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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미안
    ㄷㅔ

     

     

     

    두 개의 세계

    왜 나는 이제까지 아버지에 대해서 그러했던 것보다 크로머에게 더 잘 복종했던 것일까?

    왜 나는 도둑질했다는 이야기를 꾸며냈던 것일까?

    왜 나는 죄를 영웅적 행위인 양 뽐냈던 것일까?

     

    이제, 악마가 내 손을 잡고, 원수가 내 뒤를 따르게 되었다.

    나는 심장이 얼어 붙는 듯한 마음으로 나의 세계가, 나의 선량하고 행복한 인생이 과거지사가 되고 나에게서 떨어져가는 것을 방관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흡인력이 강한 새로운 뿌리로 어둡고 낯선 외계에 내가 닻을 내리고 고착되어 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카인

    아, 오늘에서야 나는 그것을 알았다.

    인간에게는, 이 세상에서 자기 자신에게로 이끄는 길을 가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 없다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 반년쯤 뒤에 이 유혹에 대항할 길이 없어서 산책을 하러 나갔을 때, 나는 아버지에게 많은 사람들이 아벨보다 카인을 좋은 사람이라고 설명하는 데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가를 물었다.

     

    아버지는 매우 놀라서 나에게 그것은 전혀 새로운 게 없는 견해라고 설명해주셨다.

    그것은 이미 원시 그리스도교 시대에도 있었고, 여러 종파에서 전도되었는데 그 종파들 가운데 하나를 '카인교파'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도둑

    내가 마음속에 늘 간직하고 있었으며, 아무에게도 결코 한 마디도 언급한 적이 없는 나의 소년 시절의 수수께끼에 들어맞았다.

    데미안이 그때 신과 악마에 관하여 신적인 세계와 공적인 세계, 그리고 묵살당하는 악마의 세계에 관하여 이야기한 것은 바로 나 자신의 생각이었고, 나 자신의 신화였고, 두 개의 세계 또는 세계의 두 절반에 관한, 즉 밝은 절반과 어두운 절반에 관한 나 자신의 생각이었던 것이다.

     

    나의 문제가 모든 인간의 문제이며, 모든 생명과 사색의 문제라는 인식의 마치 성스러운 그림자처럼 홀연히 나를 스쳐갔다.

    그리고 나의 개인적인 생활과 생각이 위대한 이념의 영원한 강에 깊이 관여하고 있음을 보고 또 느끼게 되자, 불안과 경건한 마음이 나를 엄습했다.

     

    그러나 그 깨달음이 어쩐지 무엇인가를 실증해주고 또 행복하게 해주긴 하였으나 기꺼운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가혹하고 떫은 맛이 났다.

    왜냐하면 그 속에는 책임의 의미가, 이미 어린애일 수 없다는 사실과 혼자서 살아 나가야 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베아트리체

    불현듯 다시금 내 앞에 고귀하고 숭고한 영상이 나타났다.

    아, 어떠한 갈망이나 충동도 나의 배누에 있는 경건과 숭배에 대한 소원만큼 그렇듯 깊고, 그렇듯 열렬한 것은 없었다!

     

    나는 그 여자에게 베아트리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 소녀는 작고 긴 얼굴에다가 영혼이 서린듯한 손과 표정을 지니고, 팔다리가 깊고 날씬한 체구를 하고 있었다.

     

    겉모습은 내가 사랑하는 이러한 날씬함과 소년다운 점을 보여주고, 얼굴에도 영혼이 서린 듯한 기운이 엿보이기는 하였으나 그 여자는 그림의 소녀와 전적으로 똑같지는 않았다.

    나는 베아트리체와 단 한 마디의 말도 나눈 적이 없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싸운다.

    알은 새의 세계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리지 않으면 안 된다.

    새는 신을 향하여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

     

     

    야곱의 싸움

    이봐, 싱클레어. 우리의 신은 아프락사스야.

    그런데 그는 신인 동시에 악마지.

    그는 자기의 내부에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를 지니고 있어.

    아프락사스는 자네의 사상이나 자네의 꿈에 대해서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아.

    그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되네.

    그러나 만일 자네가 흠잡을 곳 없는 평범한 사람이 되는 날이면, 그는 자네를 버릴 거야.

    그러고는 자기의 사상을 담아 요리하기 좋은 새로운 냄비를 찾을 테지.

     

     

    에바 부인

    현관문의 아치 위에 돌로 된 문장을 달고 있는 고향 집,

    그 문장을 그리던 소년 데미안,

    두려움에 가득 차 나의 원수 크로머의 속박에 얽혀 있던 소년으로서의 나 자신,

    조용한 교실의 책상에서 나의 동경의 새를 그리며 영혼이 제 스스로의 그물에 뒤얽혔던 청년으로서의 나 자신,

    그리고 모든 것이, 이 순간까지에 이르는 모든 것이 나의 내부에서 되울리고 시인되고 대답되고 긍정되었다.

     

    그녀는 나의 매 그림을 가리켰다.

    "당신이 우리 막스에게 이 그림을 주었을 때만큼 그가 크게 기뻐한 적이 없어요."

     

    그녀는 생각에 잠기며 말했다.

    "나도 그랬지요. 우리는 당신을 기다렸어요.

    이 그림이 오자 당신이 우리에게로 오는 중임을 알았지요.

    당신이 조그만 소년이었을 때 말예요. 싱클레어!

    어느 날 우리 집 애가 학교에서 와서는 말했어요.

    '이마에 표지가 있는 아이가 있어요. 그애는 틀림없이 내 친구가 될 거예요'라고.

    그애가 당신이었지요.

    당신은 쉽지 않았겠지만 우리는 당신을 신뢰했습니다."

     

    나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오, 그가 그것을 말했나요! 그 당시는 제가 가장 비참했던 시절이었지요."

     

    "알아요. 막스가 나에게 지금 싱클레어는 최대의 곤란에 당면해 있다고 말하더군요.

    그는 또다시 협동체 속으로 도망치려고 애쓰고 있으며 심지어는 술집의 단골 손임이 되기까지 했다고,

    하지만 성공하지는 못할 거라고 했지요.

    그의 표지가 가려져 있긴 하지만 그것이 아무도 모르게 그를 불태우고 있으니까 그랬다고 했어요.

    그렇지 않았나요?"

     

    "네, 물론 그랬습니다. 틀림없어요.

    그 후 저는 베아트리체를 발견하고 그러고 나서 마침내는 지도자 하나가 저에게 찾아들었지요.

    피스토리우스라는 사람이었어요.

    그때야 비로소 왜 저의 소년 시절이 그렇듯 막스에 결부되었는가, 왜 제가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는가가 명백해졌던 것입니다.

    아주머니, 아니 어머니, 저는 그 당시 때때로 자살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믿었습니다.

    누구에게나 그 길은 그렇게 어려운 것인가요?"

     

    그녀가 손으로 나의 머리를 공기처럼 가볍게 쓰다듬어주었다.

    "태어난다는 것은 언제나 어려운 일이지요.

    새도 알에서 나오기 위해서 애쓰지요.

    돌이켜 생각해보고 그리고 물어봐요.

    대체 길이 그렇게 어려운 것이었을까, 그저 어렵기만 했던가, 그것이 또한 아름답지는 않았던가 하고요.

    당신은 보다 더 아름답고 보다 더 쉬운 길을 알고 있었던가요?"

     

    나는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려웠습니다."

    나는 꿈을 꾸듯 말했다.

    "꿈이 오기까지는 어려웠습니다."

     

    그녀는 머리를 끄덕이고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래요, 사람이란 자기의 꿈을 발견해야 되는 거예요.

    그러면 길은 쉬어져요.

    하지만 영속적인 꿈이란 존재하지 않아요.

    새로운 꿈이 모든 꿈과 바뀌는 거지요.

    그리고 어떤 꿈에도 집착하려고 해서는 안 돼요."

     

     

    종말의 발단

    내가 전쟁터에 왔을 때는 이미 겨울이 다가와 있었다.

    처음에 나는 총격전의 충격에도 불구하고 만사에 대해서 실망했다.

     

    옛날에 나는 인간이 하나의 이상을 위해 사는 일이 왜 그토록 드문지에 대해 무척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그런데 지금 나는 많은 사람들이, 아니 모든 사람들이 이상을 위해 죽을 수 있음을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이거나 자유롭거나 선택된 이상인 아니었다.

    그것은 떠맡겨진 공통의 이상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나는 내가 인간을 과소평가했음을 알았다.

    아무리 군무와 공통적인 위험이 그들을 획일화했다 하더라도, 살아 있는 사람들이나 죽어가는 사람들의 훌륭한 태도로 운명의 의지에 접근하는 것을 나는 보았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 매우 많은 사람들은 공격시뿐만 아니라 어느 때건 목적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라고는 없으면서도, 다른 어떤 거대한 것에 대한 완전한 헌신을 뜻하는 확고하고 아득하고 다소간 홀린 듯한 눈빛을 지니고 있었다.

     

    설사 이들이 언제나 자기들이 원하는 바를 믿고, 그리고 말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들은 준비를 갖추고 있었으며, 쓸모가 있었고, 그들에게는 미래가 형성될 것이었다.

     

    그리고 이 세계가 전쟁의 영웅주의를, 명예와 그 밖의 다른 낡아빠진 이상을 완고히 지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면 보일수록, 외관상으로는 인간성의 모든 음향이 있는 듯 없는 듯하게 울리면 울릴수록, 이 모든 것은 마치 전쟁의 외적이고 정치적인 목적이 그렇듯이 단지 피상적인 것에 불과했다.

     

    그 깊숙한 곳에서는 무엇인가가 형성되고 있었던 것이었다.

    새로운 인간성과 같은 무엇인가가,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을 나는 볼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 가운데 다수가 내 옆에서 죽어갔지만 그들에게서는 증오나 분노도, 살육과 파괴도 그 대상물에 결부되어 있지 않다는 인식이 느껴졌던 것이다.

     

    그렇다.

    그 대상물이란 그 목적과 마찬가지로 매우 우연한 것이었다.

    본래의 감정은 가장 과격한 것조차도 적에게 행해진 것은 아니었다.

     

    그 피비린내 나는 싸움의 소산은 내면의 발산미여, 새로운 태어날 수 있기 위해 미쳐 날뛰고 죽이고 파괴하고 죽어버리려고 하는 내부에서 분열된 영혼의 발산이었다.

     

    한 마리의 거대한 새가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하는 것이었다.

    그 알은 이 세계였고 따라서 이 세계는 산산조각이 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