 나이가 되었어.

    진정 사람의 삶을 변화시킬 수 없는 책이나 이론이라면 아무런 소용도 없다는 걸 알았단 말일세."

     

     

    커뮤니케이션의 4가지 원리

    1. 커뮤니케이션은 지각(perception)이다.

    2. 커뮤니케이션은 기대(expectation)이다.

    3. 커뮤니케이션은 요구(demand)를 한다.

    4. 커뮤니케이션과 정보는 서로 상이한 것이며, 사실상 대립 관계에 있다 - 그러나 한편으로는 상호의존적이다.

     

    수사학에 관한 문헌 가운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문헌 중 하나인 플라톤의 <파에톤>편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고 한다.

     

    "사람은 다른 사람과 말을 할 때 듣는 사람의 경험에 맞추어 말해야만 한다.

    예를 들어, 목수와 이야기 할 때는 목수가 사용하는 말을 써야 한다."

     

     

    정보 혁명 이후의 지식 근로자

    우리는 정보혁명이 가져다주는 진실로 혁명적인 충격을 이제 막 피부로 느끼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혁명을 가속화한 것은 '정보' 그 자체가 아니다.

     

    그것은 '인공 지능'도 아니며, 또한 의사 결정이나 정책 및 전략 수립에 활용되는 컴퓨터도 아니다.

    그것은 실제로 아무도 예견하지 못했으며, 진정 10년 내지 15년 전만 해도 사람들 사이에서 거론조차 되지 않았던 것, 즉 전자상거래다.

     

    전자상거래를 가능하게 한 것은 인터넷 사용의 폭발적인 증가이다.

    인터넷은 전세계적으로 상품과 서비스를 유통시키고, 그리고 놀랍게도 전문가와 경영자의 구인 및 구직에도 이용되는 하나의 중요한, 아마도 궁극적으로는 '가장' 중요한 통로가 될 것이다.

     

    전자상거래는 경제와 시장 및 산업 구조, 상품과 서비스 및 그 유통, 소비 계층의 세분화와 소비자의 가치관 및 소비 행위, 직업과 노동 시장 등에 심각한 변화를 불러오고 있다.

     

    그러나 전자상거래가 불러온 한층 더 큰 변화는 사회 및 정치 분야,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가 세상을 보는 관점과 그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 자신의 변화일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변화와 더불어 지금까지 예측되지 못했던 신종 산업들이 빠른 속도로 등장하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미 생명공학 산업이 그러한 신종 산업으로 등장하였으며, 어류 양식업도 그 중 한 가지이다. 앞으로 50년 안에 어류 양식업은 현재 바다에서 활동하는 수렵 채취인을 '해양 목축업자'로 바꾸어놓을 것이다.

     

    이와 유사한 혁신이 약 1만 년 전 지상에서 수렵 및 채취 활동을 하던 인류의 조상을 농경 및 목축업자로 바꾸어놓았던 것처럼 말이다.

     

     

    영국이 쇠퇴한 이유

    영국이 뒤쳐진 주된 이유가 경제적인 것도 기술적인 것도 아니라는 주장은 다들 인정하는 사실이었다.

    주된 이유는 사회적인 것이었다.

     

    경제적으로 특히 재정적으로 영국은 제1차 세계대전까지 강대국의 지위를 지켰다.

    기술적으로도 영국은 19세기 동안 내내 자신의 위치를 지켰다.

     

    현대 화학 산업의 첫번째 생산물인 합성 염료는 영국에서 발명되었고, 증기 터빈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영국은 사회적으로 기술자를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기술자는 절대로 '신사'가 될 수 없었다.

     

    영국인들은 인도에 최고 수준의 공업계 학교를 세웠지만, 본국에는 그런 학교를 세우지 않았다.

    사실 다른 어떤 나라도 '과학자'를 영국보다 우대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정말이지, 영국은 19세기 내내 물리학에서 주도권을 보유했는데, 반면에 기술자들은 '장사꾼' 지위에 머물러 있었다.

     

    영국인 벤처 자본가를 양성하지도 않았다.

    그들이야말로 예상치 못한 사업 그리고 증명이 안 된 사업에 투자할 자본과 그럴 마음을 가진 자본가들이었는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