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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 리딩
한 권의 책을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드느냐 아니냐는 읽는 방법에 달려 있다.
속독가의 지식은 단순한 기름기에 불과하다.
그에 반해 슬로 리딩은 오 년 후 십 년 후를 위한 독서이다.
독서의 재미 중 하나는 읽은 책을 통해 다른 사람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독서는 책을 다 읽었을 때 비로소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글을 잘 쓰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어휘력보다는 조사 조동사의 사용법에서 드러난다.
한편으로는 자유로운 오독을 즐기고 다른 한편으로는 작자의 의도를 생각하는 작업을 동시에 진행해야 한다.
이는 슬로 리딩의 비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좋은 책에는 어느 것에나 수수께끼가 존재한다.
왜!라는 의문을 갖고 읽을 것 이것이 깊이 있는 독서 체험을 위한 첫 번째 방법이다.
독자가 책을 선택하듯 책 또한 독자를 선택한다.
어느 한 작가가 쓴 작품의 배후에는 엄청나게 광대한 말의 세계가 펼쳐져 있다.
한 권의 책을 천천히 시간을 들여 읽으면 실은 열권 스무 권을 읽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뿌듯함을 느낄 수 있다.
생각이라는 행위야말로 독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속독이란 요컨대 머리를 사용하지 않는 독서이다.
주체적으로 생각하는 힘을 기르는 것이야말로 독서의 본래 목적이다.
슬로 리딩에 가장 적합한 것은 음독이 아니라 묵독이다.
베껴 쓰기는 비효율적이다.
실제로 해보면 알겠지만 정확하게 베껴 쓰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원본을 자주 확인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문장의 흐름이 끊겨 버려 정작 중요한 리듬도 전혀 파악할 수 없게 된다.
열 번 베껴 쓰는 것은 일견 속독과는 정반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실은 질보다 양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같은 발상이다.
슬로 리딩의 유효한 기술 중 하나로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할 것을 상정하고 읽는 방법이 있다.
블로그에 독서 감상을 쓰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업무상 해외에 갈 기회가 많은 사람들은 잘 알고 있겠지만 외국인들은 상대방의 교양 정도를 매우 중시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들은 첫 대면인 우리가 사회의 어떤 클래스에 속하는지 어떤 사람인지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에 대화가 모든 것이 된다.
그리고 지적으로 세련된 사람일수록 식사 자리에서는 심각한 업무 이야기나 정치, 종교, 어린이 교육 문제처럼 언쟁의 화근이 되는 화제는 피하고 소설이나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때 무엇이든 괜찮으니 자신이 좋아하는 책에 대해 짤막하게 내용을 설명하고 그에 대한 감상을 잘 표현할 수 있다면, 상대의 신뢰감은 훨씬 커질 것이다.
책을 읽다 보면 아! 이건 다른 책에서 다른 작가가 한 말과 똑같은데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그럴 때는 귀찮아하지 말고 책을 다 읽은 후에라도 전에 읽은 그 책을 찾아 펼쳐보자.
대부분의 경우 양자가 얼마나 다른지를... 즉, 두 책의 내용이 같다는 생각이 자신의 착각이었음을 알 게 될 것이다.
슬로 리딩을 할 때에도 마음에 걸리는 곳에 밑줄을 긋거나 표시를 하는 습관을 들이면 내용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특히 어려운 책을 읽을 때일수록 이 방법은 유효하다.
다리(카프카)
독서 특히 소설을 읽는 가장 큰 즐거움은 그런 상황에서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상상해 보는 것이다.
그러한 자유는 진정한 독서의 깊은 맛을 느끼게 해주며 또한 이는 주체적으로 참가하는 독서의 방법이기도 하다.
슬로 리딩의 테크닉 중에 작가의 의도를 생각한다는 것이 있었는데 카프카의 소설만큼 그러기 어려운 작품도 없을 것이다.
모처럼 찾아온 기회이므로 우리는 여기서 오독력 훈련을 겸해 여러 가지 추리를 해 보겠다.
시작 부분은 "나는 뻣뻣하고 차가웠다. 나는 다리였다"이다.
느닷없이 모순투성이 문장으로 시작된다.
"였다."라는 과거형이라면, 지금 현재는 무엇이란 말인가?
다리가 어떻게 말을 하는 것일까?
단순한 거짓말인가?
시작 부분의 한 문장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이미 지적한 바 있다.
이 소설의 경우에도 어쨌든 타이틀이기도 한 "다리"가 주제이며, "나는 다리였다."라는 선언과 그 위화감이 그대로 작품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고 일단 생각해두자!
반대말을 생각해 보면 그 필연성이 드러난다.
"뻣뻣하고 차갑다."라는 말의 반대는 요컨대 "활발하고 따뜻하다." 일 것이다.
이것은 확실히 생기로 가득한 인상이다.
또한 "얕은 계곡"과 "깊은 계곡"의 차이는 낙하할 때의 충격을 의미한다.
깊은 심연에서 떨어지면 물건은 깨질 것이고 사람이라면 죽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뻣뻣하고 차가운"이라는 수식어는 죽음이나 사체를 연상시키는 말이기도 하다.
"이런 다니기 어려운 고지로 길을 잘못 들어 헤매는 관광객은 없었다."라는 한 문장은 타자와의 접촉이 전혀 없는 장소임을 알려주는데, 푸념이라는 느낌마저 주는 표현이다.
즉, 자신이 놓여있는 상황에 의구심을 품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같은 내용이 반복되는데 거기에는 "지도에 조차도 올려지지 않았던"이라는 수식어가 덧붙여 있다.
즉, 다리는 다리지만 아무도 인식하지 않으며, 그 누군가의 도래를 "기다리고 있다"라는 것이다.
무너지지 않은 바에야 한 번 만들어진 다리가 다리이기를 중단할 수는 없지 않은가? 라는 한 문장으로 우리가 예감하고 있던 낙하 위기는 명시된다.
여기까지 정리해 보면, "나"는 낙하위험을 감내하며 필사적으로 "다리"라는 상황을 견디고 있지만 그것을 인정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이 상황은 "심연으로 파멸적으로 낙하하기 전에는 벗어날 수 없다."라는 것이 된다.
한 번은 저녁 무렵이었다 와 그 뒤의 여름 저녁 무렵은 드디어 때를 알려 준다.
여기에서 다리를 건너는 사람이 등장하고 단번에 일련의 상황이 전개되는데, 앞 단락과의 차이 중 주목해야 할 것은 "몸을 쭉 펴라.
다리여! 당당한 태세를 취하라.
난간 없는 들보여.
너에게 몸을 맡기는 이를 받쳐주어라."라며 자신을 타이르는 말이다.
이로써 독자는 "나"가 "다리"라는 사실은 자명한 것이 아니라 받아들여야 하는 의무임을 알게 된다.
그 순간 상황은 일변한다.
"그"가 "나"에게 올라타 격한 고통에 몸서리를 치게 한 것이다.
그는 누구였을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이들 모두 일상의 질서를 혼란케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나는 그 존재를 알고 싶어 한다.
그리고 다리임에도 불구하고 신기하게도 몸을 비튼다.
이는 다리라는 의무로부터의 일탈이자 포기이다.
그 결과 나는 낙하한다.
"다리"가 섬뜩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은 역할을 빼앗기는 것이 곧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가 돼서야 나는 꿰뚫림으로써 자기 자신과의 동일성을 회복한다.
그리고 그가 잡고 있는 산(사회나 제도) 역시 끝부분부터 부슬부슬 무너져 내리고 있는 것이다.
카프카의 작품뿐만 아니라 소설을 읽는 방법에 정답은 없다.
작자의 의도를 찾아내는 것은 확실히 의의 있는 일이지만 반드시 그에 구속될 필요는 없다. 작자의 의도를 이해하고자 하는 방법과 자기 나름대로 해석을 시도하는 두 가지 방법을 항상 병행하며, 책을 읽고 작품에 따라서는 그 비중을 바꾸는 것이 아마 가장 무난한 전술일 것이다.
속독 책의 가장 큰 오류는 책에 단 하나의 정답만이 존재한다고 전제하는 것이다.