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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봄
"그래, 그래" 그는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하느님은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 모두에게 비를 내리시지.
오직 재봉사만 비를 맞지 않아.
그런데도 자넨 여전히 불평을 해야 하겠나, 슐로터베크?"
"어휴, 크눌프, 말하고 싶지도 않네.
저 옆방에서 애들 소리지르는 게 들리지 않나.
이제 다섯이야.
여기 앉아 밤늦게까지 중노동을 하는데도 항상 부족하기만 해.
그런데 자네는 산책말고는 하는 일이 없으니!"
"틀렸어,
이 친구야,
난 노이슈타트의 병원에 너더댓 주 동안 누워 있었어.
그곳은 환자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기간만큼만 입원을 시키는 곳이야.
사실 아무도 그곳에 더 오래 머무르지도 않지.
여호와의 길은 참 놀랍지 않나, 슐로터베크."
"신앙심 같은 얘기로 나를 괴롭히지 말게!
자네 병원에 있었다고 했나? 그건 정말 안된 일이구먼."
그는 조심스럽게 펠트 모자의 가장자리를 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가 바느질만큼 솜씨 있게 해내지 못하자.
친구가 그의 손에서 인두를 빼앗아 직접 다림질을 했다.
"정말 좋은데."
크눌프가 치하했다.
"이제야 다시 나들이 모자가 됐어.
이보게, 재봉사 친구,
자넨 성경에 너무 많을 것을 기대하고 있어.
무엇이 진리인지, 인생이 본래 어떻게 이루어진 것인지는 각자가 스스로 깨달아야 하는 것이지.
결코 어떤 책에서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일세.
내 생각은 그렇네.
성경은 오래된 책이지.
옛날 사람들은 우리가 오늘날엔 아주 잘 알고 있는 사실들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면에서 아직 모르고 있었지.
하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성경 안에는 아주 아름답고 멋진 이야기들이 담겨 있는 거야.
진실한 이야기들도 아주 많이 들어 있고, 성경의 여기저기에서 난 꼭 아름다운 그림책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네.
그 젊은 여인 말일세.
롯이 들판에서 나가 남겨진 이삭들을 줍는 장면은 참 매력적이더군.
그 얘기에선 절정에 달한 뜨거운 여름이 느껴져.
아니면 예수께서 어린아이들 곁에 앉아 이렇게 생각하시는 장면도 있지.
'내게는 교만한 어른들보다 너희들이 훨씬 사랑스럽구나!'
그분이 옳다고 생각하네.
그러니 벌써 그분에게서 무언가를 배울 수 있지 않은가."
크눌프에 대한 나의 회상
"정말 그래. 크눌프, 적절한 순간에 바라보면 거의 모든 것이 아름다워."
"그래, 하지만 난 또 다른 생각이 들기도 해.
가장 아름다운 것이란 사람들로 하여금 즐거움뿐만 아니라 슬픔이나 두려움도 항상 함께 느끼게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왜 그렇지?"
"무슨 말이냐 하면, 정말로 아름다운 소녀가 하나 있다고 해봐.
만일 지금이 그녀가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고, 이 순간이 지나면 그녀가 늙을 것이고 죽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모른다면,
아마도 그녀의 아름다움이 그렇게 두드러지지는 않을 거야.
어떤 아름다운 것이 그 모습대로 영원히 지속된다면 그 것도 기쁜 일이겠지.
하지만 그럴 경우 난 그것도 좀 더 냉정하게 바라보면서 이렇게 생각할 거야.
이것은 언제든지 볼 수 있는 것이다.
꼭 오늘 보아야 할 필요는 없다라고, 반대로 연약해서 오래 머무를 수 없는 것이 있으면 난 그것을 바라보게 되지.
그러면서 기쁨만 느끼는 게 아니라 동정심도 함께 느낀다네."
"그렇겠군."
종말
"그때였어요."
크눌프가 연신 고집을 부렸다.
"제가 열네 살이고 프란치스카가 절 버리고 떠나버렸던 그때 말입니다.
그때만 해도 전 여전히 무언가가 될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 후 제 안의 무엇인가가 고장났던가 망가져버렸던 거죠.
그때부터 전 아무 쓸모없는 인간이 되어버렸어요.
아뇨, 잘못은 단지 당신께서 제가 열네 살일 때 죽게 하지 않으셨다는 거죠!
그랬더라면 나의 삶은 잘 익은 사과처럼 아름답고 완전한 것이었을 텐데요."
그러나 하느님은 연신 미소를 지으셨고, 때로는 몰아치는 눈보라 속에 자신의 얼굴을 완전히 숨기기도 하셨다.
"자, 크눌프야."
하느님이 타이르듯 말씀하셨다.
"네가 청년이었을 때를 한번 생각해 보려무나.
오텐발트에서의 여름과 래히슈테텐에서 보냈던 시절도 생각해 봐라!
넌 그때 노루처럼 춤추며 몸의 마다마디에서 아름다운 생이 약동하는 것을 느끼지 않았느냐?
너는 아가씨들의 눈에서 눈물이 흐를 만큼 멋지게 노래하고 하모니카를 연주하지 않았느냐?
바우어스빌에서의 일요일들을 아직도 기억하느냐?
너의 첫 번째 연인인 헨리에테도 기억하느냐?
그래, 그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니란 말이냐?"
크눌프는 생각에 잠기지 않을 수 없었다.
젊은 시절 그가 느꼈던 기쁨이 마치 먼 산 위에서 타오르는 불길처럼 흐릿한 아름다움으로 빛을 발하고,
꿀과 포도주처럼 진하고 달콤한 향기를 풍겼다.
그러고는 이른 봄밤의 따스한 바람과도 같이 나지막한 소리를 울리는 것이었다.
아, 정말이지 그때는 아름다웠다.
기쁨도 아름답고 슬픔도 아름다웠다.
어느 하루라도 빼버리기가 무척 아쉬울 만큼!
"그래요. 아름다웠습니다."
그는 인정했다.
하지만 피곤한 어린애처럼 심하게 울먹이며 항변하는 것이었다.
"그때는 아름다웠습니다.
물론 죄와 슬픔도 이미 거기 함께 있었지만요.
그래도 좋은 시절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아마 그 당시의 저만큼 좋은 술을 마시고 즐겁게 춤을 추고 멋진 사랑의 밤을 지새웠던 사람은 많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그러고 나서, 그 모든 게 끝나버려야 했습니다!
이미 그때부터 행복 속에 가시가 박혀 있었어요.
그리고 더는 그토록 좋은 시절이 오지 않았죠.
안 왔어요. 한 번도요."
하느님은 멀리 눈 더미 속으로 사라지셨다.
크눌프가 재차 숨을 몰아쉬고 조그만 핏덩이들을 눈 속에 뱉어내느라 멈춰서자, 하느님은 돌연 다시 나타나 대답하셨다.
"말해 봐라, 크눌프야,
넌 감사할 줄 모르는 아이로구나?
너의 건망증이 그토록 심하다니 웃지 않을 수 없구나!
네가 무도장의 왕이었던 시절과 헨리에테에 대해 우린 함께 얘기했다.
그리고 넌 스스로 인정할 수밖에 없지 않았니,
그때가 정말 아름답고 행복한 시절이었고 의미 있는 시절이었다고.
헨리에테에 대한 추억이 그렇다면 말이야. 얘야,
그럼 리자베트는 어떠냐?
그래, 그 애는 완전히 잊어버릴 수 있었단 말이냐?"
또다시 한 조각의 기억이 멀리 떨어진 산맥처럼 크눌프의 눈앞에 나타났다.
그것은 이전의 기억만큼 행복하고 재미있어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 대신 마치 여인들이 눈물 흘리며 미소짓는 모습처럼 훨씬 내밀하고 진실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가 오랫동안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던 시간들이 무덤으로부터 일어섰다.
그 가운데 아름답고 슬픈 눈을 가진 리자베트가 작은 사내아이를 품에 안은 채 서 있었다.
"전 정말 나쁜 놈이었어요!"
그가 또 한탄을 시작했다.
"아녜요. 리자베트가 죽었을 때 저도 죽어버려야 했어요."
하지만 하느님은 그의 말을 막으셨다.
하느님은 밝은 눈으로 크눌프를 뚫어질 듯 바라보더니 계속해서 말씀하셨다.
"그만해라, 크눌프야!
넌 리자베트를 매우 고통스럽게 했다.
그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너도 잘 알고 있듯이 그 애는 너로부터 나쁜 것보다는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것을 훨씬 더 많이 받았다.
그 애는 한순간도 너를 원망하지 않았다.
이 철부지야, 이 모든 일들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아직도 모르겠느냐?
네가 근심 걱정 모르는 방랑자가 되어 이곳저곳에서 어린아이 같은 행동과 어린아이의 웃음을 전달해 주어야만 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겠니?
그래서 세상 곳곳의 사람들이 너를 사랑하기도 하고 조롱하기도 하고, 그러면서 너에게 고마워하기도 했다는 것을 모르겠니?"
"결국 맞는 말씀이긴 해요."
크눌프가 잠시 침묵하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시인했다.
"하지만 그것도 모두 제가 아직 젊었을 적, 옛날이야기예요!
저는 왜 그것들로부터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고, 또 훌륭한 인간도 못 되었을까요?
시간이 충분히 있었는데 말입니다."
눈보라가 멈췄다.
크눌프는 잠시 멈춰 서서 모자와 옷 위에 두툼하게 쌓인 눈을 털어내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는 멍하고 피곤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제 하느님은 그의 바로 앞에 서 계셨다.
그분의 밝은 눈은 크게 열려 있고 해처럼 빛나고 있었다.
"이제 그만 만족하거라."
하느님께서 경고하듯 말씀하셨다.
"한탄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
모든 일이 선하고 바르게 이루어져 왔고 그 어떤 것도 다르게 되어서는 안 되었다는 것을 정말 모르겠니?
그래, 넌 지금 신사가 되거나 기술자가 되어 아내와 아이를 갖고 저녁에는 주간지를 읽고 싶은 거냐?
넌 금세 다시 도망쳐 나와 숲속의 여우들 곁에서 자고 새 덫을 놓거나 도마뱀을 길들이고 있지 않을까?"
크눌프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는 지쳐 비틀거리면서도 스스로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훨씬 기분이 좋아져서 하느님이 그에게 얘기해 주신 모든 것들을 대해 감사한 마음으로 고개를 끄떡였다.
"보아라."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난 오직 네 모습 그대로의 널 필요로 했다.
나를 대신하여 넌 방랑했고, 안주하여 사는 자들에게 늘 자유에 대한 그리움을 조금씩 일깨워 주어야만 했다.
나를 대신하여 너는 어리석은 일을 했고 조롱당했다.
네 안에서 바로 내가 조롱을 당했고 또 네 안에서 내가 사랑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나의 자녀요, 형제요, 나의 일부다.
네가 어떤 것을 누리든 어떤 일로 고통받든, 내가 항상 너와 함께했었다."
"그래요."
크눌프가 말하여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실은 저도 늘 그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눈 속에 편안하게 누웠다.
그의 지친 사지는 아주 가벼워졌고 열에 들뜬 두 눈은 미소 짓고 있었다.
잠시 잠들기 위해 그가 눈을 감았을 때에도, 그는 여전히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고 그분의 밝은 두 눈을 보고 있었다.
"그렇다면 더 한탄할 게 없겠지?"
하느님께서 물으셨다.
"없습니다."
크눌프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줍게 웃었다.
"그럼 모든 게 좋으냐? 모든 것이 제대로 되었느냐?"
"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것이 제대로 되었어요."
하느님의 음성이 낮아지더니 때로는 어머니의 음성처럼,
때로는 헨리에테의 음성처럼, 때로는 리자베트의 선량하고 부드러운 음성처럼 들려왔다.
크눌프가 한 번 더 눈을 떴을 때는 해가 빛나고 있었는데, 그 빛이 너무나 강렬해서 그는 재빨리 눈을 감아야 했다.
그는 자신의 손 위로 눈이 무겁게 쌓여 있는 것을 느꼈고 그것을 털어내려고 했다.
하지만 잠들고 싶다는 의지가 다른 어떤 의지보다도 강렬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